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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향수와 슬픔, 자유에의 갈망, 인간의 극한 상황을 체험했다”
[6.25 특집]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밝힌다
 
통일신문 기사입력  2020/06/24 [15:07]

<장정문 성공회 신부철학박사(평남성천 출생>

스물 한 살의 젊음이 남해의 섬 거제도에서 사중철조망 안에 갇혀 있으면서 짙은 향수와 슬픔, 자유에의 갈망, 허무감과 절망 등 인간의 극한 상황을 체험했다. 한편 그러한 상황에서 훗날 나의 인생길과 가치관을 변화시킨 기독교신앙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6.25전쟁 70, 우리 국민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경남 거제도에서 한국전쟁 때 포로 생활을 한 노학자의 경험담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어언 65년의 긴 세월이 흘러갔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침울한 추억이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인생경험이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을 만나는 계기가 아니었던가.

 

전쟁 중 남쪽으로 피난오던 민간인들이

포로로 잡혀오고 북한 땅에서 인민군 징발을

피해 숨어 있다 북진해 오는 한국군을 환영하며

치안대 활동을 했던 청년들도 포로가 됐다

 심지어 국군장병들도 전쟁의 와중에서 유엔군에 잡혀와 P.W (Prisoner of War 전쟁포로)도장이 찍힌 옷을 입어야 했다. 연령층도 육칠십 세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열 두서너 살의 어린 포로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인민군출신 포로들이 다수이지만 그 인민군 포로들도 사상이나 이념은 서로가 크게 달랐다.한국전쟁이 동족간의 싸움이고 또 유엔군이 참전한 국제적 전쟁이기 때문에 유엔군 포로들의 상황이나 성격이 다른 나라들의 전쟁포로들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전쟁 유엔포로수용소에는 포로 아닌 포로들이 많았다. 전쟁 중 남쪽으로 피난 내려오던 민간인들이 포로로 잡혀오고 북한 땅에서 인민군 징발을 피해 숨어 있다가 북진해 오는 한국군을 환영하며 치안대 활동을 했던 청년들도 포로가 됐다.

북한체제를 싫어하면서도 인민군 징발을 피하지 못해 입대했다가 한국군에 귀순하여 포로가 됐다. 소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 복을 입게 됐던 남한출신 청년들도 국군의 북진 때 대거 귀순해서 유엔포로수용소에 오게 됐다. 나는 좌익적색포로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판문점 정전회담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포로수용소의 분위기가 조용했다.

나는 195079, 평남 순천(順川)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으로 졸업식과 동시에 학교강당에 갇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동료생들과 함께 강당에서 밤을 새우고 그 이튿날 아침 인민군 입대를 강요당했다. 여름교복을 입은 채로 화물차에 실려 원산해군기지로 이송되었다. 그 해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미군의 집중공습, 폭격과 기총소사를 당하게 되었다. 급히 기지 안의 방공호에 피했지만 두렵기만 했다.

  

1950713일 원산해군기지, 지금도

그 때의 위기와 공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949년에

모택동에게 요청 전쟁경험 많은 조선족군인들을

극비리에 끌어들여 원산인근 산중에 숨겨놓았다.

 

 1950713일 원산해군기지, 지금도 그 때의 위기와 공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해군경비병의 지시로 산으로 뛰어 도피, 그러다 인민 군복을 입게 됐다. 나의 인민군 생활은 불과 3개월로 끝났다. 주로 원산인근의 산중토굴생활이었다. 우리부대는 중국 모택동 팔로군에 속했던 조선족 부대였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1949년에 모택동에게 요청하여 전쟁경험 많은 조선족군인들을 극비리에 끌어들여 북한의 원산인근 산중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나는 이들로부터 중공 모택동군과 장개석군 간의 전쟁담을 들었다. 6.25 동란 발발,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그 선봉전투원은 그 조선족 부대였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산중 인민군생활을 3개월로 끝내고 탈출했다. 그해 10월 중순, 한국군이 동해안 전선으로 북진해 올 때 후퇴하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하여 민간인 집에 들어 있다가 국군26연대소속 두 학도병에게 귀순했다.

내가 이렇게 스물한살 나이에 그러한 용기를 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는 날 밤 우리 소대가 야간동원으로 트럭에 태워져 바닷가로 달리고 있었다. 트럭짐칸에 소대원들이 가득히 세워진 채 실려 차가 밤길을 달리는데 내 어깨의 장총이 벗겨져 밑에 깔렸고 딴 대원의 총과 바뀌었다.

그 이튿날 오전 나는 중공군이었던,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의 부소대장에게 불려 그의 토굴 속에 들어갔다. 그는 내가 군인으로서 총을 잃었고 또 내 고등학교로 조회를 해보았더니 학교시절 반동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며 처형하겠는데 "총창으로 찔러 죽인다"고 한다.

나는 정신이 벙벙한 채 그 토굴을 나왔다. 천우신조로 그 다음 날 야간에 부대 총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유엔군, 한국군이 강원도 안변으로 북진하여 인민군이 급하게 야간행군으로 안변지역으로 가서 대원들을 산중에 배치한 것이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한미연합군 편이어서 인민군은 뒷산, 뒷산 이동을 하면서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기회에 결심하고 인민군대열에서 탈출했고 성공하여 한국군 26연대 소속 두 학도병을 만나 귀순했다. 이 탈출 때 은인 한 분을 만나 위기를 면하고 도음을 받았다. 나는 26연대 본부에서 수일간 한국군, 치안대원들과도 같이 있었다. 한국군사병은 나보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서북 평안남도 쪽 귀향길이 아직 공산군지대여서 포기하고 자원하여 부산포로수용소로 갔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포로수용소생활은 부산진 수용소를 거쳐 동래지역 포로수용소에서 수개월간, 그리고는 19511월 중공군이 밀려 내려와서 포로수용소들이 일제히 거제도로 이전되었고 나는 거제도 제74수용소에서 1년간 살게 되었다. 한국전쟁 정전회담이 열리고 북한 귀환포로와 반공포로를 구별하는 포로 심사가 수용소 광장에서 열렸다.

나는 반공포로로서 한국을 택하여 내륙인 충남 논산수용소로 옮겨왔고 1953618,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철조망을 벗어나왔다.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고모의 가족을 충남 대전에서 만나 대전에서 살게 되었다.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인간사회이다

전쟁의 산물이고 철조망 안에 갇혀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집단이고 공동체인 것이다

 

 

이상은 주로 나의 포로 경위와 포로수용소의 이동 상황이었다. 그럼 포로수용소 안의 생활과 체험은 어떠했던가.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나 자신은 인민군 후방부대에 속해 있어 일선 전투를 몰랐고,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단 한 사람의 시체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포로수용소 안에 들어와서 온갖 전쟁의 참상과 피난민들의 수난 담을 들어 알게 됐다.

포로수용소도 하나의 인간사회이다. 전쟁의 산물이고 철조망 안에 갇혀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집단이고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회처럼 행정 혹은 관리체제와 질서 유지를 위한 경비기관이 있었다. 식사공급을 위한 취사장, 의류, 신발 등의 물품 공급, 환자들을 위한 진료소, 매일 철조망 바깥으로 열 지어 나가는 작업동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한 수용소 내 광장 주일예배와 종교 활동, 포로 교육을 위한 건물과 교원텐트 등 여러 특수기관들과 활동이 있었다.

나는 유엔의 포로교육 프로그램(CIE)에 따른 수용소 안의 한 교사로서 처음으로 포로 청중에게 유엔과 자유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다. 얼마 후에는 북한에서 중고등학교 다녔던 소년포로들에게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중등부교육의 국어 교사가 됐다.

교재와 참고 서적은 수용소당국에서 파견한 민간인 교사들을 통해 구했고 그들과 의논하여 교육에 종사했다. 이때의 국어 교사 경험을 지금도 소중한 것으로 기억한다. 중 고등학교 시절 문학도였던 내가 포로수용소에서도 문학 서적을 읽고 가르치고 글을 쓸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때 매일 일기를 쓰고 시도 여러 편 지어 동료 미술가가 그려준 삽화와 함께 시집묶음을 만들었지만 아쉽게도 다 사라져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국어 교사 생활은 거제도에서 논산수용소로 옮겨 온 후에도 계속 됐다. 영어는 8.15해방 후 고향 성천농업학교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고 약 2년 정도의 기초영어는 읽을 수 있었다. 이 기초영어를 배경으로 거제도 수용소에서 한국의 대학출신에게 영어를 지도받고 독학도 하여 훗날 한국에서 대학영문학과 신학연구도 하게 되었다.

 

 

역사와 경험들이 우연히 생긴 것일까

한반도 남북 간 분열과 전쟁은 삼팔선에서

만이 아니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일어났고 치열해졌다

 

 

포로수용소 안의 사상동향과 이념문제들을 적어본다. 한반도 남북 간의 분열과 전쟁은 삼팔선에서 만이 아니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일어났고 치열해졌다. 내가 부산 동래수용소와 거제도에 왔을 때만 해도 소 내 분위기는 비교적 평온했다. 그런데 판문점 정전회담이 포로 교환문제로 교착상태가 되면서 포로수용소 안이 어수선해 지고 불안해 지다가 점점 폭력화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의 비밀지령과 행동이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전회담에서 북한 측 대표는 유엔군 측 대표에게 강력히 주장하고 요구했다. 유엔포로수용소의 전체 포로들을 북한 조국으로 귀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포로들이 인민공화국 품안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데 미국과 남조선 당국이 억류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억지였고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측은 유엔 포로들을 전원 북송하더라도 북한에 잡혀있는 유엔군과 한국군 포로들을 데려오고자 했다.

그러니 우리 반공포로들은 사태를 좌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엔 본부와 미국 대통령에게,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한에서 강제송환을 결사반대한다는 편지들을 보냈고 더 격렬한 반한, 반미 구호를 외치며 행동했다.

그 대표적인 좌익수용소가 바로 우리 74수용소의 이웃인 76수용소(75수용소는 없었음)였다. 76수용소에서는 매일 북한의 깃발을 달아 올리고 북한 군가를 부르며 인민군 군사훈련도 했다.

이렇게 극렬한 상황이니 관리와 질서를 위해 당연히 들어가야 할 담당 미군 지아이(GI)들이 그 수용소에 접근하지 못했다. 판문점정전회담 후 포로들에게 남과 북,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는 자유의사를 묻는 포로 심사도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76수용소에서는 현장 시찰차 동경에서 온 도드 유엔 포로수용소 소장을 납치해 포로로 삼았다. 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소장을 납치 감금한 것이다. 당시 전 세계에 보도 된 충격적 대사건이었다. 이 같은 극한적 대결과 증오의 상황은 80단위, 90단위의 수용소로 파급되어 수용소마다 좌 아니면 우로 우 아니면 좌로 바뀌었다.

 

 

74수용소의 포로들은 자유로운 의사표시로

대다수가 자유를 택해...소수이지만 북으로

간 포로들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보다도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우리의 74수용소에서도 어느 날 밤 좌익 행동대들이 기독교의 간부들이 들어 있는 천막을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그 때 그들이 그 간부들을 처치하고 연대본부를 장악했다면 우리 수용소도 그들의 독재 하에서 자유를 잃고 전원 북한으로 압송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으니 천우신조였다. 잘 알려지고 물적 증거도 나타났지만 좌익수용소에서는 반공 혹은 우익으로 지목되는 포로들은 가차 없이 잔인하게 살해되고 소 내 어딘가에 암매장 됐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자유애호 혹은 무고한 포로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을 것인가. 이런 좌익수용소들에 비하면 내가 들어있는 74수용소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남과 북의 길을 가르는 포로 심사도 별 문제 없이 실시 됐다. 유엔 포로수용소 당국은 그 심사일 닷새 전부터 철조망 둘레에 설치된 몇 개의 확성기를 통해 계속 말했다.

그 누구의 말을 듣지 말고 자신이 판단하고 결단하라.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이미 포로 명단이 교환 됐으니 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에게 피해가 있다. 그러니 북한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될수록 북에 가도록 권했다. 하지만 우리 74수용소의 포로들은 자유로운 의사표시로 대다수가 자유를 택했다.

소수이지만 북으로 간다고 말한 포로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밧줄 왼쪽 길로 나가 74수용소 밖에서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려 딴 수용소로 옮겨갔다. 나는 그들을 북한행 포로들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보다도 고향의 부모와 처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 나는 북한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대한 많은 비판을 들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가 비과학적이고 낙후한 관념사상이며 아편과 같아서 근로계급의 계급투쟁을 마비시킨다고 비판했다. 도대체 신이 어디 있느냐며 무신론을 강조했다. 기독교적 가정배경이 아니고 무신론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나는 쉽게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되지 못했다. 나는 교회니 목사님이니 하는 용어들을 포로수용소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고 설교도 처음이었다.

포로수용소 생활 초기인 1950년 크리스마스 무렵, 동래 제2수용소 광장에서였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목사라는 사람이 단상에서 설교를 했다. 나는 춥고 외롭고 그 어디에 마음의지 할 데 가 없어 사람들의 뒤쪽에 엉거주춤 서서 귀 기울였다.  

예수 사랑하심은……아마도 그 찬송이 내 영혼을 두드린 것 같다.

거제도 74수용소에서는 광장 주일예배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만의 중대급 천막들이 있고 그들은 성경통신과 공부도 했다. 하지만 나는 중등부 교사직에 더 성실하고 신앙생활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쳤다.

1954년 어느 봄 날 밤에 신비로운 계시의 꿈을 꾸면서 더욱 그러했다. 결국 나는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성직자가 되었으며 신앙과 신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다. 그리고 포로수용소 국어 교사직의 연장선상이라고나 할까,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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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4 [15:07]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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