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자력갱생으로 못살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6] ‘평양에 자신의 새 아파트가 두 개’라며 자랑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11/06 [21:12]

북 자력갱생으로 못살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6] ‘평양에 자신의 새 아파트가 두 개’라며 자랑

통일신문 | 입력 : 2020/11/06 [21:12]

북한에 수십 년 살다 온 탈북자라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평양 구경 한번 못한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알다시피 북한은 주거이전 자유가 없다. 평생을 한 지역에 묶여 살다시피 하니, 주변 명승지, 온천 등도 제대로 못 가본 사람들이다.

 

 

평양에도 금강산을 못 가본 주민이나 북 공무원(안내원)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기회가 없으면 절대 자의적 행동은 용납 안 되는 북녘사회 아닌가. 어디로 움직여도 통행증이 필요하고, 주민끼리 서너 명 이상 모여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알게 모르게 상대 행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회시스템이다. 토론토의 한 외화벌이 탈북자는 중국 체류 시 한·중 축구 경기 때 ‘한국이 한 골을 넣자 순간적으로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는 이유(동료밀고)로 북에서 송환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으로 귀국 대신 캐나다 토론토를 택했다. 몸에 지닌 외화로 중국에서 위조여권을 만들어 토론토 상륙 첫 탈북자가 돼버린 경우가 있었다. 잠깐 온타리오주(수도 토론토) 탈북자 내용을 언급하고 지나가자.

탈북자들 토론토에 지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캐나다 정부는
뒤늦게 이들의 지문검사를 시작

토론토엔 한때 탈북자가 2,200여명까지 달했다. 수년 전 토론토 한 이민 전문변호사가 밝힌 통계로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허위신고 등으로 탈북자들이 추방 또는 자진 출국으로 상당수 토론토를 떠났지만, 아직도 3백여명 정도 남아있다고 한다. 최근 그들에게 희소식은 비록 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이민변호사 등을 통해 구제받아 영주권까지 받은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탈북자도 정부 추방령에도 끝까지 숨어 살다 ‘인도적 차원’ 판정으로 5년 만에 마침내 영주권을 받았다. 이젠 캐나다에서 떳떳이 생활하게 됐다고 기쁨에 들떠있다. 이를 보면 세상일은 정말 요지경 속이다. 최악의 순간에도 끝까지 버틴 놈이 결국 살아남은 셈이기 때문이다.
다른 탈북자의 자조적인 말이 생각난다. “함경도 고향에 있을 때 우리 끼린 이런 말을 자주 했어요. ‘여우와 승냥이만 살아남았다’라고. 배급이 끊긴 후에도 혹시 정부(북) 대책을 기대했던 순진한 인민들은 그때 다 굶어 죽었지요.”
한국입국 탈북자는 정부 후원금을 받은 얼마 뒤 일부는 다시 보따리를 쌌다. 그들은 바깥 정세를 파악 후 처음 한때는 영국 런던 등지로 몰려들었다. 이후 길이 막히자 토론토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캐나다는 소문난 복지국가이고, 어느 국가보다 난민등록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탈북자들이 토론토에 지속적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캐나다 정부는 뒤늦게 탈북자 지문검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전부 한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왔다고 캐나다 정부를 속였다. 이름과 나이 등을 제멋대로 바꾸고 한국 여권은 숨겼다. 그러나 나중 한국 조회 결과 2천여 명 탈북자 모두 한국적임이 밝혀지면서 혼란을 겪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일단 미 뉴욕 관광객으로 들어간다. 이어 나이아가라 버스 관광으로 미국·캐나다국경을 통과 후 근교 대도시 토론토에 둥지를 틀었다. 토론토 200여개 한인교회들은 물심양면 이들을 감싸줬다. 탈북자 전문 브로커까지 생겼다.
캐나다 정부에 난민 등록만 하면 영주권자와 꼭 같은 혜택을 입는다. 100% 병원치료 및 약 무료제공, 고교졸업까지 자녀교육 100%, 영주권심사(보통 1~2년) 때까지 매달 1인당 600달러 생활보조비를 받는다. 시간당 수당도 한국보다 2배 정도 높았다. 지금은 한국 정부가 시간당 인건비를 대폭 올린 상태지만 아직 적잖은 차이가 있다.

주민들 생활 어려워도 반국가데모 안해
그들은 모두 북한을 이해하려고 애써
토론토에서 탈북자 만남은 어렵지 않다. 웬만한 한인교회는 아직도 한두 명 탈북자들이 있다. 문제는 걔 중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모처럼 토론토 교포사회에서 발생한 큰 사기사건(아파트 보증금 사기 건과 주택 수리비 횡령 건)도 탈북자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탈북자 관련해선 좋든, 싫든 참고 얘기가 많다. 나중 다시 논할 기회를 갖겠다.
최근 김정은 정권 아래 평양 도시 겉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과거 방북 시와 비교하면 천지개벽할 만큼 변모됐다. 그만큼 빈부격차도 더욱 심해진 듯하다. 2년 전 토론토를 방문했던 한 북한 간부는 우연한 대화 끝에 “평양에 자신의 새 아파트가 두 개”라며 은근히 자랑했다. “그렇게 개인으로 둘씩 가질 수가 있나요?” 하나는 친척 이름으로 해 놓았다고 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평양 거리엔 하이힐을 신고 신형유모차를 끄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민들의 휴대폰(북한 손 전화) 사용, 어린이 인라인 스케이팅 등은 도심 어디든 발견된다. 현대식 구조물과 새 레스토랑 등 과연 이곳이 배고픔에 아사자가 속출했던 북한인가를 의심케 한다. 김일성 시대엔 그가 사망하면 곧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 믿는 풍조가 있었다.
김일성 사후 극심한 국가 경제 파탄으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고 진작 배급까지 끊겼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 생활이 어려워도 북 주민들은 반국가데모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을 이해하려 애쓴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잘사는 이유가 순전히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은 자력갱생으로 남 도움 없이 홀로 일어서야하니 못살아도 참아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있다.

방북 마치고 갔던 항공로 그대로
돌아올 때 시카고 공항에 닿으니
미 정보요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북한방문 길은 중국 ‘직항’노선이 생겨 편해졌다. 그러나 1980년대 캐나다의 북한행은 항공로가 복잡했다. 미국(시카고)을 경유해 일본(도쿄)에서 자고, 다시 중국(북경)에서 하루 묵었다. 북경(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 비자를 받고, 항공권구입 뒤 공항으로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 후 중국 심양(선양)에도 평양노선이 생겨 방북길이 더 간편해졌지만, 북미교포들 대부분은 북경을 거쳤다. 기왕 중국을 지나니 만리장성, 자금성 등 북경유적지 관광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평양 다녀온 길을 새삼 밝히는 이유는 미 CIA의 정보 능력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관광 도중 판문점을 방문해 2층 ‘판문각’에서 남쪽의 산하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을 때였다. 바로 건너편 남쪽엔 ‘자유의 집’이 보였다. 북쪽으론 인민군 병사들이 부동의 자세로 임하고 있고, 남쪽(한국) 곳곳엔 미군 병사 모습만이 보였다. 단 한 명도 한국 병사 모습은 없었다.
갑자기 우르르 미군들이 몰려나와 2층의 나를 겨냥해 카메라를 들이대며 찍었다. 고급 버버리(Burberry) 겨울 코트를 입은 양복 차림이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나를 어디 거물급인 물로 여겼는지, 수상히 여긴 것 같다. 며칠 뒤 방북을 마치고 갔던 항공로 그대로 돌아올 때였다. 시카고 공항에 닿으니 미 정보요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만 따로 불러 심문했다. 캐나다 시민권자니 캐나다 여권이었다. “당신 직업이 뭔가” “신문기자다” “기자라고 확인할 수 있는 증명서 2개를 보여라. 사진이 부착된 증명서를 원한다” 명함을 내밀다 말고 내 얼굴이 부착된 당시 조선일보 신분증 및 토론토 경찰국본부발행 기자출입증을 보였다. 그제야 싱긋 웃으며 “뭘 산 게 있느냐”며 얼버무리며 놓아줬다.
판문각에서 미 병사에게 사진 한번 찍혔을 뿐인데, 내 여행행적을 추적해 나를 찾아낸 미 정보능력에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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