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산가족은 북한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이민을 오기도 했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7] 고향 시골 밖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11/13 [21:32]

“어느 이산가족은 북한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이민을 오기도 했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7] 고향 시골 밖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

통일신문 | 입력 : 2020/11/13 [21:32]

사리원에서 외조모 친척을 만났다. 방북당시는 생각도 못했던 만남이었다. 외조모조카인 장재웅(이천군) 노인은 두 아들과 함께 사리원 3.8려관(호텔, 북에선 숫자로 건물 등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는 70에 가까웠고 동행한 두 아들 중 한명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전형적인 시골농부였다. 작업복 차림으로 단정했으나 구두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세상 밖 물정이 무척 어두웠다. 커피라든지 콜라 등 탄산수 음료는 아예 몰랐고 본 적도 없었다. 생전 고향 북 강원 시골 밖을 떠나본 적 없는 사람들 같았다.

 

강원도는 유일하게 남북으로 갈려 있어

북강원도취재…원산은 필수방문 지역

 

노인은 갑자기 캐나다에서 웬 친척이 찾는다 해서 깜짝 놀랐다한다. 남쪽 서울에 살던 외조모 손자의 평양방문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산골 토종꿀을 단지에 담아 선물로 들고 왔다. 나는 준비한 게 없었다. 갑작스런 만남의 해프닝으로 상견자체도 어색했고 뭘 어찌할지 몰랐다. 친척이라고 눈물도 나지 않았고 별 할 말도 없었다. 족보로 따지면 5촌 관계가 된다고 하나. 쓸 돈 얼마를 남기곤 주머니를 털었다. 미화 9백 달러를 겨우 전했다. 여유가 없으니 어쩌랴. 그나마 미화가 북에선 위력을 발하던 시기라 다행이었다.

다음 방북 때는 취재기간 중 틈을 내 친척면회신청을 했다. 주로 원산에서 만났다. 북 강원도 수도 원산은 원래 함경남도에 속한다. 해방 후 46년9월 북 강원도 수도가 된 도시다. (나중 함남 문천 시까지 강원도로 편입돼 북 강원도에는 2개시가 됐다.) 강원도는 유일하게 남북으로 갈려 있어 북 강원도취재를 위해 원산은 필수방문 지역이었다.

평양에서 원산까지는 약2백km. 택시 값이 미화440달러다. 북경에서 평양까지 항공료 3백여 달러에 비하면 무척 비싼 가격이다. 한번은 북한최대농대인 원산농업대학교와 원산예술학원장과 인터뷰했다. 원산 동명관 호텔에서 예술원장과 안내원 등 4명이 저녁식사를 했는데 식사대가 2백50달러가 나왔다.

평양이라면 1백 달러 남짓 정도 일 텐데 바가지요금 같았다. 현대그룹 고 정주영회장이 북 강원도를 다녀간 지 훗날이지만 나를 정 회장처럼 재력가로 착각했는지. 음식 값 갖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또 지금이야 전기사정이 나아졌겠지만 한 밤중 룸에서 한창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가 당황했다. 그만큼 전기사정이 안 좋았다. 암흑 가운데 방에서 식사를 한 경험도 있다.

북 강원취재 중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정주영현대회장(고향 통천)이 첫 북 강원도 방문 시 옛 애인과 유복자 친딸(43년생)을 만났다는 정보였다. 북 강원도청공무원이 딸 가족 주소 등 자료를 제공해줬다. 옛 시절 급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정 회장은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당시 그 내용을 조선일보 가정조선(현 여성조선 전신)잡지에 슬며시 특종기사로 게재했다. 잘못하면 명예훼손으로 걸릴 판이다. 그 스토리는 뒤로 미루려고 한다. 그 후 1996년 모스크바 특파원당시 정 회장 친척이 탈북 한 사실이 서울3개중앙지에 1면 톱기사(96년7월10일자)로 실린 것을 봤다. 같은 가족관계인지는 확인 못했다.

 

친척들 한데 모였으나 각 개인과의

진솔한 대화가 힘들었다는 것 아쉬워

 

외조모조카 친척은 숫자가 자꾸 늘었다. 원산에서 만날 때는 함경도 명천(명태로 유명)에서 친척 된 한 노인이 북어를 싸들고 왔다. 명천탄광에서 일하는 그는 원산까지 교통편이 힘들어 고생고생하며 찾아왔다한다. 7-8명이 모이니 계획(예산)에 차질을 빚었다. 원산은 관광도시라 그런지 음식 값이 비싼 편이다.

오래전 가격인데도 식사요금이 3백여 달러가 나왔다. 친척 장 노인이 펄펄뛰고 흥분해 오히려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시골 빈곤층으로선 단1달러도 귀한 판에 식사대가 3백 달러가 나왔으니 깜짝 놀랄만했다. 아쉬운 것은 여러 친척들이 한데 모였으나 각 개인과의 진솔한 대화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잠깐 식사와 일부가족노래를 듣고 송도원에서 사진을 찍은 뒤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했다. 헤어질 때마다 “언제 다시 조국(북한)에 오느냐”고 물었다. “조국에 무슨 국제행사가 있으면 신청하고 승인을 받고 오지요. 제 맘대로 아무 때나 방문할 수 없어요.”

언젠가 평양에 국제청소년태권도대회가 열릴 때다. 평양 서산호텔에 묵었는데 친척만남을 호텔근처로 주선해 줬다. 이때 놀란 것은 수십 년간 친척들이 단 한 차례 평양방문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서너 시간 만남 후에는 다시 헤어져야 한다. 또 언제 만남기회가 주어질지 알 수 없다. 방북이 힘든 것은 내 기자신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소 해외친북창구나 북간부들로부터 미움을 산 이유도 있다고 본다.

토론토 경우 북을 다녀온 이산가족들은 따로 그들끼리 매달그룹모임을 갖고 친북창구를 통해 북한과 소통했다. 그들은 남과 북을 자유로이 방문한다. 어쨌든 수차례 내 방북취재를 용인해 주고 친척까지 찾아준 북측성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내겐 가까운 친척이든, 먼 친척이든 상관없다. 일단 인연이 맺어진 이상, 지속적인 만남을 갈구하는 그들의 소망을 저 버릴 수 없었다. 산골에 사는 촌민들에겐 이념문제를 떠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또 산촌이라 건뜻 하면 자연재해(가뭄이나 홍수(큰물)피해가 심했다. 친척과는 두서너 번 더 만남의 기회가 있었으나 잘 대해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좀 더 세심한 배려를 못해주었는지 후회스럽다. 세계에 우리민족처럼 수십 년 분단으로 핏줄이 갈라진 기막힌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일제강점기에도 분단돼 혈육이 갈린 이런 비극적 환경은 결코 없었다. 어느 이산가족은 북한 가족 찾기를 목적으로 아예 이민 온 사람도 있다.

해외동포경우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는 북한방문이 일단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난 1987년 노태우대통령7.7선언인 해외동포 북한방문허용이 정식 선포된 이래 엄청난 숫자의 북미주동포가 북한방문 물결에 합류했던 일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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