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북한 가족 만날 수 없어…해외 일부 한인교포들 민낯”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0] 북한 지금은 어떻게 흐름이 달라졌을까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0/12/17 [21:21]

“돈 없으면 북한 가족 만날 수 없어…해외 일부 한인교포들 민낯”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0] 북한 지금은 어떻게 흐름이 달라졌을까

통일신문 | 입력 : 2020/12/17 [21:21]

북한의 1996-97년은 6.25전쟁(조선전쟁 부름)때보다 더욱 극심한 고통을 준 시기였다고 한다. 정부배급이 끊긴지 오래였고 지방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탈북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97년 방북당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겉모습의 평양은 예전 그대로 평온했기 때문이다.

 미주창구에서 이산가족 만남주선에

이산가족 상대로 한 일종의 비즈니스 1인당 3-4천 달러통일사업빙자

호텔마다 외국인이 들락거렸다. 나중 알고 보니 북을 돕는다고 온 유엔 산하 직원들이 많았다. 베이징에서 1주일에 2번 운항되는 평양행민항기(승객 138)에 늘 손님이 꽉 찬다고 한다. 스튜어디스는 이를 만땅됐다고 표현했다. 평양행 기내에는 여전히 미주교포(이산가족)가 있었다. 옆자리의 두 여성이 물었다. “어디서 오세요? 우리는 미국하와이에서 왔어요. 얼마나 냈습니까?” 알고 보니 커미션 얘기다. 그들은 1인당 4천 달러씩 내고 친척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한다.버스나 전차 등 교통수단엔 여전히 시민들이 넘쳐났다. 노래방도 늘었고, 자동차도 증가해 있었다. 특히 중국인소유 자가용만 1천대를 넘었다고 들었다. 평양거주 중국인들은 그들끼리 연합체를 이루고 상권을 형성했다. 평양시민들은 그들을 장사질만 하는 떼놈이라고 멸시했다. 중국인들은 아파트도 밀집으로 거주했다.

미주창구에서 이산가족 만남주선에 1인당 3-4천 달러라는 소문은 진작 듣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토론토에서도 1인당 1천 달러라는 얘기를 들었다. ‘통일사업을 빙자해 북에서 창구승인을 받고 이산가족 상대로 한 일종의 비즈니스였다. 빌어먹을 놈들. 이젠 북미 주에 살아도 돈 없으면 북한가족조차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해외 일부 한인교포들의 민낯이다. 지금은 어떻게 흐름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또 시카고인지 매년 최신 해외학술서적을 북한에 전문적으로 공급해 주는 창구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북미 친북단체는 소리 없이 뿌리를 넓혀가는 듯했다.

그 즈음 미주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게 LA 노길남 (금년3월 코로나19로 사망)1999년 창간한 민족통신이다. 강릉출신인 그는 서울 재외언론인행사에 두세 번 참석했고, 토론토에도 온 적이 있다.

토론토에서 공항 환송할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물었다. “노형! 아무리 사람이 없다지만 북에서 어떻게 노 형 같은 사람에게 박사학위와 메달을 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학력도 별로인데

왜 내가 어때서. 고교는 2차였지만 대학은 연세 대를 나왔잖아요.” 공항에서 출발시간이 많이 남아 공연히 시비조의 유치한 대화로 티격태격했다. “송 형이 정리해 발간됐다는 최홍희 회고록(1-3)LA로 보내줘요. 새로 이사한 집주소를 줄 테니,” 그날 내 말에 기분이 안 좋았던지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우송한 책들이 반송 안됐으니 받았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가 계획했던 해외 언론인들의 방북주선이 무산된 일이다. 이상하게 그는 한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었다. 북에서 받은 박사논문 제목은 북조선이 이룩한 일심단결과 민족대단결 해법연구이었다. 고인이 됐으니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삼가 하겠다.

 

평양은 극심한 식량난, 연료난으로 인해

모처럼 등장했던 교통신호등 작동 중단

여성 교통안전원이 종전처럼 교통정리

 

평양에 닿자 북한당국은 대동강호텔에 숙박케 했다. 10일간 일정을 보니 전부 평양체류이다. 잠깐이라도 평양 밖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떻게 평양에서만 10일간 계속 묵습니까? 한번 금강산이라도 갑시다.” 금강산을 가야 중간에 황해북도를 거쳐 원산과 안변, 통천 등을 지난다.

금강산은 이미 예전에 다녀왔잖소?”

금강산이야 명승지이니 몇 번을 가도 좋지요. 열흘 동안 평양에만 있으랍니까.” 처음엔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23일의 금강산여행을 허락해 줬다.

그럼 자동차연료 값이랑 전부 내셔야 하오.”

걱정 마세요. 지금 나라가 어려운 형편 같은데 공짜구경 안하렵니다.”

안내원에 따르면 평양에서 약 10여만 명 주민이 지방으로 떠나갔다고 전한다. 그는 자진해서 타 지역으로 애국 봉사로 갔지요. 국가를 위한 봉사지요라고 강조했다. 식량난인 듯싶다. 나중 깨달았지만 이때는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전환돼 있어 나라전체가 풍전등화 상태였던 것 같다.

그해 974월엔 북한 황장엽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해 왔고, 8월에는 반대로 오익제 당시 민주 평통 정책자문위 상임위원(전 천도교 교령)이 월북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 그해 늦가을 한국은 IMF사태로 온 국민이 난리를 겪던 시기다. 한반도 전체가 출렁대고 있었다.

평양은 극심한 식량난, 연료난으로 인해 모처럼 등장했던 교통신호등 작동을 중단됐다. 다시 여성 교통안전원 (애칭 네거리 무용수)이 종전처럼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최초의 북한 네거리신호등 가설은 류미영 청우당위원장 장남 최건국 고교(서울사대부고)선배가 독일에서 수입한 첫 작품이다.

교통안전원은 여성이라도 무술, 사격, 운전, 정비자격까지 겸비해야 안전원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최 선배는 한국이산가족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 옛일이지만 북한가족과 한국가족을 북경호텔에서 극비리에 첫 만남을 성사시킨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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