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봉] 안익태 선생과의 소중한 인연

박신호 방송작가 칼럼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2/25 [22:34]

[모란봉] 안익태 선생과의 소중한 인연

박신호 방송작가 칼럼

통일신문 | 입력 : 2021/02/25 [22:34]

▲ 박신호 방송작가     ©통일신문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 있다. 나 역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 있다. 추억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악몽 같은 지난날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추억이 악질인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수없이 머리를 내저어도 지어지지 않고 달라붙었다. 생시에도 부족했던지 꿈에도 나타나 가위에 눌려 벌떡 일어나게 한 게 부지기수다. 아직도 그 악몽은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다. 

내가 태어나기는 서울이지만 자라기는 일본 ‘나라’라는 도시다. 한국의 경주와 비견할 수 있는 작은 도시라서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큰 부처님도 볼 수 있고 공원에는 꽃사슴이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곳도 세계대전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밤이면 공습경보가 울리고 낮에는 드높은 하늘에 은빛을 반짝이며 B29기가 유유히 지나가곤 했다. 더불어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드디어 일본이 전쟁에질 것이란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일곱 가족이 갑자기 귀국하게 됐다. 살기 위해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다가 다시 살기 위해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그때가 소학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1945년 4월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귀국이어서 모든 게 낯설어 보이기도 하려니와 주위에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 7년간을 살면서 전혀 우리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집에서만 몇 마디 나눈 게 전부라 아무래도 우리말이 남의 나라말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10월에 드디어 한국학교에 진학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전국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교장 선생님의 목맨 축사가 끝나고 ‘애국가 합창’이 있었다. 선생이 지휘봉을 올렸다가 내리자 일제히 목청을 높였다. 엉겁결에 나도 따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하지만 난 나도 모르게 ‘기미가요’ 곡조로 부르고 있었다. 황급히 멈추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겨우 익혀 놓은 애국가 가사를 읊조렸다. 언감생심 노래는 따라 부르지도 못했다. 입만 뻥긋거렸다. 조회시간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혀 짧은 소리로 우리말을 한다며 ‘쪽발이’란 놀림을 당하며 살던 판에 나라의 노래인 애국가를‘기미가요’로 부르려다 말다니 당장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날부터 애국가 악몽은 시작했다. 서울 명동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시공관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흥분했다. ‘코리안 판타지’ 연주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1955년 3.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초연이 있는 날이었다. 감격스럽고 흥분의 하루였다. 자리에 앉기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막이 오르며 무대에 조명이 비치자 지휘자 안익태 선생이 등장했다. 잠시 관객석을 보고만 있다가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우레 같은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환호 소리로 귀가 멍했다. 몇 분이나 지나갔을까. 이윽고 ‘한국 환상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선생의 지휘는 열정이 넘쳤다. 연신 입바람을 불 듯하며 온몸으로 지휘를 했다. 오케스트라가 한 손에 있는 듯했다. 연주하는 동안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나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감상했다. 그리고 끝나자 모두가 안익태 선생에게 감사의 기립 박수를 길게, 아주 오랫동안 친 기억만 남아 있다. 

그리고 난 뒤 다시 안익태 선생을 뵌 게 을지로 사거리에 있던 원각사 연극공연장에서다. 사회자가 2층에 계신 선생을 소개했다. 모두 일어나 극장이 떠나갈 듯 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애국가를 작곡해준 분에 대한 경외와 감사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뵌 게 태평로에 있던 조선호텔 정문 앞에서였다. 초겨울이었다. 가던 길을 멈추었다. 안익태 선생이 계셨다. 얼른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선생은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며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했다. 한참이나 손을 잡으며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크지 않은 여윈 듯 한 체구에 내민 조그마한 따뜻한 손이 힘찼던 생각만이 난다. 안익태 선생과는 세 번 뵈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하다. ‘쪽발이’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기도 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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