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된 후 남한 전 지역에서 일할 간부들 남조선출신들로 배치?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16] 주기적으로 공부…통신대학 3년 마치면 ‘임명장’ 수여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3/12 [21:28]

통일 된 후 남한 전 지역에서 일할 간부들 남조선출신들로 배치?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16] 주기적으로 공부…통신대학 3년 마치면 ‘임명장’ 수여

통일신문 | 입력 : 2021/03/12 [21:28]

▲ 북한 주민들의 모습(사진|송광호)


K의 남편은 유망 전도한 북한예술단 간부였다. K자신은 서울출신으로 북에선 고아신세나 다름없었다. 늘 남편에 의지해 살았다. 그러다 자신의 남반부출신이라는 이유하나로 결국 집안전체가 지방전출명령을 받았으니 너무 실망이 컸다. 남편만이 희망이요, 생활전부였는데 야속하고 저주스러웠다. 이제 겨우 식구들이 한데 모여 재미있게 살겠다싶었는데, 후보당원이 된 기쁨도 잠깐이고 또 다른 시련이 닥친 것이다.

 

함남 신포로 내려온 K는 배정된 근무처에서 열심히 일했다. 여자중학교 무용교사로 근무했다. 학교는 시내 한끝에서 다른 한끝까지 두 번 버스를 갈아타야했다. 춘하추동 그러한 번거로움도 마다않고 오직 학생들 무용지도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후보당원을 벗어나 속히 정당원이 되기를 기대했다. 당원심사는 보통 1년에 한번 심사를 한다. 그런데 2년이 넘어도 K관련해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소심한 성격의 K는 당 조직에 물어볼 용기도 못 갖고 시간만 지났다.

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원(교사)의 정당원 심사자리에서 그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설움 속에 오열했다. 학교 당 세포는 깜짝 놀라 왜 그런가 물었다. K는 울면서 “나는 왜 후보당원에만 머물러 있고, 정당원 심의자격도 안 됩니까?”항의했다. “아니, 무용선생이 아직 정당원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요?” 놀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세포당원들이었다. 그들은 진작 K가 정당원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재미동포도서기증대표단(사진 |송광호)


어느 땐가 당에서 남조선 출신 당원들을

‘공산대학’에 입학시켜…일하면서 공부하는

제도를 ‘통신대학’이라 불러 대학3년 마치자

‘임명장’을 받았다

 

다음날 시 당 조직부에 알아보니. K가 평양에서 지방으로 내려올 때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시 당 조직부 지도원이 “그 동무를 당원명부에서 제명해 버리시오.”라고 지시한 것이 드러났다. 학교 당세포비서(책임자)는 “학교에서 아주 성실하다고 인정받는 교원인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하고 따졌다 한다. 그때 마침 특별절차로 급히 입당해야 할 사람들이 있어, 그 속에 끼어 아무런 조건 없이 입당이 비준됐다. 이번엔 어이없이 너무 쉽게 당원이 된 것이다.

K는 내게 “당원이 되기 위해 20여년 세월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몰라요. 마침내 당원이 됐는데도 전혀 기쁘지도 않고, 허무한 생각만 들었습니다.”하고 토로했다.

어느 땐가 당에서는 남조선 출신 당원들을 모아 ‘공산대학’에 입학시켜 뭔가를 배우게 했다. 한 달에 며칠씩 공부했다. 일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공부하는 제도를 ‘통신대학’이라 불렀다. 대학3년을 마치자 ‘임명장’을 받았다. 이 임명장은 ‘통일이 된 후 남조선 전 지역에서 일할 간부들을 남조선출신들로 배치, 준비시킨다.’는 것이다.

임명되고 나서 강습일정에 따라 1년에 한번 씩 모여 김일성노작 학습을 해야 했고, 학습총화에 참가해야했다. 그런 식으로 남조선 출신들을 장악 통제했다. “우리들은 학습이 힘에 벅차 무리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아무도 싫은 소리 한번 못했어요.” 당시 간부라도 찍히게 되면 탄광이나, 광산지역으로 보내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K는 처음엔 임명장 자체를 대단한 구세주로 생각했다. 허지만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여전히 남조선출신이라는 성분이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든 그 사회에서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다. K의 남조선성분으로는 자식들이 당이나 사법검찰, 안전 보위부기관 등에서 근무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직군의 사람과 가정을 이룰 수도 없었다. 행여나 결혼을 했다고 해도 배우자는 직업을 버려야했다. 그러니 누가 자신직업까지 잃으면서 혼인하려 하겠는가. 결국 K는 임명간부는 되었지만 남조선출신 낙인이 찍힌 ‘종이장’ 간부에 불과했다.

 

▲ 북한 연회장(사진 |송광호)


임명장은 ‘통일 후 남조선 전 지역에서 일할

간부들 남조선출신들로 배치, 준비시킨다’는 것

임명 후 강습일정에 따라 1년에 한번 씩 모여

김일성노작 학습 등 학습총화에 참가해야

그런 식으로 남조선 출신들을 장악 통제했다

 

한 예로, 토론토에서 만났던 이영옥 여성탈북자(63년생)경우가 떠오른다. 그녀 어머니 김순자(42년생)는 고향이 강원도 원주로 월북자였다. 4남매 장녀인 김씨는 원주에서 고교졸업 후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하필이면 북한 고정간첩으로, 당시(1961년 전후) 남북한을 넘나들던 동갑내기 이우철(군관)이었다. 둘은 북으로 올라가 주위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외동딸 이영옥을 낳았다. 남편은 남조선여성과 혼인했다하여 곧 간부인 군관 직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남편의 인생길이 달라졌다. 다른 직업을 구해 처음엔 원산 명석동에 살다가 당국 명령으로 함북 온성과 청진 등지에 옮겨 살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딸 이영옥이 성장해 청진 사범대를 나왔다. 수학교사로 일하던 중 부모가 사망하고 남편마저 탄광에서 사고사를 당하자, 극심한 생활고를 못 이겨 죽기 살기로 탈북 해 한국으로 온 것이다. 그때 외아들은 동네에서 영재로 소문나 당국에서 일찍 어린애를 평양으로 데려 갔다. 북한당국에서는 전국에서 영재로 판명될 경우 당원, 비당원을 막론하고 국가보호조치로 평양에서 따로 특별영재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부모와는 격리돼 방학기간을 이용해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기회를 준다. 나중 청진에서 합류한 아들을 설득시켜 엄마먼저 탈북 한 것이다.

어쨌든 한국행 탈출에 성공했고, 두 번째 토론토 난민신청도 통과돼 아들의 탈북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아들문제는 탈북브로커를 통해 철저히 준비를 해 놓아 걱정을 않는다고 자신했다. 다만 토론토에서 첫 난민신청 때 신청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사실을 모르고, 어느 한인이민업자에게 속아 3천 달러 비용 쓴 걸 못내 아쉬워했다.

며칠지난 새벽4시경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녀는 울면서 아들이 중국 길림성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혔다고 흐느꼈다. 1주일 내로 ‘7백만 원’을 지불 안하면 북한관리에게 넘긴다는 위협전화였다. 중국에서 조선족통역을 통해 토론토까지 연락이 온 것이다.

그날 만나 상세한 설명을 들으니 탈북관련 해 브로커세계에선 그들이 정해놓은 절대가격이 있었다. 단 일전 에누리 없는 액수라고 한다. 질 안 좋은 중국공안들에겐 샘솟듯 솟아나는 탈북자들이 아주 좋은 먹이꺼리였다. 당국 모르게 몰래 개인목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조선족(통역)까지 대동해 중국변경에서 숨어있는 탈북자발견에 기를 쓰고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이때 요행히 한 건 걸려들면 먼저 탈북 뿌리연고부터 캐고, 후원자 연락처를 밝혀내 돈을 요구한다. 중국은 북한의 참혹한 실상 그대로를 자국에 보도 않는 경향이 있다. 같은 형제 공산국가로 편든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간혹 곤경에 빠진 탈북자를 마주해도 많은 중국인들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왜 여기(중국)에서 고생하느냐”고 답답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사진 |송광호)


북한당국은 전국에서 영재로 판명될 경우

당원, 비당원 막론 국가보호조치로 평양서

따로 특별영재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이영옥의 한국귀국을 위해 급히 토론토이민국 네 군데를 돌았다. 캐나다정부에 맡겨놓은 (난민신청 절차상)그녀여권을 되찾아야했다. 여권을 돌려받는데 최소1주일이상 걸린다고 한다. 이민국 책임자에게 자초지종 급한 상황임을 설명하자 곧 URGENT(긴급)라는 빨간 직인을 찍어줘 2일로 단축됐다. 이때 한 가지 놀란 것은 네 군데 이민(난민)국을 들를 때마다 매 장소에 한국인 난민신청자를 만났다는 점이다.

이들은 변호사나 이민업체 사람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살기 좋아진 한국에서 왜 보트 피플이나 전쟁국 피난민과 같은 난민신청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 대기실 한인전부가 탈북자인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람직한 풍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약10년 전이다. 한 병원검사실에서 대기 중이던 동유럽(체코) 이민자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원래 고향이 어딘가?” “한국.” “남쪽? 북쪽?” “물론 남쪽이지, 북쪽에선 외국으로 절대 못 나온다.” “그래? 남쪽은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인데 어떻게 캐나다로 왔느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아. 어느덧 한국에 대한 바깥 위상이 이렇게 높아져 있구나.’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 도배방지 이미지

4월의 만경대…꽃 경치를 펼친다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