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장마당에 의지하여 살았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17] “김일성이 죽었을 때 나는 3일간 눈물을 쏟았다”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3/24 [22:31]

고난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장마당에 의지하여 살았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 17] “김일성이 죽었을 때 나는 3일간 눈물을 쏟았다”

통일신문 | 입력 : 2021/03/24 [22:31]

 



1992년 말부터는 북한식량난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엔 배급이 끊기면서 차츰 주민들 고통이 드러났다. 지방에서 한 명씩 아사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리던 때다. 그즈음 생각지도 못했던 바로 아래 여동생(3째) 강원숙 편지(미국거주)를 전해 받은 것이다. 북에 개인통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기적 같은 일이였다. 반세기도 지난 때였다.

 

자신이 사는 땅에서 멀리서 찾아온 형제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졌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동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K는 이후 “동생과 그간의 가족사진들과 소식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그러잖아도 생계가 곤란한 시기였고, 마침 12월24일이었다. 북 식구들에겐 엄청난 성탄선물이었다. 수십 년만의 동생소식과 동생의 경제적 도움은 천군만마 힘이 됐다.

“그때부터 캐나다은행 송금을 통해 외화를 조금씩 전해 받았어요. 그나마 94년 김일성 사망 후엔 은행체계가 엉망이 돼 송금이 두절됐지요. 그런 찰나 96년 평양에서 세계프로레슬링 경기대회가 열린다고 동생이 평양으로 온다고 했어요. 매일 어린애같이 손꼽아 날짜를 기다렸지요.” 그때 당 조직에서도 “맘 놓고 기다려라. 만날 수 있게 조치를 하겠다.”도 약속했다.

그러나 경기 일정이 끝났어도 통 소식이 없었다. 하루는 편지와 전보를 동시에 받았다. 북한 당국에서 개인만남을 용납 안 해줘 할 수없이 짐만 부치고 그대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눈물범벅이 된 편지였다. 북한당국은 “반공불순분자의 소요를 피하기 위한 대책”이었다고 이유를 댔다. 이때는 고난의 행군이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K는 자신이 사는 땅에서도 멀리서 찾아온 형제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졌다.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더구나 동생이 금강산관광을 할 때 안내원이 “가족주소를 알면 현금을 전해주겠다 해서 믿고 부탁했다”고 알렸는데, 그 돈도 감감무소식이 됐다. 그때의 답답한 심정과 절망감은 하늘 만이 알 것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훗날 K는 탈북 해 두만강을 건널 때다. 품속에 늘 지녔던 조그만 수첩하나를 거센 얼음물 속으로 던져버렸다, 남한출신으로 북한에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갈구했던 ‘조선노동당증’이었다. 한낱 휴지보다도 못한 이 종이에 평생을 걸고 살아온 지난날의 삶이 허무하기만 했다. 중국연길에서 K를 기다리는 미국 여동생과 반세기도 지나 만났다.

오랜 세월은 지났지만 친자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얼싸안고 통곡했다. K는 서울에 온 후에도 함께 고생하던 북녘의 남조선출신들이 눈에 선했다. 선량했던 그들은 북녘 땅에 갇혀 영영 묻힐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상의 굶주림을 피해 21년 간 교사직을

내던지고 큰 도시인 청진으로 이사했다

순전히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K의 둘째딸 이미화(61세) 인터뷰 글을 잇는다. 그녀 얘기는 1인칭 “나”로 표기하겠다.

나는 평양 서성구역 감북동에서 인민학교(초등교) 4년까지 살다가 가족들과 지방으로 내려왔다. 어릴 때는 기계체조와 피겨스케이팅을 잘했다. 아버지는 조선 인민군 협주단장이었다. 협주단이란 무용, 연극, 화술, 노래, 춤, 합창, 관현악 등 종합예술단이다. 60년대에는 북한에 기쁨조가 없었고, 그냥 경음악이라 불렀다. 왕재산 경음악단 이전이다.

이후 함남 신포시 남포리에서 오래 살았다. 함흥 제1교원대학을 나와 신포에서 초등교사생활을 했다. 20세부터 40이 넘도록 가르쳤다. 고난의 행군시기엔 사람 죽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굶어죽는 경우 피부와 혈색이 까맣게 변한다. 자고 깨면 앞, 뒷집에서 사망자소식과 매일매일 거리와 역전 등지에서는 죽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와 노인들이 많이 죽어 헌 마대에 싸서 소달구지로 실어내 갔다.

한번은 강냉이를 사러 처음으로 평북 염주군 까지 기차로 다녀오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시작이었다. 일상의 굶주림을 피해 만21년 간 교사직을 내던지고 1998년 큰 도시인 청진으로 이사했다. 순전히 장사를 위해서였다. 그때 미국 이모가 보내준 돈이 큰 도움이 됐다. 당국에선 주민이주를 막지 못했다. 청진아파트에도 사람들이 많이 죽어, 아파트에 빈 집이 많았다. 이 때문에 비교적 큰 아파트를 차지해 살았다.

청진에서 첫 장사는 생선장사로 시작했다. 명태 등을 한 바케스(물통)를 사다 팔았다. 그때는 수산물단속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장마당이 형성되고 있었다. 장마당은 주로 공장 옆 부지나 둑, 강변 등지에서 세워졌다. 장사꾼들은 땅바닥에 비닐이나 헝겊, 마대 등을 깔고 앉아 옷, 신발 등 생필품을 팔았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속에서 각처의 장사꾼들이 모여들었다. 일종의 도매상 역할도 했다. 단속이 무척 심했다. 인민위원회나 안전부 등 단속반을 피해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한 여성은 단속반에게 자신보따리를 전부 뺏기자 까무러치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때 단속반이 닥치면 “폭풍이다”하고 소리치고, 혼비백산해 도망치던 생각이 난다.

단속반에 대해 김정일은 “장마당을 완전

통제하지 말고,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집

가족은 허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장마당 규모는 점점 커졌다. 2000년도 들어와서는 더욱 활성화됐다. 김정일은 장마당 관련해 “와! 국가경제가 죽었는데도, 우리 인민들이 이렇게 살아났네. 정말 우리 인민들 대단합네다”고 했다고 소문이 났다.

단속반에 대해 김정일은 “장마당을 완전 통제하지 말고,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집 가족은 허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했다. 또 자릿세도 거두었다. 사실 그때는 고난의 행군으로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난 뒤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다 장마당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생존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다만 내 주변 누구든 김정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전부 안 좋은 감정을 지녔다. 장마당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평소 들을 수 없는 말도 들렸다. 누가 뒤에서 대화 중에 “김정일이 죽어야 통일이 된다”고 해서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나 같은 평범한 여자였다.

김정일에 대해 주민들 사이 여러 소문들이 많았다. ‘여자가 많고, 60%이상짜리 독주를 좋아하며, 성미가 급하고, 말을 좀 더듬고, 색깔은 붉은 색과 녹색을 좋아한다.’는 등등이다. 그는 김일성과는 딴판이었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나는 3일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상이 금방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북조선에서 정치사상적 수양을 쌓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정치선전의 제1선인 교육부문에서 20년 이상 근무했기 때문이다. 허지만 생각하면 오랜 세월을 1인 수령체제에 세뇌 당해 속아 살았던, 지난 과거가 부끄럽기만 하다.

당시 북한의 대표적 전국 장마당으로는 청진, 평성, 신의주, 함흥 등 네 장소를 꼽았다. 나는 상품판매에 손댔다가 곧 월병 같은 식품을 만들어 팔았다. 식품장사로 조금 재미를 봤다. 2004년에 “여자는 거리에선 바지를 입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김정일이 차를 타고가다 창밖으로 자전거에 짐을 잔뜩 실은 바지 입은 여성주민을 봤는데, “저렇게 볼 성 사납게 다니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해서 정한 방침이다.

이 때문에 장마당 장사꾼들 생활에는 이중고역을 치러야했다. 장마당 여성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그 위에 너풀거리는 치마를 걸치고 짐차를 끌거나, 장사할 때는 치마를 벗고 바짓가랑이를 내려 일을 봐야했기 때문이다.

장마당 장사는 경쟁 속에 잘 되지 않았다. 북녘사회엔 환멸만 남았다. 나는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과 상의 끝에 탈북을 결심했다. 샌프란시스코 이모후원이 절대적이었다. 우리가족은 한두 명씩 두만강을 건너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입성했다. 만남과정도 긴 여정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내게 두만강은 ‘도망강’에서 ‘도와준 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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