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들 과거에 자신 묶어두지 말고 희망 갖고 살면 언젠가 꿈 이룰 것”

[인터뷰] 이경희 제20대 김기천 대통령예비후보 선거사무장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9/05 [18:56]

“탈북민들 과거에 자신 묶어두지 말고 희망 갖고 살면 언젠가 꿈 이룰 것”

[인터뷰] 이경희 제20대 김기천 대통령예비후보 선거사무장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1/09/05 [18:56]

 


북한은 수령(대통령) 선거가 전혀 없다. 1948년 9월에 출범한 북한정권은 김일성을 초대 수령으로 시작해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의 아들(김정일)과 손자(김정은)가 대를 이어 수령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에 유례가 없다. 

 

전체 인민의 눈을 가리고, 입과 귀를 막아놓고 노동당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도록 명령하며 만약 이에 불복하면 누구든 처형하는 독재체제이다. 이런 독재사회에서 살던 탈북민들이 남한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대통령선거이다. 정당의 공식후보는 물론이고 국민이면 누구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달나라의 이야기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서울 금천구에서 이색적인 활동을 하는 탈북여성 이경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대통령예비후보 선거사무장이던데.

지난 7월 12일, 모시는 후보님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예비후보 등록을 마침과 동시에 선거사무소를 오픈했다. 선거사무장 공채에 많은 희망자가 신청을 했고 엄격한 심사 끝에 인사가 진행됐다. 모두 쟁쟁한 학·경력을 가진 남한 분들이다. 내가 알기로 탈북민이 남한의 각종 선거에서 선거사무장을 맡은 사례는 전혀 없는 걸로 안다.

 

- 김기천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의료기기 제조기업 ‘닥터킴’ 대표이다. 항공대 기계공학과를 전공한 엔지니어, 의학대학을 졸업한 의사, 동시에 기업경영인이다. 2006년에 설립된 ‘닥터킴(Dr-Kim)’은 미국과 중국 등 세계 50여 개국에 의료용 헤드라이트와 루뻬, 카메라 등을 수출한다.

경기도 광명시에 소재한 ‘닥터김’은 대표적인 의료기기 전문제조기업이다. 매출 80% 이상이 수출이며 국내 및 해외 의료기기 제조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강소기업이다. 내가 보는 김기천 후보님은  다정다감하며 훌륭한 분이시다.

 

- 후보의 공약 중 눈에 띄는 것은. 

탈북민의 시선으로 보면 통일안보 공약이다. 후보님은 남북통일과 안보문제에 남다른 견해와 의지를 지닌 분이다. 한국이 강대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남북 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라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북한의 핵전략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책도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소신과 결의가 확고하다.

 

선거사무장 공채에 많은 희망자가 신청 

쟁쟁한 학·경력 가진 남한 분들...탈북민이 

남한의 선거사무장 맡은 사례는 전혀 없어

 

- 사무장의 활동은 어떤 것인가.

후보의 일정을 포함해서 공식 선거활동 기간 선거사무소 안의 모든 일을 총괄한다. 현재 선거사무소 직원은 6명이고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0명까지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소통, 정책공약, 선거운동, SNS홍보, 우편물, 홍보유세 준비 등 할 일이 너마나 많다. 정책공약과 후보 홍보 등 처음 가는 길이라 창의적으로 일한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75년 5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3녀 1남의 형제로 태어났다. 부친은 청진 소재 병원 부기원(회계사), 모친은 인민반장(남한의 통장)이었다. 인민학교 4학년 때 청진외국어학원 입학시험을 2회 봤으나 연속 탈락했다. 친구(부친이 ‘리당비서’)가 쉽게 입학한 것을 보고 내 처지를 이해했다. 유년시절 아버지한데 노어(러시아어), 한문 과외를 받았다. 외교관이 되고 싶어 평양외국어대학 러시아과 입학을 1,2,3지망으로 선택하였으나 한 갓 꿈으로 그치고 말았다. 

고등학교는 1991년 8월에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X군단 군의관학교에 입학하여 간호학을 전공하였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군단00병원에서 장병들을 치료하면서 뿌듯했고 사랑도 듬뿍 받으면서 인정받고 참 행복하고 의미 있는 간호사생활을 하였다.

 

- 근무했던 병원 실태가 궁금하다.

군단 병원이기에 사회의 도(道) 종합병원 급이라고 보면 된다. 원장, 군의관, 간호사, 사무원 및 노무자 등 직원이 200명 정도다. 외과, 내과, 이비인후과, 결핵과, 안과 등은 물론이고 수술실과 산부인과도 있다. 산부인과는 여군들이 생리, 자궁질병 등으로 이용한다. 전체 환자의 10%가 여성이며 또 전체의 10% 정도가 군관(장교) 환자들이다.

 

75년 함북 청진서 출생...아버지께 노어·한문 배워

외교관이 되고 싶어 평양외국어대학 러시아과 입학

1,2,3지망으로 선택하였으나 한 갓 꿈으로 끝나버려

 

조선인민군 X군단 군의관학교에 입학 간호학 전공

군단병원서 장병들 치료하며 의미 있는 간호사생활

원장, 군의관, 간호사, 사무원  등 직원이 200여명 

외과, 내과, 안과  등  수술실과 산부인과도 있어

 

- 환자들이 많이 앓는 병은 뭔가?

전체 환자의 40%가 결핵환자이다. 많은 군인들이 제대로 음식을 못 먹으며 고된 건설노동에 동원된다. 영양부족으로 현장서 쓰러지는 사병도 있는데 군관들은 ‘꾀병’이라며 방치한다. 5~6개월간 치료를 받으면 90%는 완치한다. 5%는 중병으로 넘어가고 5%는 사망한다. 사망자는 전사자로 대우해 병원뒷산에 묻고 조총까지 쏘며 장례를 해준다.

약이나 식사 수준은  페니실린, 마이싱, 두보찡(복합항생제) 등 군인병원은 다른 사회병원과는 달리 약과 식사가 양호한 편이다. 특히 국산약품은 효과가 뛰어나서 군인들에게 치료효과가 크다. 결핵환자들의 식사는 그런대로 좋았다. 일일 백미 800그램에 반찬은 5~6가지이었으며 두부, 비지 등 콩 음식을 위주로 육류와 물고기(생선)도 일주일에 한 번씩 공급되었다.

 

- 가족에 어떤 일이 생겼나?

부모님은 도심생활이 불편하여 교외 단독주택으로 이사 갔는데 재산을 전부 도둑맞았다. 1997년부터 아사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사방이 뻥 뚫린 집이 목표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생각을 못하신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가족부양을 위해 불법이지만 기업소의 소를 거래하고 마진을 챙기려고 했으나 구입한 송아지가 도둑물품으로 문제가 되었다. 조사 중 억울하고 부당함을 주장한 아버지를 당국은 순종하지 않는다고 3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 그래서 어떻게 하였나.

나는 23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살리려고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으나 쉽지 않았다. 숨이 안 쉬어져 길가에 여러 번 쓰러지고 사람들이 손발을 주물러줘 정신을 차리곤 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구명에 쓰라고 4천원을 애써 만들어드렸는데 안전원(경찰)은 그 돈을 받아먹고 아버지는 형벌을 받았다. 배가 고프니 국가권력이 사기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어머니는 기근에 허덕이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어머니가 입고 계셨던 옷과 가방을 빵과 바꿔먹었다는 안전부 사건조사 담당자의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이 다 안 나갔다. 늘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살던 나였지만 움츠러들고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다. 동정 받는 것도 자존심이 상해서 싫었고 그냥 매일 밤마다 간호사실에서 혼자 울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가족부양을 위해 기업소의 소를 

거래하고 마진을 챙기려고 했으나 구입한

송아지가 도둑물품으로 조사 중 억울하고 

부당함을 주장...당국은  3년 징역형 선

 

- 탈북 동기는 무엇인가.

다심한 큰언니가 동생들을 책임지려고 탈북을 결정했다. 내가 큰언니 집에 갔을 때는 이미 작은언니와 남동생이 중국으로 간 상태였다. 나는 안가겠다고 우겼지만 부모님이 안 계시고 형제가 한 명도 없는 고향에 남아야하는 것이 괴로웠다. 심장이 떨리도록 고민하다가 1998년 5월, 큰언니와 함께 3살짜리 조카를 안고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 중국에서는 어떻게 보냈는가. 

OO기와공장에서 7년간 일을 했다. 별지고 나갔다가 달을 이고 들어오면서 하루20시간 일했다. 중국 사람들이 기와를 하루에 30개 찍어내는데 나는 120개씩 찍어냈다. 고된 노동으로 나의 몸을 혹사하며 가족을 찾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이런 나를 중국 사람들은 현장에서 기와를 도둑질하려 했다는 등 온갖 음해로 괴롭혔다. 비아냥거리는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국적이 없는 나의 약점을 이용해 공안에 신고해서 북송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 고통은 말로 다 못한다. 

 

- 정신적 고뇌를 많이 하였겠다.

자문했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왜 이런 모습일까.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20대 나이가 너무 억울했고 꼭 돈을 벌어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나라 없는 설움을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백성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어린 나이에 뼈저리게 체험했다. 국력이 국민의 자존심임을 나는 타향살이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20대 나이가 너무 억울했고

돈을 벌어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자신을 채찍질

중국 와서 노동...나라 없는 설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백성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어린 나이에 

뼈저리게 체험...국력이 국민의 자존심임을  알게 돼

 

부모님이 안 계시고 형제도 없는 고향...고민하다

98년 큰언니, 3살짜리 조카와 두만강에 뛰어들어

 

- 남한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작했나. 

북한에서 이루지 못했던 외국어대학교 입학을 하고 싶어서 한국에 오자마자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낮에는 컴퓨터학원을 다니고 밤에는 2시까지 식당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입학준비를 하였다. 1년이 지난 200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과에 입학했고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자습할 수도 있는 과목이니 복수전공으로 중국어를 선택했다.

상세히 설명하면 대학교 졸업조건이 대한상공회의소 FLEX(전공별)시험을 합격해야 하는 것이었다.겁도 없이 어려운 언어 2개나 선택했으니 졸업이 어려웠다. 시험을 통과 못하면 대학교 수료증이 나오고 졸업증은 주지 않으니 대학생들이 시험을 폐지하라고 운동도 했지만 나는 그냥 묵묵히 졸업준비를 했다. 결국 1과목을 통과 못하는 대학생들이 6년씩 다니는 학교를 4년 만에 2과목을 통과하고 졸업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내가 대단했다고 자부한다. 

 

- 탈북민으로 모스크바 유학이 특이하다.

나는 성격이 한 번 결심한 일이 있으면 해볼 때까지 안하면 포기가 안 되는 스타일인 듯하다. 어릴 때 러시아에 공부하러 가고 싶었던 꿈이 있었기에 꼭 모스크바에 가보고 싶었고 유일한 청약저축통장을 깨면서 러시아에 공부하러 갔다.

베이징 연수도 다녀왔다. 유년시절 한문을 싫어했던 나에게 아버지는 “아시아권에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중국어를 알아야 하고 한문을 모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독서를 인생의 낙으로 알고 새로운 것을 알았을 때의 희열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로부터 늘 들으며 성장했다. 

어쩌면 중국어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무의식중에 아버지의 말씀을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공자도 배우리라 마음먹고 북경외국어대학에 단기연수를 다녀오면서 중국에 대한 공부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한국에 오자 공부하기로 결심...낮에는 컴퓨터학원

밤에는 2시까지 식당아르바이트 하면서 입학준비 

1년이 지난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과에 입학했고

자습할 수도 있는 과목 복수전공으로 중국어 선택

 

졸업 후 대학교 출강하고 지자체와 한국국제교류재단 등

기관강의와 함께 5년간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조건 없이 지원해준 출석교회 유관영 담임목사님께 감사

 

-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시 남동구청에서 근무하다가 이후 정부서울청사에 올라가서 근무했다. 공무행정직에서 일을 해보니 적성이 안 맞았고 다소 자유로움 속에서 나만의 뭔가를 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하여 프리랜서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대학교에 출강하고 지자체와 한국국제교류재단 등 기관강의와 함께 5년간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

 

- 고마운 분은 누구인가.

참으로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대학교시절부터 나를 친자식처럼 챙겨주고 애제자처럼 지도해준 문규석 교수님이시다. 또한 남한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신 출석교회 유관영 담임목사님이 계신다. 내가 사회생활에서 힘들 때 아무 조건도 없이 지원해주시고 부모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편안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들이다.

 

- 후배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탈북민들이 이 땅에 빈손으로 와서 맨땅에 해당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고 정직하게 묵묵히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 늘 불행하다고 과거에 자신을 묶어두지 말고 꿈을 갖고 하루하루 살다보면 언젠가는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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