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김련희 평양 송환 희망 11년… “혈육과 함께 있겠다”는 일편단심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

송광호 특파원 | 기사입력 2021/12/02 [02:50]

탈북민 김련희 평양 송환 희망 11년… “혈육과 함께 있겠다”는 일편단심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 땅

송광호 특파원 | 입력 : 2021/12/02 [02:50]

 



지난 10월 하순 한국방문 시 다큐멘터리 (탈북민) 영화 ‘그림자 꽃’ 시사회에 초대됐다. 그때 다큐 주인공 김련희 (52세)씨를 극장현장에서 만났다. 나는 다른 사람이 그녀 배역으로 출연한 줄로 착각했다. 김 씨 모습이 영화 속 인물과 너무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안경을 쓰고 있고, 몸도 꽤 수척해 보였다. 김씨는 2011년 9월 한국에 왔다. 입국한지 어느덧 만10년이 지났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녀는 탈북민이라 할 수 없다. 잘못 입국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고교졸업 후 평양 양복공장에서

근무…북한에선 공장노동자라 해서

의사보다 봉급이 더 적은 게 아니다

 

1969년생 김련희는 어릴 때부터 만성간염이란 지병이 있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성인이 됐어도 이 질병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고교졸업 후는 평양 양복공장에서 근무했다. 직장에서도 발병으로 인해 6개월간 평양 병원에 입원했었다. 간에 복수가 자주 찼다.

그녀는 학창시절 그다지 머리가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원래 희망은 어머니처럼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꿈을 접어야했다. 고교 때 성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양복점 공장기술자다.

 

북한에선 공장노동자라 해서 의사보다 봉급이 적은 게 아니다. “남편이 의사인데, 제가 월급이 더 많아요. 북한에선 의사라고 돈을 더 버는 직업이 아니에요. 그냥 같은 공무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녀 말이 맞다. 공산세계는 직업구분에 국가봉급차이가 별로 없다. 이 사실은 예전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나를 돕던 통역도우미가 러시아 의사였기에 공산사회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나는 김련희 씨를 서울에서 두 번 만났다. 극장 시사회 조우까지 세 번째다. 그녀는 수더분한 평양아줌마에 불과했다. 한국정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직장(김책 공업종합대학 양복점) 가정주부를 어떻게 간첩으로 단정했는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그녀는 중국 땅에서 브로커 꼬임에 잘못 들어온 경우였다. 김련희 자신의 판단미스로 발생한 사고였다.

 

 



한국입국 시부터 평양으로 돌아가겠다 요구

한국에 들어 와 그녀는 평양귀환을 위해

나름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혈육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픈 몸부림이었다

 

김련희는 한국입국 시부터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했다. 그녀의 북한송환 요구는 정치성을 띤 게 아니었다. 한국이 싫고, 북한이 좋아서가 아니다. 평양가족과 안 떨어지겠다는 게 단하나 이유다. 평양에 생존해 있는 부모님과 남편, 외동딸이 사무치게 그립다. 혈육과 함께 있겠다는 일편단심이 그녀에게 전부다.

한국기관에서 송환의사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국가 제도적 규정 등으로 쉽게 가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런 아줌마를 10년 이상 붙잡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녀는 늘 해외출금조치 상태에 있다. 언제까지 그녀를 남한 땅에 억류시킬 것인가. 새나 짐승도 모성애는 뼈저리게 눈물겹다. 미물이라도 가족보호에 온 목숨을 건다.

 

한국에 들어 와 그녀는 평양귀환을 위해 나름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로지 혈육이 있는 고향으로 가고픈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해악을 끼친 일도 없다. 그런데도 입국 후 5년간 김씨는 ‘신원 특이자’로서 한국여권발급이 안됐다. 이 때문에 밀항을 꿈꾸고 위조여권을 알아보고, 자진 간첩(셀프간첩)신고까지 했다.

어쨌든 김련희는 간첩으로 판정 나 감옥(교도소)생활을 했다. 국선 변호사덕에 2심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북녘가족에 가고픈 고의적 일탈이 그렇게 큰 잘못이고, 범죄행위인가. 그녀가 줄곧 되뇌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 가족에게 달려 갈 것이에요.” 그녀에겐 핏줄이 확실히 이념보다 강했다.

 

조선족에겐 탈북관련 일이 전문직업 돼

브로커들 시간 흐름에 따라 양상 달라져

탈북자들 한국행 안내에 조선족만 아니라

한국여권을 지닌 탈북자까지 끼어들기도

 

김련희 씨를 한국으로 유혹한 브로커(조선족)를 한번 살펴보자. 탈북브로커는 북한 고난의 행군 시 중국에서 처음 생겼다. 그들은 1990년대 말까지 굶주림 때문에 중국 땅에 건너 온 북한여성들을 ‘인신매매’하는데 일조 했다. 조선족은 통역 역할로 중국공안 등과 팀을 이루었다. 당시 나이, 신체 조건에 따라 중국 2만 위안 (약 4백만원)이었다. 일부 조선족에겐 이런 탈북관련 일이 그때부터 전문직업이 됐다.

그 후 브로커들은 시간 흐름에 따라 양상이 달라졌다. 탈북자들의 한국행 안내에는 조선족만 아니라 한국여권을 지닌 탈북자까지 끼어들었다. 이들은 인도적 측면에서 탈북자를 한국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엄연한 ‘돈벌이’ 직업이다. 그나마 목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브로커는 탈북민 한 명당 탈북민이 제공받는 총 6백만원 정착금중 250만원을 받는다. 정부는 탈북민에게 처음 3백은 일시에 주고, 나머지 3백은 3개월마다 1백만 원씩 통장에 넣어준다고 한다. 9개월이 돼야 전액 6백이 끝나는 셈이다. (탈북민은 첫 3백만원 수령 시 250만을 브로커에게 떼어준다.)

김련희 씨는 “브로커는 중국내에선 조선족이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큰손은 한국 내 기독교인들과 탈북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또 탈북자 경우를 3가지로 분류했다. 생계곤란 해 북한을 이탈한 주민과 각종 범죄자, 브로커에게 속임을 당해 남쪽에 온 경우 등 셋이다. 특히 탈북자 가운데에는 의외로 범죄자들이 많다. 토론토 동포이민사회 내에 발생했던 2번의 대형 범죄사건도 남녀 탈북자가 각각 일으킨 사기범죄였다.

 

처음 김련희는 자포자기 끝에 두 번 극단선택을 시도했다. 다량의 수면제 복용과 두 번째는 손목 동맥을 끊었다. 두 번 다 의식불명상태에서 발견돼 목숨을 구했다. 탈북민 김련희 스토리는 입국 4년 뒤 지난 2015년부터 국내외 언론보도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밝혀졌다. 해외에서도 미 CNN, 뉴욕 타임스, 독일 등 김련희 사연을 보도했다. 그때 인권문제가 거론됐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 환기에 그칠 뿐 해결책이 간단치 않다.

 

남한 땅 밟은 어수룩한 평양아줌마가

대한민국에서 북한강연 전문가로 변신

한국에 3만 여명 정도 탈북민들 있지만

함경도 등 지방에만 살던 주민들이 많아

 

김씨는 평양에서 병이 회복되자 모처럼 북한당국 허가를 받고, 2011년 5월 중국 큰 삼촌 집에 휴가를 계획한다. 북한여권을 만들어 생애 처음 해외여행이라 들뜬 마음이었다. 평양에서 기차로 신의주를 거쳐 단동에 갔다. 산동성에 사는 친척과는 겨우 연락이 닿았다. (북한-중국 간 우편배달이 보통 20일-1달, 왕복우편이면 2달 걸린다함.)

문제는 중국 친척집 체류 한 달 후 그녀 간이 다시 나빠진 것이다. 중국에선 외국인 병원비가 비싸다. 북한공민이니까. 친척집을 나와 중국 심양식당에서 치료비를 벌려고 했다. 그때 탈북브로커(조선족)를 만나 귀담아 들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브로커는 “한국에 가면 두 달 만에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여기서 무슨 돈을 벌 수 있느냐. 한국에 가서 돈 만들어 곧 북으로 되돌아가면 된다.”는 말을 믿었다. 그때 브로커에게 쉽게 자신의 여권을 내준 것이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곧 실수를 깨닫고 여권회수를 원했으나, 브로커는 “이미 내 손에 여권이 없고 다른 데로 갔다”고 돌려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그해 9월 결국 김 씨는 다른 탈북자 7명과 함께 한국에 닿자마자, 즉각 북한 송환을 요구했다. 한국정부는 갓 입국한 탈북자를 그대로 놓아줄 리가 없다. 그녀는 조사와 심문을 거듭 당하며 고통의 시간이 쌓여갔다. ‘보호관찰 대상자’로 찍혔다.

 

경북 경산에 거처가 마련됐다. 처음 경북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직장근무가 순탄치 않았다. 작업하는 중 경찰 등 정보기관에서 김련희를 찾고, 전화가 계속 오니 어느 직장에서 그녀를 좋아하겠는가.

우여곡절을 겪는 시간 속에서도 남쪽 친구들이 생겼다. 실상 그녀를 지탱케 해 준 것은 따뜻한 남쪽사람들이었다 한다. 언제인지 북한에 대해 궁금증을 지닌 시민단체와 아파트공동체 등지에서 그녀에게 평양강연초청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로나19가 발생 전까지 약5년 간 전국에서 강연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강연료는 한 번에 20-30만원. 그는 내게 “초청강연은 보통 하루에 2번, 밀려들 때는 한 달에 30번을 할 때도 있었어요.”라고 전했다.

 

남한 땅을 밟은 한 어수룩한 평양아줌마가 어느 날 하루 대한민국 북한강연 전문가로 변신한 것이다. 사실 한국에는 3만 여명 정도 탈북민들이 있지만, 거의 함경도 등 지방에만 살던 주민들이 전부다. 평양 구경 한 번도 못 한 탈북민이 대부분이다.

평양시민 김련희 씨 강연에 관심을 가진 남쪽주민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간 많은 탈북자들을 접해봤지만, 평양토박이 탈북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평양’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쏟았다. 평양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절로 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른 얘기부터 꺼냈다. 지난 1960년대 말 KAL (YS-11)기 납북사건이다. 그녀도 과거의 명백한 역사적 팩트를 알고 있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녀가 태어난 해인 1969년 12월, 간첩 조 모에 의해 자행된 ‘강릉에서 김포 행 항공기(KAL) 납북’사건이다. 당시 승객으로 가장한 간첩이 종사를 위협해 납북 KAL기를 함경남도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켰다.

 

그때 북측은 남쪽주민 50명중 나중 39명을 풀어주고, 11명은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다. 반세기도 더 지난 옛 사건이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일부 송환된 승객들이 가진 기자회견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북녘이 고향인 외할머니와 둘이서 생활해 누구보다 이산가족 슬픔을 이해한다. 해방 직후 태어난 나를 돌보러 38선을 넘은 외할머니는 평생 북녘 고향을 그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KAL 납북사건당시 항공기납치로만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죄 없는 남녘주민 11명은 영영 돌려보내지 않았는가.

당시 혈육의 정이 강제로 끊긴 남쪽가족들은 오늘날까지 한을 안고 피눈물을 쏟고 있다. 너무 잔인한 북측행위였다. 이것은 단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김련희 씨는 그러한 사건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 리가 없다. 내 말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송광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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