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중국공산당과 소련이 주고받은 전보 등 문건이다. 본문과 목차, 그리고 편저자 및 역자의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저자 션즈화(沈志華)는 서문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 독자에게 사회주의 진영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또 문서 원본을 내놓고 한국전쟁 정책 결정 과정을 우리나라 학자들과 진지하게 토론하기를 원했다.
번역자 김동길은 이 책의 특징으로 읽기 쉽게 번역했음과 한국전쟁의 발생부터 3년간 지속된 것까지 모두 중국공산당과 소련이라는 변수가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의 한국전쟁 개입에는 세 가지 국면이 있다. 첫째는 한국전쟁 기획과 발발 당시의 결정 국면이다. 둘째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국면이다. 셋째는 중공군이 38도선을 넘어 남하하는 것과 유엔의 휴전안을 거부하는 국면이다.
먼저 한국전쟁 발발 단계부터 보자. 학자들 사이에는 왜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1949년 내내 반대하다가 1950년 1월 30일에 갑자기 원조 의사를 전달했는지, 그리고 그것과 소련의 대 중국정책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저자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중소우호, 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이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대륙을 공산화했지만, 뤼순 해군기지는 소련의 수중에 있었다. 1945년 8월 14일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소련이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다롄(大连)지역을 소련이 관할하고 뤼순(旅顺)항은 소련의 군사기지로, 중국 장춘(长春, 동중국) 철도는 중소가 공동으로 점유, 경영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약 기간은 30년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정권 수립 후 장제스가 맺은 조약이 주권을 제한한다고 봐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이 순순히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이 합의한 것이 “일본이나 일본과 결탁한 다른 어느 나라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소 양국은 공동으로 뤼순구 해군기지를 사용하며, 소련군대와 군용물자를 실은 기차가 중국 장춘철도를 따라 자유롭게 왕복 수송할 수 있도록 했다.
즉, 다른 나라와의 전쟁 시 장제스가 소련과 맺은 조약 내용을 발효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만족한 스탈린은 이틀 후 북한에 무력 남침계획을 동의해 주었다. 그러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같은 해 3월 30일 소련을 방문, 스탈린의 한국전쟁 동의를 받아내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의 동의와 지지를 받아냈다.
다음은 유엔군과 국군의 38도선 돌파 및 북진 시,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 과정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파병 결정 과정이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중국공산당이 9월 중순 먼저 지원부대를 보낼 것을 제의하지만, 스탈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한군이 전멸하는 9월말이 되어서야 스탈린은 중공에 군대의 파병을 요구했다. 강경론자 마오쩌둥은 소련이 약속한 공군 출동과 보급 지원이 늦어졌음에도 중공군을 파견했다. 휴전이 지연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을 3년간 끌었던 이유에 대해 밝혔다.
서울이 중공군에게 넘어간 1951년 초 중국은 군사행동 중지에 관한 5개항을 가지고 스탈린과 협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시기상조라며, 당시 이기는 상황임을 들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스탈린의 의견을 들은 마오쩌둥은 1951년 1월 13일 중국의 5개항을 수용한 유엔의 정전협상안을 거부했고, 북한주재 펑더화이 사령관에게 38도선 남쪽으로 계속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리지웨이 사령관은 강했다.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서 중공군은 극심한 피해를 봤고, 전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38도선 이남으로 남진하지 않고 제때 정전하여 철수했더라면 없었을 병력손실과 군비지출이 그때 크게 발생했음을 시인했다. 또 중공군이 38도선을 넘어 남하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였으며, 유엔의 1951년 1월 휴전안을 거부한 것도 잘못이었다고 주장했다. PNAWorld 펴냄, 정가 72,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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