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이기려 시작한 격투기가 나를 만들었다

[인터뷰] 탈북 파이터(격투기 챔피언) 장정혁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4/12/03 [16:51]

분노를 이기려 시작한 격투기가 나를 만들었다

[인터뷰] 탈북 파이터(격투기 챔피언) 장정혁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4/12/03 [16:51]

34천 탈북민시대 전국에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탈북민들이 있다. 지난 7월 중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KBIZ홀 지하1층서 열린 남북한주민 사회통합사례 발표대회가 있었다. 이번 대회는 탈북민 50여명이 신청하여 최종 발표회에 7명이 올랐는데 여기서 눈길을 끈 참가자가 있었다. 올해 27살의 탈북 파이터 격투기 챔피언 장정혁 선수다.

 

- 언제 프로선수로 데뷔하였나.

20183월이다. 한국에서 일본무패챔피언 니시카와 야마토 선수와 대결했다. 그의 주먹에 쓰러졌지만 그대로 끝날 수는 없었고 끝내 역전승으로 승리하였다. 20196월 강원도 원주종합체육관에서 굽네몰 로드FC 영건즈43’이 개최되었다. 난타전 끝에 상대선수를 제압하며 로드FC에서 2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다.

- 다른 경기가 있었다면.

많이 있었다. 지난 20229월에는 ()‘한국킥복싱협회가 주최하는 전국킥복싱대회 미들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프로로 데뷔한지 4년 만에 이룩한 소중한 성과다. 올해 3월에는 일본종합격투기(MMA) 대회에서 ACF 웰터급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으며 현재는 팀헌터 소속으로 열심히 활동 중에 있다.

 

2018년 일본챔피언 야마토 선수와 대결

쓰러졌지만 그대로 끝날 수는 없었고

끝내 역전승으로 승리...올해 3월에는

일본종합격투기대회서 ACF 웰터급챔피언

현재는 팀헌터 소속으로 열심히 활동 중

 

 - 경기훈련 과정을 말해 달라.

경기시즌 보통 하루3, 한 번에 3시간씩 운동을 하는데 헬스, 스프링 등 다양한 종목을 한다. 계체량을 위한 다이어트도 필수이다. 310kg씩 마지막에는 하루4~5kg씩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 나만의 체중감량 비법은 식사량을 줄이는 것이다. 선수들은 시합 전에 운동과 생활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체육계에서 격투기의 인기는.

솔직히 말해 아직 프로격투기협회 같은 단체도 없고 비인기 종목이다. 그러다보니 후원사, 팬클럽 등이 전혀 없다. 참고로 보통 한 시합에 나가 우승하면 50~100만원 상금을 받는다. 국제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것은 순수 명예일 뿐이다. 시합이 없을 때에는 막노동도 하고 또 커피숍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 본인에게 격투기는 뭔가.

어쩌면 나를 살려주고 희망까지 준 삶의 그 자체다. 이 종목은 새 기술이 계속 생기기에 훈련과 도전에 끝이 없다. 훈련에서 타격능력을 키우면 그래플링(양 선수가 서로 매트 위에서 단단히 붙잡은 형태)이 약해지고, 그래플링을 키우면 타격능력이 약해진다. 때로는 얻어맞고, 지기도 하지만 링 위에서 반칙하지 말아야 한다.

 

시합에서 우승하면 50~100만원 상금 받아

국제경기에서 우승 하는 것은 순수 명예

경기 없을 때는 막노동· 알바 하고 있어

 

- 자신을 소개해 달라.

함북도 온성에서 19976월에 태어났다. 외동이고 우리 가문은 대대로 농사꾼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평범한 농장원(농민)이었는데 나도 지금쯤 북한에 있었다면 아마 부모처럼 영락없이 농장원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북한에서 우리 같은 백성들은 정말 어렵고 비참하게 지냈다.

 

탈북민 격투기 챔피언 장정혁

 - 특이한 기억은 무엇인가.

식상한 답변인지 모르겠으나 전기다. 하루에 보통 1~2시간 전기가 들어오면 최고다. 심지어 6개월 내내 단 하루도 전등불 구경을 못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은 밖에서 놀다가 전기만 들어오면 집에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기도 한다. 국가재산 전기도 개인에게서 뇌물을 받고 공급하는 배전반(지역 전력공급소) 사람들이다.

- 어떻게 탈북을 하였나.

오랫동안 혼자 사시던 어머니가 중국으로 가서 돈 벌어오겠다며 3년 전 쯤에 집을 나섰는데 2005~6년경에 북송되어 왔다. 북한에서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3~4년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였다. 어머니는 이제 더는 여기 조선에서 못 살겠다!”며 나의 손을 잡고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내가 13살 때인 2009년이었다.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중국 연길을 거쳐 료녕성에 가서 3~4년을 보냈다. 한국으로 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이를 속이고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는데 어느 날 현장사고가 났고 치료비는 고사하고 월급도 못 받았다. 이유는 탈북자이기에. 그때 눈물 흘리며 죽어도 한국에 가겠다고 결심했고 제3국을 거쳐 어머니와 함께 201211월 서울에 왔다.

 

하나원 수료 후 사회생활하며 우울증 시달려

많은 탈북민이 겪는 정신적 병이라고 해도 맞아

그러다가 운동을 하면 시련 이겨낼 것 같다

생각 들어 탈북민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입학

 

- 정착 초기는 어떻게 보냈나.

민이 겪는 정신적인 병이라고 해도 맞다. 그러다가 운동을 해보자! 그래야 이 시련을 이겨낼 것 같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다. 서울에 있는 탈북민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 입학하여 중·고등학교 1~3학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

-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현재처럼 당분간 운동을 계속할 예정이다. 탈북민 격투기 챔피언의 명예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북한체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탈북자들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나 같은 청년들의 탈북사태도 계속될 것으로 본다. 엄마 손을 잡고 한국으로 온 20대 청년이 국제경기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은 분명 후배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 고마운 분은 누구인가.

 당연히 나의 어머니다. 50대 초반인데 평생을 나를 키우며 살아오셨다. 불운하게도 혈액암 투병 중이시고 현재는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빨리 병마를 털어버린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경치 구경하려 여행도 다니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나의 어머니!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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