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500여명 참여...‘어게인 1907평양대부흥회’ 천안서 재현

[인터뷰] 인천한나라은혜교회 김권능 담임목사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5/02/18 [17:48]

탈북민 500여명 참여...‘어게인 1907평양대부흥회’ 천안서 재현

[인터뷰] 인천한나라은혜교회 김권능 담임목사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5/02/18 [17:48]

북한서는 수령의 교시 관철이나 당정책 지지모임 등에 수천수만 명이 광장과 문화회관 등에 모여 행사를 실시한다. 여기에 해당기관 소속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만약에 불참하면 혁명의 반동분자로 낙인 되어 감옥에 갈수도 있다.

이런 원시적 생활이 몸이 배였던 탈북민들은 한국 종교계의 집회, 선교대회 등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탈북민이 참여하는 올해 첫 종교집회에 탈북민 강사로 나섰던 김권능 인천한나라은혜교회 담임목사를 서울 영등포에서 만났다.

 

- 어게인 1907 평양대부흥회는.

118년 전 평양에서 한국기독교는 물론 세계기독교 역사에도 유명한 ‘1907년 평양대부흥회가 개최됐다. 경이로웠던 그 대부흥을 재현한다는 의미서 ‘AGAIN 1907 평양대부흥회로 이번까지 제4차에 이르고 있다. 지난 25년간 탈북민사역과 북한선교에 헌신해 오신 열방빛선교회(대표 최광 서울황금종교회 담임목사)가 주최했다.

 

- 더 상세하게 소개해준다면.

202516일부터 11일까지 충청남도 천안시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에서 4차주님의 이름만 높여지는 어게인 1907평양대부흥회가 성과적으로 열렸다. 탈북민 500명과 남한성도 1500명이 참여한 특별기도집회였다. 말씀사경회, 전도와 선교에 대한 특강, 심령부흥회, 기도회, 뮤지컬 등의 프로그램과 함께 집회 중간마다 정착의 역경을 신앙적으로 잘 극복한 여러 탈북민 성도들의 간증으로 진행되었다.

 

- 탈북민 참여 대형 종교집회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예전부터 한국교회서 많은 부흥집회를 열고 있다. 특히 평양대부흥회 100주년인 지난 2007년을 전후해서 그 대부흥을 재현하려는 집회도 많았다. 대형교회 집회는 수십 만 명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 꼭 큰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탈북민 500명이 숙식을 함께한 종교집회는 지금껏 없었다.

 

16~ 11일까지 충남 천안 호서대학교

아산캠퍼스서 주님 이름만 높이는 어게인

1907평양대부흥회열려... 탈북민 500명과

남한성도 1500명이 참여한 특별 기도집회

 

탈북민들의 참여 필요...강제적이었지만

김일성과 노동당에 충성했던 열정과 노력

1/10만 보여도 모두 집사, 장로가 될 것

 

 - 본 부흥회의 특성은 뭔가.

참여단체나 교회이름, 선교기관명 등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으로 바뀌고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도록 집중한다는 것이다. 항상 그랬지만 집회 강사들 역시 목회자 혹은 선교사로써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높이며 예수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찐한 사역자들로 초청되었다.

 

- 어떤 내용으로 설교(강의)하나.

수령 독재자의 만행으로 암흑이 되어버린 북한의 평양을 위해 절실한 기도가 필요했다.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우리 탈북민들이다. 고향에서 추위와 굶주림, 노동당 독재정치에 시달리는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하루가 급하다. 당사자인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평화통일은 점점 우리 앞으로 가까이 올 수 있다.

 

암흑 땅이 되어버린 북한 평양을 위해

절실한 기도가 필요하고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탈북민들 고향서 추위와 굶주림

독재정치에 시달리는 부모형제 생각하면

하루가 급해...당사자인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평화통일 가까이 올 수 있어

 

- 자신을 소개해 달라.

황해남도 신원군에서 19761월에 출생했다. 형제는 3남매의 둘째. 부친은 광업위원회 OO광물탐사대 간부차 운전수로 재직했고 모친은 주부였다. 우리 집은 운전수인 아버지의 직업특성상 주거지 이사를 자주 했다. 1993년까지 함경남도 단천서 OO고등학교를 다녔고 1996년에 OO광업전문학교(3년제)를 졸업했다. 직업배치는 OO광산에 받았으나 가까운 동료들과 생계를 위한 장사에 뛰어들었다.

 

- 북한을 떠난 동기는 무엇인가.

중국에 있는 친척집으로 동냥행결심을 하고 동생과 19972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19988월 한국서 온 선교사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편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내는 루트를 탐색하자는 선교사와 합심하여 중국-몽골 국경을 다니며 여러 작업을 하던 중 20017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 그 이후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보위부 감옥수감 3개월 뒤 석방되어 재탈북하여 다시 중국으로 왔다. 하나님이 살려준 이 몸 값진 일을 하리라 결심했고 탈북자를 남한으로 보내는 일을 계속했다. 2002년은 중국 주재 외국공관으로 탈북민들의 무단진입풍이 대단했다. 20027월 탈북자 5명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가던 중 공안에 체포되었다. 다음해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원서 12년형 선고, 20044월 장춘 감옥에 수감되었다.

 

황해남도 신원군에서 19761월 출생

중국에 있는 친척집으로 동냥행결심

동생과 19972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

 

19988월 한국서 온 선교사 통해

신앙 갖게 돼...탈북자 한국으로 보내는

루트 탐색하자는 선교사와 합심하여

중국-몽골 국경 다니며 여러 작업 하던 중

20017월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돼

 

보위부 감옥수감 3개월 뒤 석방되어 재탈북

하나님이 살려준 몸 값진 일 하리라 결심

탈북자 남한으로 보내는 일 계속하고 있어

 

 - 중국 감옥에서의 기억은.

2년을 감형된 10년 형기는 20111220일까지. 전날인 1219일 새벽 북한(온성군 남양)으로 송환되기 위해 중국공안 호송차에 올랐다. 오전10시 투먼에 도착, 북한에서 받지 않았다. 그날 김정일의 사망 발표가 났다. 결국 김정일이 죽고 내가 살았다. 이후 연길감옥에 입소, 2012316일 석방, 한 달 후 서울로 왔다.

 

김권능 목사

- 서울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는가.

신학공부를 하고픈 마음은 중국에서부터 있었다. 하나님이 독재자 김정일을 죽이고 나를 살린 것은 주님의 종이 되라는 뜻이 분명했다. 대한민국 입국 이듬해 서울 총신대학교 3학년에 편입해 2015년 졸업하였다. 3년 뒤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바로 아세아선교대학원에 입학하여 2020년에 졸업했다. 이후 숭실대학교 기독교통일지도자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으며 2022년 수료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량 탈북민 시대가 열린지도 이제는 2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는 탈북민 교회들도 한국교회와 동일하게 당당한 일원으로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탈북민들의 참여가 우선이다. 비록 강제적이었지만 탈북민들이 북한에서 김일성과 노동당에 충성했던 열정과 노력 1/10만 보여도 모두가 교회 집사, 장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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