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⓶ 2대 국토통일원 김영선(金永善)장관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 개선, 갈라진 조국 통일하는 문제 협의하기 위한 남북공동성명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받음 없이 자주적 해결" 등 합의

윤현중 기자 | 기사입력 2025/05/12 [11:27]

[기획] 56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⓶ 2대 국토통일원 김영선(金永善)장관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 개선, 갈라진 조국 통일하는 문제 협의하기 위한 남북공동성명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받음 없이 자주적 해결" 등 합의

윤현중 기자 | 입력 : 2025/05/12 [11:27]

김영선 2대  국토통일원 장관은 재임 기간이 1970310일부터 1973122일까지로 비교적 장기간인 39개월에 이른다. 그의 재임 시 국제정세가 요동쳤고 남북관계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이 무렵 국내 정치를 보면, 1971년 대선이 있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비교적 큰 표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국제정세는 복잡하게 전개됐다. 그 모든 것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주도했다. 닉슨은 가장 먼저 박정희 정부를 압박했다. 그는 해외 주둔 미군 감축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한미 합의하에 주한미군 3분의 1 정도의 철수가 단행됐다. 동시에 공산국가인 중국에 대한 관계개선을 처음으로 추진했다.

 

1971년 키신저의 중국 방문, 중국의 유엔 가입 및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 획득.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및 미중 정상회담 개최, 양국에 연락사무소 설치가 이어졌다. 일본이 미국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1972년 중국과 수교했다.

 

남북관계는 국제정세의 변화, 더 구체적으로 미중간의 공감대에 따라 남북 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남은 미국이, 북은 중국이 남북 간 대화와 화해를 권유했다. 그 결과 남북이 서로 경쟁하듯 제안이 잇따랐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 19714월 북한에서 8개항 평화통일방안 제시, 이어 김일성이 남한의 여야 정당 및 사회단체와의 대화용의 표명이 이어졌다.

 

우리정부는 북한과 대화하기 쉬운 인도적인 문제를 골랐다. 그것이 적십자회담이었다. 우리 정부의 제안으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실무급 회담은 효율성이 없었다.

 

남북은 비밀접촉을 통해 고위급 회담을 진행했고, 197274일 통일의 기본 원칙에 합의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의 후속 조치로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호 비방 방송 및 삐라 살포를 중단했다.

 

그러나 남북 간의 모든 대화와, 회담, 협상 전략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했다. 아쉽게도 당시 국토통일원은 정세 조사, 연구, 분석, 대국민 홍보가 주된 일이었다.

 

김영선 장관은 당시에 적은 인력으로 서독의 동방정책을 연구했다. 동서독 간 민간 인적왕래, 경제교류협력 사례를 참조하여 남북관계 적용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통일정책은 이승만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김 장관은 국회답변에서 우리나라의 평화통일 기본방침은 유엔감시 하 남북 총선거"임을 재확인했다.

2대 국토통일원장관이 된 김영선의 배경을 보면,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와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행정 관료를 했다. 광복 후 1950년 고향 충남 보령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된 이래 1954년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3선 정치가였다.

 

19604.19 후 장면 총리의 내각에서 재무부장관이 되어 경제계획 수립 등에 참여했으나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쿠데타로 실각했다.

 

  타이완을 방문한 김영선 장관


김영선은 사실 국토통일원 장관 보다는 일본대사로서 산적한 한일관계 현안을 해소하는 데 공을 세워 더 유명해졌다. 19741월부터 197812월까지 주일본 대사를 했다. 그가 일본대사로 간 데는 그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임기: 1972.7.7.1974.12.9.)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한일 간에는 긴장과 갈등이 비등했다.

 

1973년 한국 정부가 일본에서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강제로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한일 관계에 큰 파장이 일었다. 1974년에는 재일동포 문세광의 박대통령 저격 및 육영수 여사 피격 서거로 제각각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갈등이 불타올랐다. 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결사 역할을 했다.

 

1974815일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살해 사건 이후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중요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활약으로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전 외무상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과 서한을 전달했고, 시이나 전 외무상이 박 대통령에게 조총련의 반한 활동을 단속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김영선과 다나카 가쿠에이가 서로 친하게 된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패망 전 다나카 가쿠에이는 토건 일을 하는 사장이었다. 19452, 원청업체인 이화학흥업(理化学興業) 공장 이전 문제로 대전에 왔다가 당시 대덕(현 대전시) 군수였던 김영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인연으로 둘이 좋은 사이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김영선은 1979년부터 제10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1983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을 하다가 1987년에 별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70.8.15): 북한이 군사도발과 대한민국 전복 행위를 그치면, 남북 간에 인위적 장벽을 제거해 나갈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하면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함께 토의해서 두 체제, 즉 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것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으로 국민이 선택하도록 나설 용의가 있다.

 

허담 북한 외무상, 8개항의 통일방안 발표(‘71.4.12, 최고인민회의): 주한미군 철수, 미군철수 후 남북군대 10만 이하로 감축,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일조약의 페기, 자주적, 민주적 남북한 총선거로 통일, 정치범 석방, 과도적 연방제 실시, 남북간의 경제교류, 과학, 문화, 예술, 체육의 교류, 서신왕래 및 인사교류, 남북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남북조선 정치협상회의의 소집.

 

7.4 남북공동성명(’72.7.4.)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52일부터 5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529일부터 6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했다.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통일은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

 

2. 쌍방은 남북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 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데 합의하였다.

 

5.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 후 락 김 영 주 197274

  • 도배방지 이미지

묘향산 명승지 등산길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