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4월 초 작은 목선(0.5t)을 타고 북한(함남 리원군)을 탈출하여 3일 만에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 주문진 앞바다로 들어온 청년(당시 20세)이 있다. 아버지와 삼촌 등 세 사람이 파도와 풍랑의 악전고투 끝에 찾아온 자유의 땅 남한이다. 청년은 서울의 택견학원에서 택견을 배웠고 한국체육대학교 대권도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시절 만난 지금의 아내와 두 딸을 두고 강원도에서 EJ레포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김성주 EJ레포츠 대표이사를 강원도 원주로 찾아가 만났다.
- EJ레포츠는 어떤 회사인가. 한국체육대학교 시절인 2010년 경 주말과 방학 때마다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열심히 일하는 내 모습을 보고 놀이동산 대표가 7천5백 만 원에 내가 맡은 놀이기구(유로번지)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권리금 5천만 원을 주면 회사운영권도 주겠다고 했으니 귀가 솔깃해 인수했다. 돈은 예비 장모님한데 빌렸고 약속대로 지정기간에 모두 갚았다. 대학졸업 이후 놀이공원 대표자리에 올랐고 이름을 EJ레포츠(레저+스포츠)로 바꾸었다. 아내와 내 이름에서 이니셜 한 자씩 딴 것이 EJ이다. 아내가 정말 고맙다.
- 레포츠 업종을 선정한 이유는. 우연 혹은 필연이었다고 할까.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대학시절 우연히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이 강원도. 대학시절 결혼과 함께 이어진 오늘이다. 다행히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살던 아내가 결혼, 퇴사 후 귀촌으로의 내 생각을 적극 지지해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야외텐트 제작, 놀이동산 컨설팅도 한다.
- 찾아가는 생존수영 교육은 뭔가. 회사를 설립하며 세월호사건(2014년 4월,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침몰로 수백 명 학생이 사망했음)을 계기로 의무화된 생존수영 교육에 주목했다. 우리 업체는 ‘찾아가는 이동식 생존수영교실’을 운영한다. 많은 학교에는 수영장이 없다. 있어도 여름 한 철만 잠시 운영한다. 전문 강사를 초빙하기도 어려운 도서·산간지역 학교에 에어돔형태의 조립 및 이동식 에어바운스 수영장을 설치하고 수영을 가르치는 것이다. 전국에 10개 안팎의 업체가 있고 우리가 제일 크다.
-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에어돔 수영장은 수영실습장, 탈의실, 샤워장으로 구성되었다. 수돗물 여과기와 보일러설비를 이용하여 수질이 깨끗하고 수영하기 적합한 온도의 물을 공급한다. 에어돔 수영장은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고 부지면적이 크지 않은 곳에도 설치할 수 있다. 생존수영 강사는 물론 만일 사태에 신속히 대비코자 인명구조 및 심폐소생술 자격보유 강사와 안전요원을 함께 파견하며 안전 프로그램을 병행함으로 만족도가 높다.
- 고객들에게 하고픈 말은 뭔가. EJ레포츠에서 제작하는 모든 제품은 안전제일을 중심으로 고객의 유익함과 편의성을 생각하여 만들고 유통하고 있다. 항상 고객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으로 직원교육 및 근로태도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나는 망망대해에서 82시간 사투 끝에 살아난 사람이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온 몸으로 체험했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1983년 9월에 태어났다. 형제는 3남매 중 맏이다. 2000년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대에 나가려고 간절히 희망했는데 아버지가 결사반대해서 가지 못하고 7월6일철도공장 기능공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는 7월6일철도공장(기관차부품 제조업체) 선물(충성의 선물을 마련하여 당에 바치는 것)조원. 우리 가족이 자강도 화평군 심심산골에서 땀 흘려 준비한 선물품목은 산삼과 꿀이며 그것은 평양에 진상품으로 올려 보내었다.
- 생활에 어떤 우환이 있었는가. 2000년도 할당 선물계획을 못하자 보위부검열이 붙었고 아버지는 공개재판과 15년형을 받았다. 리원군과 화평군을 오가며 자동차로 수산물 장사도 겸했고 그로인해 집에 가전제품도 여러 개 생겼으며 밥도 먹으며 살았다. 아버지는 수감 7개월 뒤 보석금을 내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아버지는 이후로 마음속에 당국에 대한 불신을 가졌다. 죽도록 노동당에 충성했는데 차례진 것은 15년 형량의 수감처벌이었다.
- 그게 탈북 동기가 되었겠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아! 암만 생각해도 여기는 정말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남조선(한국)이 좀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끈질긴 설득에 공감했다. 고향 리원군은 2003년 4월 3일 저녁 6시에 쪽배로 떠났다. 파도가 거셌고 바람도 세찬 먼 바다에 나왔고 4일 저녁 즈음 공해에 들어섰다. 엔진이 꺼지고 켜지지를 반복하며 5일 저녁 즈음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항에 들어왔다.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 어디서 탈북민 조사를 받았나. 주문진 도착 익일 승용차 3대에 나눠 타고 어떤 군사지역으로 들어갔다. 지역주둔 군단사령부 같은 느낌이 쉽게 들었다. 장군(중장) 부대장의 요청으로 우리가 북한을 떠나 한국까지 온 경로와 배에서 3박 4일간의 고생한 소리를 구체적으로 말했다. 이후 서울의 모처에서 아버지와 삼촌은 수 주간, 나는 한 달여 조사를 받았다.
- 앞으로 꿈이 있다면. 나의 롤 모델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선대회장이다. 한국자동차산업을 세계적으로 성장시킨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그다. 해방 후 정 회장은 소 한 마리를 갖고 남하했고 1998년 소 1000마리를 끌고 이북고향을 방문했다. 나는 북에서 배 한 척을 몰고 왔으니 통일이 되면 꼭 배(1t) 1000척을 몰고 고향으로 가고 싶다. 오늘의 하루하루는 22년 전 파도 사나운 동해에서 82시간과 바꾸었으니 너무나 소중하다.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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