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날(5일), 어버이 날(8일), 스승의 날(15일), 부부의 날(21일) 등이 있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식구들이 있는 가정보다 전체 사회와 집단을 중시하는 북한에 없는 이런 날 지정에 탈북민들이 놀라는 것 중의 하나다. 북한의 각 가정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정중히 걸고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 전체 인민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국가의 주요시책 중 하나다. 북한서 수령(대통령)은 모든 가정의 정신·정치적 아버지이며 노동당에서는 ‘가정은 혁명의 세포조직’ 이라고 강조한다. 서울 양천아파트관리사무소 2층 물댄동산에서 탈북여성 휠체어 장애인 이미영 씨와 마주 앉았다.
- 장애는 언제 입었는가. 고향은 양강도 혜산이고 1970년생이다. 불우하게도 생후 9개월 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 되었다. 9살까지 무릎걸음을 했고 10살 때부터 쌍지팡이(목발)을 했다. 어머니 혼자 우리 6남매를 키우시니 너무 힘들어 나를 인민(초등)학교에 보낼 생각도 못했다. 나 또한 창피해서 학교에 가 싶지 않았다.
- 그러면 공부는 어떻게 했나. 어느 날, 담임선생이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미영 학생이 장애인인데 거기에 공부까지 못했다고 하면 남들로부터 더욱 업신여김을 받는다”며 설득했다. 그리고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같이 자신이 나를 업고 학교에 등교시켰다. 선생님의 정성어린 진심의 모습에 어머니는 감동의 눈물을 훔쳤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걸어서 약 1시간. 어머니와 선생님이 번갈아 나를 업고 학교에 다녔다.
-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였는가. 고등중학교를 1988년 8월에 졸업했는데 직업을 배치해주지 않았다. 장애인이니 어디에 취업을 안 한다고 안전원(경찰)이 따지지 않는다. 대신 먹고 입고 쓰고 사는 경제생활은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 하여 아는 언니한데서 재봉(미싱)기술을 배웠고 집에서 옷(양복, 한복) 만드는 일을 하였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죽을 판이다.
- 재봉 일이 어렵지 않았나. 그런대로 할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어려워도 어른들은 양복과 한복은 한 벌씩 있다. 북한에서는 조직별 정치행사가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옷감 재질은 중국산이 좋았고 비싼 편이었다. 10년간 집에서 전문적으로 옷을 제작하여 돈을 벌었다. 밥도 충분히 먹고 살았으며 그 돈(약 2만 3천원)으로 집(약 10평)까지 샀던 것이다. 당시 노동자 한 달 월급이 평균 2천 원 정도 하였던 걸고 기억난다.
- 장애의 몸으로 결혼을 하였던데. 집에서 옷을 만들 때도 일감을 맡기러 오는 손님들 중에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총각들도 몇이 있었다. 결국은 모두 남자들 부모나 가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중매로 만난 지금의 남편이 나를 위해 자기를 바치겠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웠다. 남편을 2001년 1월에 만났고 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가을에 딸을 낳았다.
- 북한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다. 우리 부부한데 돈을 빌려간 동네사람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 돈을 갚으라고 독촉을 하자 흉기를 들고 나를 위협했다. 결국 그 흉기에 찔려 오른쪽 어깨뼈까지 부러졌다. 신고를 받은 안전원(경찰)이 쉬쉬하면서 “장애인인 네가 잘못해서 어깨뼈가 부러졌다”고 하라며 중재에 나섰다. 후에 알고 보니 뇌물을 받았던 것이다. 남편이 너무 억울하여 “여기(북한)서는 도무지 살기 어렵다”며 탈북하자고 내게 제안했다.
- 좀 더 상세히 말해 달라. 비참한 심정이었다. 아버지의 무덤이 있고 어머니와 언니 오빠들이 사는 고향이다. 동시에 수많은 인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지옥 같은 세상이다. 딸의 손목을 잡은 남편의 등에 업혀 눈물의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8년 7월 꿈에도 그리운 자유의 땅, 남한으로 왔다. 사람 사는 세상이 여기다.
- 한국 생활 첫 소감은. 한국에 와서 난생 처음으로 전동휠체어를 보았고 그걸 타면서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는 앉은뱅이자전거를 본인이 직접 손으로 바퀴를 돌리는 것뿐이다. 또한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와서 아무데나 자유롭게 다니는 것에 대단히 놀랐다. 휠체어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편의가 잘 되어있었다. 나는 솔직히 서울에서 첫 전동휠체어를 보고 저것은 돈 많은 재벌집 장애인들이 타는 것인 줄 알았다.
- 여러 가지 자격증도 취득했던데. 한국에 온 이듬해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땄다. 컴퓨터자격증을 취득하고 전산세무 공부를 했다. 서울시 양천구청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2년간 근무했고 이후 한국전력공사에서 20개월 일했다. 지금은 잠시 쉬면서 재취업 준비 중이다. 남과 북을 다 살아보니 북한보다는 대한민국이 더 우리 같은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이다.
- 남편이 고마운 분이겠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는 진짜 구세주나 같다. 몸이 성하지도 못한 나를 성한 사람도 오기 힘든 여기 한국까지 함께 데리고 온 남편이다. 건장한 자기 혼자도 오기 힘든 탈북 노정에 장애인인 나를 등에 업고 국경경비대 군인들의 총구를 뒤로하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은 내가 정말이지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다. 남편에게 항상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생각뿐이다.
- 탈북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 같은 장애인도 공부를 하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을 한다. 한국은 자기가 살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 사회인 것 같다. 일시적인 취업과 생활의 어려움 등은 생각하기 탓이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굶어죽는 북한만큼은 아니다. 탈북민들 모두가 열심히 살아서 꼭 통일의 날 고향으로 웃으며 귀향하자. <저작권자 ⓒ 통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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