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초기 통일정책에 인도주의와 화해·협력...새로운 가치 제시[기획] 57년 통일부 역사...수장들의 발자취를 보다 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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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완상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
한완상 부총리는 취임 당시 남북 간 화해와 교류를 확대하고, 북한을 적이 아닌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새로운 통일정책을 강조하였다. 그는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신뢰를 축적하는 것이 통일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정치·군사적 대결보다 인도주의와 민족공동체 의식을 앞세운 접근을 제시하였다.
남북 간 왕래와 교류 확대, 인도적 협력, 단계적 신뢰 구축은 그의 통일 철학의 핵심이었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출범 초기 일정 부분 현실화됐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북한 송환이었다. 그 송환은 인도주의 원칙을 실천한 상징적 조치였으며, 남북 간 신뢰를 회복하려는 문민정부의 초기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풀어가려 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 말기부터 이상 조짐을 보인 북한은 1993년 봄부터 북한 핵문제를 급속히 악화시켰다. 한반도 정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거부하였고, 3월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며 긴장을 고조시켰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에 집중하는 이른바 '통미봉남'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자 북한과의 화해로 남북대화와 교류 확대를 추진하고자 했던 통일원의 정책은 북핵 위기라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 정부 내 대북정책 기조 둘러싼 시각차 뚜렷
한완상 부총리는 이럴수록 대화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외교·안보 부처 장관들은 북핵 문제 해결을 국가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며 다른 사안은 당시 시점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정부 내 외교안보회의나 국무회의 등에서 부처 간 정책조율의 어려움이 반복되었고, 그러한 엇박자와 불협화음이 외부에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것은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서는 북핵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대통령은 한완상 부총리보다 북핵문제 선결을 주장하는 외교안보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완상 부총리는 자신의 통일철학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절감하게 되었다. 남북화해와 교류를 확대하려던 구상은 북핵 위기로 인해 추진 동력을 상실했고, 북한이 남북 간 대화보다 미국과의 협상에 집중하면서 통일원의 역할 역시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93년 12월, 취임 1년도 채 되지 않아 통일원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한완상 부총리가 남긴 의미까지 작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문민정부 초기 통일정책에 인도주의와 화해협력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고, 이인모 송환을 통해 남북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완상 통일원 부총리는 높은 기대와 쓸쓸한 퇴장이라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민정부 초기의 이상주의와 북핵 위기라는 현실 속에서 한 부총리는 평소 가졌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아직 시대가 무르익지 않았고 다음 정부가 올 때를 기다려야 했는지 모른다.
[인물 약력]
1936년 당진군 출생, 경북고등학교 졸업
서울대 사회학과, 미국 에모리대학 대학원 사회학 석사, 정치학 박사
서울대 문리대학 조교수, 부교수(1970-76)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KSCF) 이사장(1977-80), 민주화운동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1984-1993)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총장(1994-98)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 이사장(2000.2.)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2001.1~2002.1, 김대중정부)
대한적십자사 총재(2004-2007, 노무현 정부)
저서: 『민중과 지식인』(1978, 그러나 금서로 지정되어 압수, 지하로 몰래 유통), 『한국사회학』, 『분단극복과 통일조국』(1989) 『평화의 길 통일의 길』(2000)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