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어르신·지역민 등 50명에 매월 한번 순대국 대접해요”

[인터뷰] 인천 논현동 ‘주리네순대국집’ 한미옥 대표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6/08/20 [14:28]

“탈북어르신·지역민 등 50명에 매월 한번 순대국 대접해요”

[인터뷰] 인천 논현동 ‘주리네순대국집’ 한미옥 대표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6/08/20 [14:28]

탈북민들이 남한에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개인사업이다. 언데 어디서든 자기 적성과 취향대로 창업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희망하는 업종과 자금() 정도에 따라 적절한 규모의 사업장을 갖추고 이익창출을 위한,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그런 일을 국가에 등록하고 세금을 내면서 합법적으로 한다는 것에 매우 놀란다. 사회주의사회인 북한에서는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풍경이니 말이다. 최근 인천에 새로 개업한 주리네순대국을 찾아 한미옥 대표를 만났다.

 

- ‘주리네순대국을 소개해 달라.

지난 74일 수개월간 꼼꼼한 준비 끝에 개업했다.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5층 건물의 1층에 17평 규모로 있는 한식전문점이다. 논고개로와 은봉로가 교차되는 사거리에 있다. 주변에 인천남동고등학교와 은봉초등학교, 대형APT 단지들이 있다. 테이블은 6, 좌석은 24석이고 인천시 남동구 은봉로 309. 1층이다.

 

- 왜 순대국을 선택했나.

언젠가 어떤 설문조사를 보니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가장 많이 찾는 식사메뉴가 순대국으로 나왔다. 놀랍게도 이는 지금도 크게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 가장 대중적인 음식을 선택했다. 우리 부부가 하는 장사인데 지나친 욕심을 피우지 말고 사무실(경기여명연합회, 본 건물 5)과 가게(주리네순대국) 월세만 내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기본메뉴가 고향의 순대(아바이순대)

순대 속에 찹쌀과 선지, 야채 들어가

탈북민과 실향민은 물론 남한사람도

북한순대 좋아하는 분들 적지 않아

 

수제보리빵, 별미냉면, 골뱅이무침,

내장볶음 등...추가 공깃밥은 무료

 

- 북한음식도 있는가.

주리네순대국요리의 기본메뉴가 고향의 순대(아바이순대)이다. 원조 북한 함경도순대로 보면 된다. 재밌는 것은 남한순대는 당면을 넣고 만드는데 왜 찹쌀순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순대에는 찹쌀과 선지, 야채 등이 들어간다. 탈북민과 실향민은 물론이고 남한사람도 북한순대를 좋아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한미옥 주리네순대국집 대표

- 또 어떤 메뉴가 있는가.

전문 북한음식인 옥수수온면이 있다. 남한에서는 일부 어르신들이 추억으로 드시는 옥수수국수가 북한에서는 대부분 주민들의 주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인민들은 1년에 4~5회 뿐인 명절 때야 겨우 쌀 구경이라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식량(음식) 문제만큼은 북한에서 하늘의 별따기 마냥 어려운 것이다. 또한 수제보리빵, 별미냉면, 골뱅이무침, 내장볶음 등도 있다. 추가 공깃밥은 무료이다.

 

- 가게 매출을 말해줄 수 있나.

일평균 40~50만원으로 월평균 1200~1500만원으로 보면 된다. 여기서 식재료, 가스, 전기, 인건비 등을 빼면 40% 정도 이윤을 남긴다. 그 돈으로 5층에 있는 단체사무실 임대료를 지불한다. 크게 자랑할 만한 돈은 못 번다. 밥 먹고 아프지 않고 산다는 것만도 감사하다.

 

초복 날에 탈북민 어르신과 실향민,

지역주민들에 순대국 무료급식 봉사

매월 둘째 주 월요일마다 점심 무료

탈북 어르신 20, 지역민 30명 초청

 

- 무료급식 봉사 활동도 하던데.

개업이후 초복 날에 탈북민 어르신과 실향민, 지역주민들에 대한 순대국 무료급식 봉사를 펼쳤다. 말복에도 취약계층 어르신 50명을 초청하였다. 예전에는 5층 사무실(경기여명연합회)에서 음식을 만들어 1년에 8~10회 어르신들을 위한 급식봉사를 진행했다. 이제는 여기 가게에서 매달 둘째 주 월요일 점심때마다 할 예정이다. 매번 탈북민 어르신 20, 지역주민 어르신 30명을 초청한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721월 함남도 정평군서 태어났다. 부친은 조선인민군 O군부대 노동자였고 모친은 주부였다. 내가 16살 때 부친이 불치병으로 사망했다. 언니와 오빠는 학교졸업 후 독립(사회합숙)하여 살았다. 또 다른 오빠는 장애인이었기에 사실상 내가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고등중학교 3학년 때 중퇴. 농장에 취업했다.

 

- 또 다른 경력이 있다면.

함경남도 리원군에서 8년간 농사일을 마치고 23살 때 지인의 중매로 량강도 백암군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림산사업소 노동자였는데 배급이 끊기니 내가 나서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1995~96년까지 주로 도읍지 혜산에 가서 장사했다. 당시 역전과 버스정류장 등 공공장소에서 굶어죽은 아이들이 비일비재 하였다. 정말 하룻밤 자고 나면 시체가 손수레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안 나간 게 이상했다.

 

- 탈북 경로는 어떻게 되나.

19965월 중순, 혜산서 압록강을 넘었다. 첫 탈북이며 연길서 식당일을 했고 20044월 공안단속에 걸려 북송되었다. 살려고 세 번이나 북한을 떠난 것이 운도 나빠서 세 번이나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20111월 무산서 국경을 넘어 연길로 또 갔다. 거기서 3년간 숨어서 살다가 태국을 거쳐 201311월 서울에 왔다.

 

- 정착 초기 어떻게 보냈나.

탈북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보험설계사, 식품판매 등을 하였고 이후 결혼, 출산, 육아 등 보통 주부로 살았다. 남편은 중국에서 만난 탈북민이다. 어렵고 힘이 들 때마다 항상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고마운 분이다. 살벌한 자본주의사회에서 탈북민 부부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실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인천 논현동 주리네순대국을 찾아오시는 고객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실향민, 탈북민 어르신들이 아무쪼록 고향으로 가시는 날까지 모두가 건강하셨으면 한다. 지금 같아서는 통일이 우리시대에는 너무나 불가능할 것 같지만 수십 년 후에 될지? 아니면 내일 당장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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