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상봉의 불씨 살아있어...꼭 다시 타오를 것”

[인터뷰] 사단법인 ‘남북이산가족협회’ 류재복 회장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6/09/22 [17:37]

“남북이산가족상봉의 불씨 살아있어...꼭 다시 타오를 것”

[인터뷰] 사단법인 ‘남북이산가족협회’ 류재복 회장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6/09/22 [17:37]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1953년 한국전쟁 휴전까지 8년간 북한에서 자유대한으로 이주한 실향민은 대략 800만 명. 북에 남겨진 가족과 남에 두고 북으로 간 사람들 모두 남북이산가족이라고 한다. 2026년 현재 남한에 있는 실향민은 평균 80세 이상의 최고령으로 대략 10만여 명이며 평생토록 고향의 향수를 갖고 있다.

실향민들의 뒤를 이어 휴전이후 북에서 남하하는 탈북민이 현재 대략 3만 4천여 명이다. 정든 고향을 떠난 시대와 연대만 다를 뿐 똑같은 남북이산가족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휴전이 낳은 실향민과 탈북민은 불운의 존재들이다. 서울 금천구에서 사단법인 ‘남북이산가족협회’ 류재복 회장을 만났다.

 

- 남북이산가족협회가 가족상봉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지난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 중국방문 한국인들이 크게 늘었다. 동북3성(흑룡강성, 길림성, 료녕성)서 북한과 접촉할 기회가 생겨 남북이산가족의 교류중계가 빈번했다. 1998년 당시 강인덕 통일부장관의 요청으로 이산가족주선 단체인 ‘우남코퍼레이션’ 대표로 재북이산가족 103명의 생존을 확인했다. 그해 3월 중국·장춘서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와 북한 여동생(김길자)외 2가족을 극적으로 상봉시켰다.

- ‘남북이산가족협회’는 언제 설립되었나.

중국 연길에서 1999년 8월 소설가 이문열(본명 이열)과 북한 여동생(리옥경)을 만나게 했다. 2000년 6월 ‘우남코퍼레이션’의 초청으로 세계적인 평양교예단의 서울(잠실체육관) 공연이 진행되었고 이후 6·15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전까지 이산가족 관련 단체가 16개나 있었다. 2006년 4월 통일부 주최 단체간담회서 정부의 권고안을 받아들여 하나로 합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2011년 12월 ‘남북이산가족협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이듬해 2월 설립되었다.

- 그동안의 실적을 알려 달라.

2020년 9월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3,895명, 서신교환11,638건, 상봉1,750건이다. 또한 국군포로82명, 납북어부2명의 서신교환을 했다. 2022년 ‘남북이산가족협회’ 5대 회장으로 취임, 그해 11월 북한의 방북초청장을 수령했다. 또한 12월 기획재정부 기부금단체로 지정(2023~2024년)됐고 다시 2030년까지 연장되었다.

 

2006년 통일부 주최 단체간담회서

정부의 권고안으로 2011년 12월

‘남북이산가족협회’ 창립총회 열려

 

- 기타 업무실적이 있었다면.

한국-라오스친선협회 창립 20주년 기념 후원단체로 2024년 12월 라오스 현지행사에 참석했다. 2025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그날을 담아 내일을 부르다’ 음악회에 6·25참전유공자회 단체와 공동주최 참가했다. 한반도 자유왕래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HWPL과 체결했다. 2026년 7월 서울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 컨퍼런스센터에서 통일운동단체인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과 업무협약식을 맺었다.

- 언제부터 중국을 왕래 했는가.

역사적인 한중수교 이후 대중국(동북3성, 조선족사회) 문화교류사업에 열중하였다. 그것이 길림성 동포사회에 소문이 퍼졌고 ‘길림신문’ 서울지국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수락했다. 모름지기 이때부터 북측서 자기들의 필요로 나를 눈여겨본 것 같다. 1995년 12월 심양 서탑고려호텔로 북한요원 2명이 나를 찾아왔고 그것이 북한과의 첫 인연이 되었다. 상대기관은 북측 조선민족경제인연합회다.

- 1차 방북은 언제 실행하였나.

지난 1996년 5월, 북측의 첫 방북초청장을 베이징서 팩스로 받았다. 당시 냉랭한 남북관계로 통일부 방북승인 미정, 정보기관은 “북한서 신변안전은 장담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평양으로 갔고 기간은 1996년 6월 18~25일까지.

평양교예단의 서울방문문제 등을 논의했는데 그 와중에 ‘방북허가증’ 미소지로 ‘안기부간첩’ 협박을 받았다. 마침 서울서 알게 된 주한러시아대사관 요원이 평양서 근무 중임이 밝혀져 민간외교관으로 인정 되어 무사히 귀국했다.

 

1996년 5월, 첫 방북초청장을 받아

냉랭한 남북관계로 방북승인 미정

“북한서 신변안전 장담 못한다”고 해

평양에서 체류기간 6월 18~25일까지

민간외교관으로 인정되어 무사히 귀국

 

- 2차 방북의 목적은 무엇인가.

실은 정보기관의 의뢰를 받았다. 나의 암호명은 ‘K­5 두만강’이고 ‘금수산태양궁전’의 김일성 시신을 확인해오라는 특명이다. 방문기간은 1998년 7월 14~25일까지, 목적지는 평양. 여러 민간남북 경협문제를 논의했다. 관계자에게 진정으로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를 요청했고 어렵사리 방침(김정일의 승인)을 받아 방문했다.

- 금수산태양궁전 내부를 말해 달라.

1998년 7월 21일에 참관했다. 경내 및 현관 입구에 자동보총휴대 군인들이 양쪽을 지켰다. 실내 곳곳에는 매서운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위압감이 쉽게 들었다. 대형 수령 석고상에 인사하고 다른 장소로 옮기니 김일성 시신이 있었다. 그 뒤에서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한복을 입은 2명의 여성(20대 초반으로 보임)이 인사방법을 설명했다. 동서남북 4방면서 각각 두 번씩 목례했다. 각 방에는 수령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걸 설명하는 여자들은 20대 초중반이었다.

- 궁전 방명록에 소감을 썼는가.

동행한 관계자가 방명록책상 밑의 내발을 슬며시 밀었다. 그래서 눈치 채고 방명록에 글을 안 썼다. 후에 관계자가 귀띔해주기를 “정말 잘했다”고 하더라. 그거 쓰는 즉시 서울로 사진이 전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골치가 아플 것이고 겨우 시작하는 남북경협도 차질이 빚어지는 곳이 바로 서울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 그때 심정은 어떠했나.

북측이 한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통 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이고 우리는 길어야 5년이면 무조건 바뀌는 ‘비전문가’다. 궁전 밖에서 안내자에게 “주석님을 뵌 영광의 장소를 기념사진에 남기고 싶다”고 하니 2컷을 찍어주었다. 그게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특명, 김일성 시신확인 보증수표가 되었다. 북측에 따르면 한국 여권을 갖고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한 사람은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부인)에 이어 내가 두 번째라고 했다. 달던 쓰던 역사가 되었다.

 

북측이 한국 잘 파악..그들은 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 우리는 길어야 5년이면

무조건 바뀌는 ‘비전문가’ 궁전 밖에서

안내자에게 “주석님 뵌 영광의 장소를

남기고 싶다”고 하니 2컷 찍어주기도

 

- 색다른 평양추억이 있다면.

2회 방문한 평양의 숙소는 서재골초대소다. 주로 방북한 외국정상들이 묵는 곳으로 김일성과 절친인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수상이 평양을 자주 방문하여 들었던 숙소다. 나를 접촉한 해당기관의 배후는 노동당국제부와 수령호위총국. 훗날 평양서 찍은 여러 사진을 정보기관에 보여주니 그렇게 판독하더라. 내가 평양시내에 운전하고 다닌 벤츠차량의 번호판을 보고 말이다. 항상 북측 관계자와 동행했다.

-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하던데.

1994년 8월 15일 김영삼(YS)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남북이 합의했다. 그런데 그해 7월 8일 김일성이 돌연 사망했고 YS가 조문을 갔어야 했다. 이유는 평화와 남북공동 번영을 위해서다. 이후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남한이 여유 있게 배포를 갖고 남북문제를 주도할 기회를 놓쳤다.

- 북한과의 연계는 언제 끊겼는가.

2008년 5월, 이명박(MB) 대통령이 옥수수 5만 톤을 북측에 지원하겠다고 하자 북한이 “쌀도 아닌 옥수수 겨우 5만 톤?”하며 거절했다. 수개월 뒤 아쉬웠던지 나를 베이징으로 부르더니 “그 옥수수 다시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로 와서 이상득 의원(MB 형)을 통해 청와대에 사연을 전했다. 허나 MB가 “형님! 이젠 그런 일 그만해요”라며 거부했다. 이후 북한과의 연계가 단절되었다.

 

  류재복 남북이산가족협회 회장

- 향후 이산가족사업에 복안이 있다면.

내가 지난 30년간 중국과 한국에서 했던 다양한 대북사업(이산가족상봉, 평양교예단 서울방문, 대북물자지원 등) 실적을 정리하여 관계기관의 승인 하에 제3국을 통해 북한으로 보낸 상태이다.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오기를 기다린다.

분단으로 헤어진 남북이산가족은 죽기 전에 꼭 만나야하는 민족의 거사이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지금처럼 남북 정부가 못하는 것을 민간이 기업위주로 나서서 중국에서 재개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30년간 중국과 한국서 다양한 대북사업

실적 정리해 관계기관 승인 하에 제3국을

통해 북한으로 보낸 상태...어떤 형태로든

반응 올 것 기대...남북이산가족은 죽기 전

꼭 만나야하는 민족의 거사로 남북 정부가

못하는 것 민간이 기업위주로 나서 중국서

재개하는 간절한 바람 갖고 추진하고 있어

 

- 국제사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다. 개인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지지한다. 바람은 남북이산가족문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이산가족에게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에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이념이요, 사회요, 제도요, 정치요 해도 사람문제가 최우선 아니겠는가. 이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이다.

- 중국의 협력도 절실해 보인다.

과거 베이징서 각종 대북사업을 해보며 느낀 것은 평양과 같은 공산당체제여서 정치문제 만큼은 우리가 좋게 기대할 수준이 못된다. 그래서 더욱 민간이 나서고 주도가 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의 사례를 종합해보면 중국당국은 자국 땅에서 벌어지는 남북이산가족상봉은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묵인하는 형국이었다. 사실상 금강산관광도 파탄된 상태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중국에서라도 추진해보고 싶다.

 

가장 좋은 상봉은 한반도에서 하는 것

기본적 장애물은 남북당국자들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순수 인도적

문제로 봐야하는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 한국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가장 좋은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한반도서 하는 것이다. 과거 서울과 평양에서 행사형식으로 있었으나 지속적이지 못했다. 기본적인 장애물은 남북당국자들이 이산가족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순수 인도적인 문제로 봐야하는 하는데 말이다. 북측도 문제가 있지만 5년마다 바뀌는 민주주의정권도 단점은 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실향민 1세대는 이제 90%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고 보면 맞다. 2세는 남한에서 태어났기에 부모들만큼 이북고향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다. 실향민과 동일하게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탈북민이다.

앞으로 여러 탈북민단체와 업무협약을 맺고 안보세미나 및 유적지탐방, 애향사업, 통일강연 등을 하려고 한다. ‘먼저 온 통일’인 3만 4천여 탈북민은 안보불안에 빠진 우리사회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데 너무 소중한 분들이다.

- 김정은 위원장에게 하고픈 말은.

2천만 북한동포가 있기에 당신도 있다. 그 인민대중을 하늘처럼 받드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남북이산가족상봉 문제에 소박한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란다. 평생토록 고향땅 한 번 밟아보고 눈감는 것이 소원인 실향민들의 애끓는 심정을 다소 헤아려주는 진짜 ‘인민의 수령’ 모습도 좀 보여주시라. 그게 멋진 지도자다.

-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52년 충북·청주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경영대학원 동창회보주간, 한국어문기자협회 사무국장, (주)계명프로덕션 대표이사, (사)한민족교류협의회 사무총장, 중국길림신문 서울지국장 역임. 현재 ‘정경시사포커스’발행인, (사)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중앙위수석부의장, 안중근의사교육문화재단 대표, 중국연변대학교사범대학 객원교수, 중국하얼빈도리조선족학교 명예교장, 중국칭다오빈하이대학 명예학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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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찾기 2026/09/23 [10:43] 수정 | 삭제
  •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니,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지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만나지 못한 분들에게 그 시간은 잊힌 시간이 아니라, 그리움을 안고 하루하루 기다려 온 시간이겠지요. 마음에 묻어 둔 아린 곳을 누군가 잊지 않고 살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인터뷰를 읽으며 깊이 와닿았습니다. 특히 류재복 회장님이 오랜 기간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편지와 상봉의 길을 잇는 일에 참여해 왔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사에 소개된 생사 확인, 서신 교환, 상봉 기록을 보니 이 일이 말이나 구호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소식을 확인하는 일, 한 통의 편지를 전하는 일, 다시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만드는 일은 기다리는 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을까요. 물론 과거의 성과가 앞으로의 상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남북관계도 어렵고, 실제로 다시 만날 길이 열릴지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방법을 찾고, 이 문제를 사람의 일로 이야기하며 관심을 이어 가는 노력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기다리는 분들께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남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은 어느 한 사람이나 단체의 힘만으로 이룰 수 없는 큰 과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이 일을 붙들어 온 분들이 있기에 우리도 잊지 않고 관심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재복 회장님과 함께 애써 오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기다림 끝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편지를 나누고, 다시 손을 잡는 일이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영○ 2026/09/23 [10:06] 수정 | 삭제
  • 어려운 자를 돕고. 약한자의 편이되어주고 억울자를 돕고 늘 정의의 편에 서서 사시는 것이 기자님의 운명인가 봅니다!
  • 희망 2026/09/23 [07:43] 수정 | 삭제
  • 와 ~^^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다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수고해주시는 류재복 협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 행복한 2026/09/22 [22:26] 수정 | 삭제
  • 림일 객원기자님 멋지게 글쓰셨네요~~^^
  • 참새미 2026/09/22 [21:20] 수정 | 삭제
  • 멋지십니다
  • 새롭게 2026/09/22 [21:17] 수정 | 삭제
  • 남북이산가족협회장으로 활동하시는 류재복회장님과 관계자분들이 노력하시니 꼭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 질수 있다고 믿어요
  • 추성호 2026/09/22 [20:50] 수정 | 삭제
  • 보고픈 식구들 분단의 아픔이 꼭 이산가족 상봉으로 위로 되는 날이 꼭 오길. 바랍니다.
  • 그리운고향 2026/09/22 [20:22] 수정 | 삭제
  • 너무 훌륭한 일을 하고계시네요 존경합니다
  • 열매 2026/09/22 [19:51] 수정 | 삭제
  • 류재복대기자님의 수십년간의 수고와 피땀의 결과가 꼭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역사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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