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19.07.24 [13:02]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정치  경제  군사/외교  사회/NGO  탈북민  인터뷰  통일교육  오피니언  북한풍물기
탈북민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탈북자 정착 스토리] 인기가수 한옥정
한 달 행사 63회 비결?… “탈북자니까요”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3/06/24 [16:48]

2003년 7월, 서울 여의도 KBS홀로 한 여성이 찾아왔다. 쏟아지는 비에 옷과 신발이 흠뻑 젖었지만 여성은 개의치 않고 어디론가 뛰어올라갔다. 시청자상담실로 무작정 들어간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제가 가수를 하고 싶은 데요...”

2년 후, 그는 최초의 5인조 탈북여성 그룹 ‘달래음악단’으로 데뷔해 공중파를 탔다. 그룹의 인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KBS. MBC. SBS를 넘나들며 주말 오후를 장식했다. 각종 인기 가요프로그램에도 단골로 등장했다. 다섯 명의 멤버 중에서도 특히 리드보컬이었던 그의 인기는 높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시원한 가창력으로 청중을 사로잡은 그에게는 어느 덧 ‘탈북 김태희’라는 별명도 달렸다.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쇼맨십으로 그는 언론을 장식했다. 2012년, 종편방송 채널A의 인기프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가수 한옥정 씨의 무대로 달려가 본다.

올해 무려 28년차 가수, 한 씨는 6살 때부터 이미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에서 예능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선발해 훈련시키는 학생소년회관에 선발되어 17세에 기동예술선전대로 배치 받아 본격적인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북한 전역을 휩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의 바람을 그도 비켜가지 못했다. 300만이 넘는 아사자의 참사 속에서 특권층이 아닌 이상 그 자리에서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결국 그는 먼저 탈북한 언니를 따라 1998년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강을 건넜다.

 

가족과 주중 한국대사관 진입

 

중국에서 한 씨 가족을 기다린 것은 여성으로서는 너무도 가혹한 운명이었다. 먼저 건너간 언니는 이미 인신매매를 당해 행방불명된 상태였으며 한 씨와 여동생도 결국 납치되어 낯선 중국남성에게로 팔려가야만 했다.

“인신매매 브로커들이 저희를 언니에게 데려다 주겠다며 저와 동생을 한 택시에 태우고 어머니를 다른 택시에 태웠어요. 앞뒤로 나란히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양쪽 방향으로 갈려 내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차창을 주먹으로 쾅 쾅 치며 울고 소리쳤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중국인 남성에게 강제로 시집간 그는 이듬해에 원치 않는 임신을 통해 딸을 낳았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여동생이 인근 마을에 팔려 간 탓에 영원한 이별은 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중국남편을 설득해 그 때까지 숨어 지내던 어머니를 돈으로 사 와 다시 모녀의 상봉을 이룬 한 씨는 그 과정에서 팔려갔던 언니가 극적으로 탈출해 찾아옴에 따라 가족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한 씨는 가족과 함께 2003년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뛰어들었다.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못하면 대사관 주변을 24시간 지키고 있는 공안당국에 체포외어 북송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사관 진입은 성공적이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중국에서 낳은 딸이었다. 강제로 낳은 딸이지만 그래도 자식이라 한국국적을 취득하고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그가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딸을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와 접촉했다. 공안당국의 검열이 삼엄한 중국 사회에서 직접 데려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브로커에게 돈을 사기당해 절망한 적도 있다. 그렇게 7개월의 사투 끝에 드디어 딸은 한국으로 올 수 있었고 지금은 중학생으로 잘 자라고 있다.

 

태블릿 PC에 빼곡한 스케줄

 

한옥정 씨가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태블릿PC 속 스케줄 관리 애플리케이션에는 한 달 일정이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다.

올해 5월 한 달 동안 소화한 일정만 해도 63회에 이른다. 전국을 오가며 하루 2~3번의 일정은 기본이다.

“내가 탈북자가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돌아봤을까요? 내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한 씨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그 때문일까, 한 씨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에서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 탈북민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탈북민 강제북송 반대 집회에 가면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북한체제 하에서의 인권유린 실태를 폭로하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정계의 청문회에서도 한 씨의 증언은 국제사회를 움직였다.

한옥정 씨의 운명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은 외롭지 않고 행복하다. 근래 한 남한 남성과 결혼한 그의 표정에는 비로소 여유가 어린다. “그 사람이 제 사정을 잘 이해해줘요, 딸과도 무척 친하고요.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3/06/24 [16:48]  최종편집: ⓒ 통일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회원약관 개인보호정책 회사소개 한국통일교육학회 기사제보 보도자료
(140-806)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5-3 남영빌딩 201호
(주)통일신문(TEL:02-701-8347 FAX:02-701-8345)
Copyright ⓒ 2007 unityinfo.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