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2018.07.20 [19:03]
로그인 회원가입 아이디/비번 찾기
정치  경제  군사/외교  사회/NGO  탈북민  인터뷰  통일교육  오피니언  북한풍물기  생활/문화
인터뷰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인터뷰] 10년동안 꾸준히 전단 보낸 이민복 대북풍선단장
“삐라보고 탈북…북한주민 깨우치는데 효과적이지요”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5/12/18 [17:30]

한국을 방문한 UN관계자와 임진각 행사에 갔었다. 늘 그렇지만 철책선 너머 저 땅에 있는 내 형제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냉정하게 보면 김정은 정권에서 주는 배급을 먹고 시키는 일하는 북한주민들은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을 깨우치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대북전단(삐라)이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문득 떠오른 것이 탈북민출신의 이민복 대북풍선단장이었다. 10여 년 동안 꾸준히 북한에 전단을 보내는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분이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그의 대북풍선기지를 찾았다. 푸근한 이미지인 이민복 단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지막한 산자락에 컨테이너 몇 개가 보였다.
이민복 단장이 먼저 안내한 곳에는 대형 산소통 몇 개와 2.5t트럭이 있었다. 5t트럭은 정비소에서 수리중이라고 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지갑 속에 ‘가스안전관리자격증’을 보여주며 “대북전단을 발송하는 몇 사람이 있지만 이 자격증을 가진 이는 없다”고 했다. 엄연히 말하면 모두 불법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으로 안내해준 곳은 작업실 컨테이너다. 안에는 풍선제작에 필요한 기구이며 재료가 가득 있었다. 얼핏 보기에 고물상 폐품선별작업장 같았다. 이어 다른 컨테이너 1층에 들어왔다. 크지 않은 방에는 한반도 지도와 북한지도가 걸려 있었고, 한 쪽에는 업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품들이 보였다. 다른 쪽에는 이불이며 밥솥, 벽에 걸린 옷가지들이 있었다.
- 출생지와 가족을 소개해 달라.
1957년 12월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했다. 5살 때인가부터 부친의 인사이동으로 옮긴 평안도 순천에서 살았다. 이남(전라도 익산) 출신인 부친은 군상업관리소 책임일군이었고 모친은 주부였다. 우리 집 형제는 5남매이었는데 그중 내가 맏이였다.
- 북한에서의 학력과 경력을 알고 싶다.
1974년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과 동시에 ‘사회주의대건설장동원’ 현장에 2년간 나갔다. 너무 싫었다. 하여 자진퇴학하고 집으로 돌아와 1976년 순천농업전문학교와 남포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본 대학연구소에서 일했다. 이후 다시 순천으로 돌아와 1982년부터 북한농업과학원 소속 옥수수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 김일성에게 올린 1호 편지 내용은 뭔가?
옥수수연구소에서 병해충에 강한 종자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협동농장에서 시험한 결과 성과물은 적었다. 1987년부터 3년간 김정숙군의 소규모 개인텃밭에서 실험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거기서 협동농장보다 개인농이 수확물 확보가 크다고 확인했다. 이런 내용을 김일성에게 1호 편지로 올렸다. 결과는 황당했다. 상부기관에서 내려온 답변은 ‘농업과학자가 무슨 정치적인 소리를 하는가?’ 라는 식이었다. 이때부터 수령에 대한 해이가 조금씩 들었다.
- 탈북동기가 뭔가?
1990년 강원도 철원지역에 현지 농작물연구차 출장을 갔다. 거기서 우연히 남조선에서 보낸 대북 삐라를 보았는데 6.25전쟁내용이 있었다. 내가 북한에서 배우기는 미국과 남조선이 공격해왔다는데 그 안에는 반대로 적혀있었다. 이후 3개월간 남몰래 ‘농업연구’에서 ‘김일성연구’로 바뀌었다.
- 남한의 진실을 어떻게 알았나?
남조선에 갔다 온 사람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게 누구일까? 고민하다가 ‘아! 조선족’하고 무릎을 쳤다. 이후 그들에게 들은 소리는 ‘중국보다 30년 앞선 나라가 남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때야 비로소 거짓말쟁이 노동당을 알았다.
- 탈북시기와 경로는?
첫 탈북은 1990년 11월 29일 야밤에 했는데 공교롭게 장백현에서 중국 변방대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보위부집결소에 수감되었는데 나는 ‘농작물종자를 구하려고 갔다’고 강변했고, 아무 전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지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91년 6월 다시 탈북해 1년간 중국 연길을 떠돌아다녔다.
 
황해도 서흥군서 출생…남포농업대학 졸업
옥수수연구소에서 병해충에 강한 종자 연구
‘협동농장보다 개인농 수확물 확보가 크다’
김일성에 1호 편지…‘농업과학자가 정치적
소리를 하는가?’에 수령에 대한 해이 들
 
- 당시 중국이 한국과 수교 전 아닌가?
맞다. 하여 러시아가 더 낫다고 판단해 그곳을 택했다. 어느 조선족의 도움으로 동녕현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지역으로 4일간을 걸었다.
몇 개의 국경초소를 무사히 넘어 러시아로 들어섰다. 중국에 있을 때 모 한국선교사가 러시아 하바롭스크 모 선교사를 찾아가라 하였고 나는 그곳을 찾았다.
우스리스크에서 만난 선교사는 나를 10일간 대접을 잘 해주었다. 이후 그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갔다. 1992년 7월 6일 주러 한국대사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실망이었다. 억지로 맞아주면서 한국행이 쉽지 않을 거라며 시간을 두고 좀 연구해보자고 했다.
- 그 안에서 무슨 일 있었는가?
내가 들어간 날 벌목공 출신의 탈북자 3명이 현관에서 한국에 가겠다고 애걸복걸 하였다. 대사관 직원은 그들에게 ‘나가! 안 나가? 경찰 부를 거야’ 하면서 거의 협박식으로 그들을 강제로 대사관 밖으로 내보냈다.
그때 심정은 나라 없는 백성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나는 그래도 인텔리이었고 지인과 함께 찾아갔기에 그만한 천대는 안 받은 것 같다. 이후 대사관을 나와 며칠을 역전과 공원에서 잠을 잤다. 나의 한국행 희망에 대해 대사관측에서는 기다리든 3국을 통해 가든 본인이 알아서 가라는 눈치였다.
 
1991년 6월 탈북 1년간 중국 연길 떠돌아
한국선교사, 러시아 하바롭스크 선교사 소개
주러 한국대사관 ‘한국행 쉽지 않다’에 실망
벌목공 출신 탈북자 3명이 ‘한국에 가겠다’
애걸복걸에도 대사관 직원 ‘나가! 안 나가?
경찰 부를 거야’ 협박하며 밖으로 밀어내
 
-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반드시 내 힘으로 한국에 간다고 결심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신학원을 다녔다. 3년간 여러 지인의 도움으로 유엔난민기구(UNHCR)와 접촉을 하였고 마침내 탈북민 1호 국제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하여 1995년 2월 18일 대한민국에 도착하였다.
- 서울생활 초기의 상황을 알려 달라.
조사기관 출소 후 한국농촌연구원에서 러브콜이 왔다. 북한농촌경제를 함께 연구하자는 제안인데 거절했다. ‘협동농장인 북한농촌은 연구할 게 없다. 그냥 개인농만 알면 된다’고 단언했다. 이후 국방부 심리전단에서 일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왔다. 내심 반겼다. 그러나 그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다른 거 없다. 기득권세력인 저들 밥그릇이 줄어서다. 그 외에 다른 곳을 알아봐도 유사했다. 이때 통일운동은 기독교와 함께 해야겠다는 진리를 찾았다. 하여 1996년부터 서울신학대학을 다녔고 총신대는 2000년에 휴학 했다.
 
모스크바에서 신학원 다녀…3년간 지인의
도움으로 유엔난민기구와 접촉을 하였고
탈북민1호 국제난민 인정받아 한국 입국
‘통일운동 기독교와 함께 해야겠다’ 생각
‘자유북한인협회’ 만들어 전단풍선 날려
 
- 최초의 탈북민단체를 만든 줄 안다.
1998년에 탈북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유북한인협회’를 만들었다. 당시 조사기관에서 탈북민들에게 온갖 폭언, 반말, 폭행이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외국여행 단수여권 대상이었고 그것도 힘들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기에 세상을 향해 외쳤다.
- 대북풍선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나는 북한에서 전단(대북삐라) 덕에 사상을 바꾸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주민들의 사상을 바꿔주는 것이 핵심이다. 가장 분명한 방법이 전단이라고 생각했다. 하여 2003년부터 풍선을 보내며 당시는 고무풍선에 전단 수백 장을 담았다.
- 지금의 기술은 누가 개발했는가?
내가 했다. 5년에 걸쳐 연구한 기술이며 2005년부터 사용한다. 타임장치는 풍향속도, 거리 등에 맞춰 작동시킨다. 성공률은 90%이다. 고도 3,000m를 향해 날리는 7m높이의 풍선에 매달린 3.5㎏짜리 주머니에는 전단 3만 장(두께 0.03mm의 비닐에 써진 글)과 USB 스틱, 초코파이, 1달러 지폐 등이 들어간다.
 
타임장치는 풍향속도, 거리에 맞춰 작동
성공률 90%… 3,000m 향해 날리는
7m높이 풍선에 매달린 3.5㎏ 주머니에
전단3만장·USB스틱·초코파이·1달러지폐
2005년부터 연평균 1,500개 날려 보내
현재 백령도 못 가…수량도 반으로 줄어
 
- 1년에 몇 번 뿌리는가?
1년에 몇 개를 뿌리나? 해야 맞다. 한 번에 수십 개의 풍선을 날린다. 2005년부터 연평균 1,500개를 뿌렸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 백령도로 못 들어가면서 수량이 반으로 줄었다. 백령도는 남한에서 대북전단 뿌리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인데 풍선을 적극적으로 날리는 모 탈북단체 대표로 인해 이제 들어가기 어렵다.
정말 문제가 있다. 그 사람은 풍향과 날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대북전단을 뿌린다. 당연히 북한이 반발하고 지역주민들은 ‘탈북민들 때문에 불안해서 장사를 못 하겠다’며 나를 저지한다.
- 북한당국에는 효과가 있지 않은가?
효과 있다. 그러나 남남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내가 그에게 풍선기술을 전수해주었다. 1년 정도 내 뒤를 따라다니며 배우더니 이제는 나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대북전단도 더 많이 뿌렸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나는 5t, 2.5t 트럭 두 대로 하고 그는 1톤 트럭으로 하는데 비교가 되겠는가?
- 이혼한 부인은 탈북여성이었나?
남한여성이다. 서울에 온 이듬해 교회에서 중매로 만난 동갑인데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다. 결혼은 1996년 9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했다. 지난 2010년 아들의 손목을 잡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기에 그녀의 친인척이 많다.
이후 해마다 세 번이나 왔었는데 어떻게든 서로 이해의 폭을 좁히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에는 합의이혼을 하였다. 이런 산골에서 개똥냄새 맡으며 살겠다는 여자가 세상에 쉽겠냐?
- 지금은 혼자인가?
작년에 지인의 소개로 8살짜리 애가 딸린 중국한족 여성을 만났다. 신중했다. 또 살다가 달아나면 어쩌나하고 하여 예비신부를 이곳에 데려와 3개월간 생활시켜 봤다. 순수하고 착실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마음의 결정을 하고 현재 함께 산다. 정말이지 이 일은 혼자 하기가 무척 힘들다.
- 이 일을 여직 혼자 해왔는가?
아니다. 전단을 주머니에 넣는 일은 아르바이트를 쓴다. 조선족도, 탈북민도 써보았다. 허나 모두가 2~3일이면 못하겠다고 손 털고 나간다. 언젠가는 삐라발포 현장에서 새벽 1시에 짜증을 내며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 후원금은 충분히 들어오는가?
안 그렇다. 지역주민들은 ‘탈북민들은 북으로 돌아가라’며 난리를 친다. 그러니 나도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지금은 다행히 강연, 교회간증 등을 나간다. 또한 후원자들의 후원금 10%를 나의 인권비로 공개하고 받는다. 보면 알겠지만 나는 여기서 가축을 키우고 야채를 길러 먹는다. 정장은 강연 때 입을 옷 한 벌이면 되고 다른 옷은 필요 없다.
- 바람이 있다면?
올 봄에 선물로 보내준 림 작가의 소설 ‘통일’을 잘 보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로 과분하게 조명철 의원과 함께 나를 그려주어서 감사하다. 그 책 말미에 보니 통일에 대한 작가의 애절한 염원이 담겼더라. 림 작가의 바람이 내 바람이다.
림일 객원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5/12/18 [17:30]  최종편집: ⓒ 통일신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회원약관 개인보호정책 회사소개 한국통일교육학회 기사제보 보도자료
(140-806)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5-3 남영빌딩 201호
(주)통일신문(TEL:02-701-8347 FAX:02-701-8345)
Copyright ⓒ 2007 unityinfo.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