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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김정일의 여자 박애라
어머니가 남조선 살고 있다는 이유로 결혼 못 해/혁명가극 ‘피바다’, ‘꽃 파는 처녀’ 춤 장면 주역 맡아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6/07/28 [13:41]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김정일의 또 다른 여자, 박애라에 대한 이야기다. 박애라는 김정일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어머니가 남조선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끝내 부인이 되지 못했다.
 
예술적인 감각 천성적으로 타고나
 
조선인민군협주단 무용지도원이었던 박애라는 북한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유명한 무용수였으나 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순탄치 않은 일생을 보내야 했다. 박애라는 1947년 4월 11일에 서울시 마포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그의 어머니도 유명한 예술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박애라는 무수한 폭탄이 쏟아지는 서울을 피해 어머니와 헤어져 군사분계선 인근에 있던 깊숙한 시골의 친척집으로 옮겨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나면서 옛 3.8선은 사라지고 박애라가 피신해 왔던 시골의 친척집은 북한 땅으로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6.25전쟁 후에 자신들의 땅으로 남은 지역을 ‘신해방지구’라고 불렀다.
훗날 북한 당국의 선전일꾼이 된 박애라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유명한 예술인이었지만 남조선의 유흥가에서 예술을 팔면서 살아온 모성애가 없는 어머니였다, 그러나 은혜로운 당은 돌덩이처럼 버려진 나를 안아 키워주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박애라가 정말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인간의 이성이 통할 수 없는 북한 이라는 체제 아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을 하게 됐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박애라는 예술적인 감각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인민학교 무용소조에서 춤을 배우며 전국소년예술축전 독무 종목에 출연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 등 어려서부터 박애라는 예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이유로 12살이 나던 1958년에 평양음악무용대학에 특기생으로 입학하였다.
20살 되던 1967년에는 전국무용 개인 경연에서 1등을 받기도 하였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국립민족가극단 무용배우로 활동하던 박애라는 그 이후에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예술단에 소환되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72년, 공훈배우 칭호 수여한 김정일
 
혁명가극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의 춤 장면들에서 주역을 맡았고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배우로 활동하던 기간에는 무용 ‘조국의 진달래’를 비롯하여 ‘부채춤’, ‘조개춤’ 그리고 독무인 ‘청춘’등 10여개 작품들을 섬세하고 우아하게 표현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 선전선동부에 배치 받아 예술 사업을 지도하면서 박애라를 만나게 되었다. 김정일이 중앙당 선전선동부에 들어가 예술 사업을 맡으며 북한에서 이름난 배우들을 많이 접촉하게 되었다.
날씬한 몸매로 무대 위를 나는 박애라의 모습을 본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심장이 멎을 듯 했다”고 고백했다. 1972년 12월에 진행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 총화에서 김정일은 박애라에게 공훈배우 칭호를 주도록 지시하였다.
당시에 25살밖에 안된 박애라가 공훈배우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특혜였다. 박애라 에게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한 김정일은 그날 저녁 박애라를 불러내 밤새도록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졌다.
당시의 감격을 박애라는 1986년 김정일을 선전한 도서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의 제19권에 덕성 실기로 실었다. 그는 덕성실기에서 “제가 호실에서 동무들로부터 한창 축하의 인사를 받고 있을 때였다.
박애라는 어머니가 남조선에서 살고 있어 가정환경이 나쁘다는 조건에서도 김정일의 남다른 배려로 노동당에 입당하였다. 김정일은 박애라를 ‘타고난 재간둥이’, ‘연구를 하며 춤추는 배우’라면서 얼굴이 축갔다고 항상 걱정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당시 김정일은 월북 작가 이기영의 아들 이평과 살며 자식까지 낳은 조선예술영화 촬영소 배우 성혜림과 동거하던 중이었다. 김정일에게 아내를 빼앗긴 리평은 그 분을 삭이지 못해 대동강에 뛰어 들어 자살했다.
남의 유부녀를 빼앗아 살아가면서도 김정일은 박애라에게 한눈이 팔려 ‘해바라기’, ‘밀영의 봄’, ‘돈돌라리’, ‘풍년의 노래’ 등 주요 무용작품들에서 주인공의 역을 맡아 출연하도록 그에게 무한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일은 개별지도를 한다며 수시로 박애라를 자신이 있는 별장과 사무실에 불러들였다. 휴양이라는 구실로 박애라를 데리고 아직 그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강계초대소, 연풍초대소까지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이런 박애라에게 시련이 찾아 온 건 1980년대 들어서부터였다. 김정일은 영화배우이자 유부녀였던 성혜림과 살면서 맏아들인 김정남까지 보았지만 그녀와의 사랑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박애라가 자꾸 눈에 걸려 서였다.
김정일이 성혜림을 버리고 박애라와 살 것이라는 건 주변 간부들 사이에서 거의 사실처럼 받아 들여 졌다. 하지만 박애라는 김정일과 사귀면서 자기 후배이고 실력과 미모가 뛰어난 재일교포 출신 고용희를 소개했다. 김정일에게 고용희를 소개한 건 박애라의 치명적 실수였다. 김정일은 박애라보다 6살이나 어리고 춤 실력도 뛰어난 고용희에게 대번에 빠져들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이런 저런 구실로 박애라를 멀리하고 고용희를 자주 만났다.
고용희와 사귀면서도 김정일이 박애라를 계속 만났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1987년에 박애라에게 인민배우 칭호를 수여하고 만수대예술단에서 조선인민군협주단으로 소환한 사실을 두고 보면 그들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김정일이 생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조선인민군협주단 공연을 보았다는 사실은 박애라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고용희에게 김정일이라는 남자를 빼앗긴 박애라, 박애라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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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28 [13:4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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