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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전문섭의 아들 전휘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이고 김성애 자식인 김평일과 떨어질 줄 모르는 가까운 사이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01/05 [12:54]
<김형수 객원기자> 
지난해 5월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사망한 빨치산 출신들과 북한의 건국에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혁명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이라도 있는 듯이 강조했다.
 
전문섭의 ‘잘못된 판단 결과’라 지적
 
전문섭은 1937년 여름에 북한 호위사령관이었던 리을설과 함께 빨치산에 입대하였으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아들 전휘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전문섭에겐 아들 전휘 문제로 하여 뼈아픈 시련을 견뎌야 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전문섭의 아들 전휘는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가 낳은 아들, 그러니까 북한에서 곁가지라고 불리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1970년대 북한의 권력서열을 보면 전문섭은 호위국장으로 5군단장이었던 리을설보다 휠씬 우위에 있었다. 전문섭은 리을설보다 2살 손위였기도 했지만 임기웅변에 능했고 군사전략가로서의 판단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평판이 높았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후 전문섭은 내각 산하 국가검열위원장으로 추락했고 리을설은 호위사령관으로 승진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리게 되었다. 이를 두고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해 전문섭의 아들 전휘를 지목했다.
전문섭의 아들 전휘는 북한에서 아직 김일성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까지 김정일을 멀리했다. 반면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이고 김성애의 자식인 김평일과는 떨어질 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와 관련해 빨치산 출신 간부들은 ‘전휘가 김평일과 가까웠던 것은 전문섭의 잘못된 판단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빨치산 세력에 의해 김정일 후계자 돼
 
김성애는 의붓아들인 김정일을 잘 챙겨주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을 통치하느라 김정일에게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사실 김일성 역시 김성애가 낳은 김평일을 더 사랑했고 후계자 자리도 김평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래에 북한을 통치하게 될 권력자와 인연을 만들어 주느라 전문섭은 일부러 김평일에게 자기 아들 전휘를 가깝게 붙여 놓았다는 것이다. 김성애가 북한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북한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전문섭은 그 시절 김정일의 모친인 김정숙과 목숨을 나누던 빨치산 출신들이 북한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했다. 그때까지 북한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김일성의 아내인 김성애가 대립하면서 김정일은 아예 축에도 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인 1974년 2월에 김일성은 ‘당 사상일꾼 회의’를 조직했는데 이 자리는 사실상 후계자 문제를 결정짓는 자리였다. 이날 김일성은 회의에 참가한 고위 간부들에게 ‘동생 김영주와 아들인 김평일 중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면 좋겠냐’고 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최현과 김일, 리을설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세력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자신들과 빨치산 시절 동지였던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이 낳은 자식인 김정일은 왜 후계자 명단에서 빠졌냐고 거칠게 항의했다는 것이다. 그때 북한의 권력은 빨치산 세력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어 빨치산 출신이 아닌 간부들은 입도 열 수 없었고 심지어 김일성 조차도 이들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빨치산 세력들에 의해 김정일은 뜻밖에 후계자라는 넝쿨을 잡을 수 있었다.
김정일은 김평일보다 나이가 13살 많았고 북한에서 인민무력부장을 지내다 사망한 오진우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김정일이 생전에 최현과 김일, 오진우를 극진히 대해주며 잊지 못했던 이유는 이 같은 관계에서 비롯됐다. 반면 전문섭은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후에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복수심이 강한 김정일로부터 김평일의 친구였던 아들 전휘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김평일도 공손히 김정일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기지 않았다.
 
현재 생사조차 확인 되지 않고 있어
 
1976년 8월 북한군 병사들에 의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벌어지면서 남북 간의 정세는 극도로 긴장해졌다. 그동안 서슬 퍼런 김정일 앞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김평일은 이를 기회로 삼아 후계자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당시 김평일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터지자 미국과 맞선다며 대학 운동장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수많은 학생들을 이끌고 인민군대 자원입대를 탄원하는 행사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국가안전보위부 김병하 부장의 아들 김창하와 호위사령관 전문섭의 아들 전휘 등 고위 간부들의 자제들이 여기에 합세했다. 김평일은 인민군에 입대하면서 단번에 상좌라는 자리에 뛰어 오르며 군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군부에 손을 뻗힌 김평일은 전휘를 비롯한 고위간부들의 자식들과 국가안전보위부가 관리하는 초대소에서 호위총국 선전대 여배우들을 끌어와 밤새 술판을 벌렸다. 기고만장한 김평일 지지자들은 이 자리에서 ‘김평일 만세!’까지 외쳤다.
‘10호실’은 김평일의 측근들이 자주 회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김평일 만세’를 제창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자료들을 조사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분노와 두려움이 앞선 김정일은 김일성을 내세워 김평일을 제대시키도록 하고 1981년 가을에는 북한의 정치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 무관으로 파견했다. 이후 김평일은 지금까지 해외를 떠돌고 있다.
한편 국가안전보위부장인 김병하는 아들이 김평일과 함께 했다는 이유로 1982년 1월 당 조직지도부의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하였다. 자살한 김병하의 가족들은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정치범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전문섭의 아들 전휘도 지방에 행정 간부로 쫓겨 내려가 중앙의 권력계에서 멀어졌다. 전문섭이 사망한 후에는 전휘의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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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05 [12:54]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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