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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우인희 처형 사건의 진실
잔인하게 숙청해 다른 애첩들이 공포에 질려 딴 짓 못하게 하려는 목적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01/26 [13:56]
<김형수 객원기자>
북한에서 공개처형은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에게 대물림 된 권력세습의 유지수단이다. 김일성 일가는 자신들이 국가운영을 잘 못해 권력이 위기에 몰리게 될 때마다 누군가에게 죄를 덮어씌워 희생양으로 삼았다.
 
누추한 사생활과 연관되어 있어
 
구체적인 사례로 농사를 망쳐 인민들의 분노가 거세지자 노동당 농업담당비서였던 서관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한 것이라든지 화폐개혁에 실패하자 노동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3대를 멸족시킨 사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고위간부들의 희생과는 달리 김일성과 김정일의 추잡한 행위들을 감추기 위해 죽어 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성편집증이 강했던 김정일은 자신의 비윤리적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고위급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많이 밝혀졌지만 1980년 2월 강건군관학교 전술훈련장에서 처형된 영화배우 우인희의 사건도 실은 김정일의 누추한 사생활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두고 우인희와 김정일의 동거설이 크게 화제가 됐었지만 처형의 가장 큰 이유는 김정일의 ‘애첩 길들이기’ 였다 는 것이다. 김정일이 생전에 동거한 여성들은 공개된 것만 해도 5명이고 그 중 4명은 김정일과 동거해서 자식을 낳았다. 이 여성들만으로 성차지 않아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기쁨조’라는 사조직까지 만들어 비밀리에 운영했다.
김일성이 직접 고른 김정일의 결혼상대는 중앙당 서기실 타자수였던 김영숙이다. 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는 김설송과 김춘송이라는 딸자식이 있다. 앞서 김정일은 25살 나던 1966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이었던 홍일천과 동거하면서 1968년에 딸 김혜경을 보았지만 3년 후 영화배우 성혜림을 만나면서 헤어졌다.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는 귀국자 출신으로 김정일에게는 네 번째 첩에 불과했다. 김일성의 눈을 피해 김정일은 애첩인 성혜림을 ‘강서초대소’에 숨겨 두고 다른 애첩이었던 고용희는 ‘원산초대소’에 숨겨두었다. 숨겨둔 강서초대소에서 성혜림은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을 낳았다. 그리고 원산초대소에 숨겨진 고용희로부터 둘째 아들 김정철과 셋째인 김정은을 보았다. 김정은이 자신의 고향을 삼지연으로 둔갑하려 하는데 이는 전부 거짓이다.
 
고위간부 속에서 추문설 이어져
 
김정일이 북한의 유명한 영화 배우였던 우인희를 총살하게 된 계기는 우인희와의 사이에 있었던 불륜행위를 덮어버리려는 모략도 있었지만 당시 애첩으로 숨겨둔 고용희와 성혜림에게 공포를 주어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성혜림과 같은 나이또래였던 우인희는 북한에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영화배우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 예술영화 ‘목란꽃’과 ‘한 자위단원의 운명’, ‘세 동서’ 등 많은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우인희의 남편 류호손은 ‘이름 없는 영웅들’, 전사의 보고’, ‘영생’을 비롯해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든 유명한 연출가이다.
우인희는 너그럽고 개방된 성격의 소유자로 고위간부들과 돈 많은 재일귀국자들 속에서 추문설이 끊이질 않았다. 우인희를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 사건은 재일동포인 주정기와의 내연 관계가 큰 사고로 번진 결과 때문이었다.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살고 있던 주정기는 일본 조총련에서 돈 많은 상공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늘 말썽만 일으켜 온 아들을 북한에 보내면 사람구실을 하게 되리라 믿으며 김일성에게 직접 부탁했다. 김일성은 주정기를 평양시 중심부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로, 북한에서 ‘상아파트’라고 불리는 집에서 살게 했다. 술과 여자에 미친 주정기의 품행이 북한에 와서 달라질 리 없었다.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매달 보내는 생활비는 술과 유흥으로 날렸다.
1980년대 김일성은 더 많은 외화확보를 위해 재일귀국자 출신들에 한해서는 자가용차를 허용했다. 주정기 역시 일본에서 큰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자가용차를 가지고 있었다. 주정기는 아버지가 북한의 방송설비들을 신형 일본제로 보내준 대가로 관련 업종을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조선중앙방송 기술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내 준 돈이 주정기의 인생을 망쳐놓았다.
주정기는 ‘외화상점’에서 파는 비싼 옷들로 우인희를 유혹했다. 그렇게 관계가 가까워진 주정기는 1980년 2월경에 자가용차에서 우인희와 은밀한 짓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의 2월은 겨울철이라 추위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승용차의 시동을 걸어 놓고 실내 열풍기를 켜 놓았는데 밀폐된 공간이라 발생한 가스가 고스란히 차안으로 새들어왔고 그 가스에 질식한 주정기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우인희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우인희는 조사과정에서 ‘김정일을 만나게 해 달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자신과 우인희의 관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웠다.
 
‘부화죄’ 죄목…예술인들 보는데서 처형
 
한편으로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명돼 북한의 여러 사업들을 돌보기에 바쁘던 김정일은 숨겨 둔 성혜림과 고용희도 우인희와 같은 짓을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우인희 처형을 결심했다. 한때 관계가 좋았던 옛 애첩을 잔인하게 숙청함으로써 다른 애첩들이 공포에 질려 딴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우인희는 ‘부화죄’라는 어이없는 죄목으로 수많은 영화계와 문화계 예술인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됐다.
당시 북한의 고위간부들과 주민들 속에서는 ‘바람을 한번 피웠는데 총살까지 한 건 너무한 짓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형벌이었다. 그 사건에 놀란 성혜림은 병 치료를 구실로 러시아에 간 후 북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성혜림은 2002년 5월에 65살로 사망해 모스크바에 묻혔다.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 온 고용희는 유선암으로 49살의 나이에 프랑스에서 사망하였다. 성혜림이 인생 말년까지 모스크바에서 살 수 있었던 건 고용희 때문이라는 설도 많았다. 성혜림이 낳은 맏아들 김정남에게 권력을 빼앗길 것이 두려워 성혜림을 모스크바에서 살도록 하고 그의 아들 김정남은 해외로 쫓아 버렸다.
애첩들을 길들이기 위해 옛 애인이었던 한 배우의 목숨을 서슴지 않고 빼앗아 간 김정일, 성혜림과 고용희도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우인희가 걸었던 길을 자신들도 걸을 수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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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26 [13:56]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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