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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후계자 반열에 올랐던 김평일의 추락 (下)
1988년 불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로 발령/사실상 영원한 추방…가족들 모두 해외 떠돌아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04/06 [14:38]

<김형수 객원기자>

김정남 피살 소식을 들은 북한 전문가들은 한때 김정일과 후계자 각축전을 벌렸던 김정은의 삼촌 김평일을 주목하고 있다.

김평일은 28살인 1981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파견된 후 지금까지 해외에 거주해 오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주변에 친구들 많아

 

1974년 2월 김정일은 북한판 종교 교리인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을 내놓고 그해 6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내세워 김성애 세력을 숙청했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자식이었던 김평일의 앞날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다.

의붓어머니인 김성애를 권력의 자리에서 몰아낸 김정일은 다시는 김성애의 세력이 발을 붙일 틈이 없도록 자신의 친모인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했다.

이미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시절 김평일과 같은 학급동창이었던 인물들은 물론 다른 학급학생으로 김평일과 사진을 한 장이라도 남긴 사람들은 모조리 ‘곁가지’로 몰아 정치범관리소로 끌어갔다.

이런 혼란을 겪던 1976년 8월, 판문점에서 인민군이 도발한 도끼만행 사건으로 북남정세는 전쟁접경으로 치달았다. 이를 틈탄 김평일은 1977년 인민군에 자원입대하여 김일성을 등에 업고 대번에 상좌로 인민군 작전국에 배치됐다.

김평일은 키가 큰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김성애를 쏙 빼어 닮은 외모에 성격도 호탕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시절부터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다. 인민군 작전국에서도 김평일의 주변엔 항상 많은 군사지휘관들이 따라다녔다.

김평일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때 인민군에 탄원한 국가정치보위부(현 국가안전보위성) 부장 김병하의 아들인 김창하와 각별한 사이었다. 김평일은 김창하와 측근들을 위해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초대소에서 밤새 술판을 벌리기도 했다.

김성애 세력만 축출하면 끝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김평일이 작전국에 배치돼 인민군 내부에서 세력들을 구축하자 김정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에겐 김평일을 특별히 감시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과 수단이 절실했다.

당시 김평일을 감시하기 위해 김정일이 취한 조치가 바로 흰색 벤츠 승용차였다. 벤츠는 도이칠란트 산 승용차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통 외형은 검은색과 갈색, 회색, 은색을 많이 이용하고 흰색은 매우 드물었다.

 

흰색벤츠, 김일성일가 ‘곁가지’에 제공

 

북한에서 흰색 벤츠는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와 그의 자녀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경진, 그리고 김경진의 남편 김광섭에게 제공된 다섯 대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외국산 흰색 승용차를 수입하지 않아 김성애 일가만 타게 만들었다.

결국 북한에서는 흰색 승용차는 소위 김일성 일가의 ‘곁가지’에게만 제공되었다. 김정일은 이들이 탄 흰색 승용차를 통해 김성애 일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할 수 있었고 김평일의 동선을 시시각각으로 체크할 수 있었다.

김성애 일가를 감시하기 위해 김정일은 사법기관을 담당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8과에 특별 감시조를 조직해 놓았다.

8과 소속 특별 감시조는 하얀색의 벤츠가 움직일 때마다 “곁가지가 어디로 간다”는 식으로 항상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군부 내에서 김평일의 세력이 나날이 커 가는데 김정일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급기야 김정일은 대외사업을 더욱 확대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김평일을 해외에서 경험을 쌓고 오도록 해야 한다고 김일성을 부추겼다.

김정일의 덫에 걸린 김일성은 1978년 군부에서 한창 세력을 구축하던 김평일을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에 파견했다. 김평일이 1978년부터 1981까지 4년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김정일은 6차당대회를 조직했다.

6차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일을 공식화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이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인 사업이 김평일의 측근들을 숙청하는 일이었다. 그 첫 사건으로 국가정치보위부장 김병하에게 칼을 돌렸다.

김정일의 첫 숙청대상으로 국가정치보위부 부장 김병하를 택한 원인은 김병하가 김평일에게 국가정치보위부 소속 초대소를 제공했고 인민무력부에서 근무하는 김병하의 아들이 김평일과 남다른 우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해외에서 돌아와 다시 군부에 자리 잡은 김평일은 1987년에 인민군 작전부국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동생 김영일, 2000년 간암으로 죽음 맞아

 

김병하 사건 후 공백상태에 있던 국가안전보위부를 장악한 인물은 김영룡 부부장으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시절 김정일의 동창생이었다. 김평일이 인민무력부에서 고위 간부로 승진한 빨치산 출신 전병호의 아들 전휘와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김영룡과 평소 가까웠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민군 작전국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에 김정일은 다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1988년 김평일은 불가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 대사로 다시 해외 발령이 났다. 이는 사실상 북한에서 영원한 추방이라는 사실을 김평일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노동당 조직비서 자리에 오른 김정일을 더는 견제할 힘이 없었다.

김평일뿐만이 아니었다. 김정일에게 쫓겨 ‘곁가지’인 김성애의 가족들은 모두 유배 살이 마냥 해외로 쫓겨났다. 김평일의 동생인 김영일은 도이칠란트 대사관에서 특별한 직위가 없이 살다가 2000년에 간암으로 죽음을 맞았다.

김평일의 여동생 동생 김경진도 가족과 함께 아직 해외를 떠돌고 있다. 북한에서 수령의 핏줄을 직접적으로 이어 받은 본처의 자식들만 기본 줄기로 인정되는데 그런 특수한 지위는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 김경희에게만 차례지게 되었다.

그 외 후처의 자식들은 모두 기본 줄기에 붙어 기생하는 ‘곁가지’에 속하게 된다.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와 그의 자식들은 모두 ‘곁가지’로 분류돼 김일성을 계승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정일을 계승한 자는 다름 아닌 ‘곁가지’였다.

김일성 일가에서 유일하게 백두혈통을 이어 받은 김경희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해 김정은은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사정없이 처형했다. 비록 해외를 떠돌긴 했지만 김정남 역시 김정일 본처의 자식으로 김정은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김정일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에 올랐지만 ‘곁가지’의 목숨까지 손을 보진 않았다. 김정은은 ‘곁가지’인 자신의 정체를 ‘백두 혈통’으로 감추기 위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기본 줄기를 쑥대 베듯 마구 베어버렸다.

김정남 살해사건을 놓고 북한 전문가들이 김평일을 걱정하는 이유도 ‘곁가지’인 김정은의 야수성 때문이다. 이는 북한 전문가들만이 아닌 북한의 미래를 걱정하는 현지 간부들과 인민들의 걱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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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4/06 [14:3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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