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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탈북민 뷰티학 교수 될 것…통일 후 고향서 이 분야 발전에 기여”
[인터뷰] ‘라임 뷰티’ 박진선 원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10/26 [14:26]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생활문화’라는 이름하에 주민들의 옷차림이며 머리모양, 언어예절 등을 당국에서 엄격하게 통제한다. 김일성·김정일 시대까지는 여성들의 귀걸이, 목걸이 등은 자본주의 퇴폐문화라며 강하게 단속 하였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이런 통제가 중단된 것은 아니지만 다만 시기에 따라 다소 묵인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이 멋을 내거나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일단 배부른 다음에 하는 것이기에 하루 두 끼 멀건 죽으로 연명하는 대다수 일반주민들에게 세련된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꾸미기는 사치스러운 행위이다.

북한주민들은 태어나 종신토록 당국으로부터 정치사상 교육을 받으며 살아가기에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지방 산골에는 귀걸이, 목걸이를 한 여성이 전혀 없다. 그만큼 평양과 지방도시, 농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지옥의 차이다.

탈북민들이 남한에 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이다. 누구나 자기의 마음대로 머리모양과 개성적인 옷차림을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머리 모양을 해도, 어린 여자가 노란색의 염색을 해도 전혀 괜찮다. 옷차림은 세계 유행을 따르거나 자기만의 개성을 창조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속에서 자본주의문화에 익숙해지기도 하는 탈북민들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많이 붐비는 곳 중의 하나인 지하철 홍대입구역 주변에서 ‘라임뷰티’샵을 운영하고 있는 탈북여성 박진선 원장을 만났다.

▶고향이 어디인가?

198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오빠가 있다. 북한은 가족출신 성분을 중요시하는 사회인데 우리 집에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가족 편으로 성분이 다소 좋았다. 외할아버지가 OO농기계기술학교 교장이었다. 그 덕에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다소 도움을 받았다.

▶가족 이야기를 해 달라.

내가 12살 되던 해인 1998년 어느 날, 아버지가 식량을 구하려 집을 나갔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 시기이라 많은 사람들이 죽던 때이다. 2년 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는다며 집을 나갔다. 우리 마을은 중국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생계를 위해서 집을 나갔다하면 대부분 중국으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하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여 사람들이 별로 놀라지도 않는 것이 일상의 풍경이다.

▶남매가 혼자 살았으니 힘들었겠다.

어쩔 수 없이 오빠는 친할아버지 집으로, 나는 외할머니 집으로 더부살이를 갔다.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놀러가야 정상인데, 국가의 식량배급 중단으로 친인척 집이라도 그냥 가서 놀고먹는 것을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외할머니 집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했는데 한 개에 10원짜리 하루에 2~30개씩 팔았다.

 

1998년 부모님은 식량 구하려 나가고

오빠와 외할머니, 할아버지 집 더부살이

어머니가 가출한지 1년 뒤, 중국서 북송

학교생활 중 ‘월경전과’ 거론하며 괴롭혀

견디기 힘들어 고등학교 2학년에 중퇴

 

▶학교공부를 제대로 못했겠다.

어머니가 가출한지 1년 뒤, 중국에서 북송되어 나왔다. 다행히 지인의 도움으로 큰 처벌은 면했지만 ‘월경자’(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라는 딱지가 붙어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그게 학교에도 번져 담임선생님이 눈치를 주기까지 하였다. 학교생활 중 어떤 사소한 일이 있어도 ‘월경전과’를 거론하며 괴롭혔다. 그 걸 견디기 힘들어 고등학교 졸업 1년을 앞두고 중퇴하였다.

▶이후 무엇을 하였나?

어머니 따라 장사에 나섰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넘어 온 옷가지들을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등 아래지방에 내려가 파는 일을 하였다. 그 와중에 중국에서 북송되어 어느 감옥에서 처벌받고 고향으로 가는 중년남성을 알게 되었다.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어머니는 그 남성에게 돈과 음식을 주면서 위로하였다.

 

‘나라 없는 백성 상갓집 개만 못하다’ 말 실감

내 고향, 내 조국을 뛰쳐나와 남의 나라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는 정말 비참…낯 설은

중국 땅에 들어서서 천만다행히도 아버지만나

 

▶자세히 말해 달라.

나도 처음에는 몹시 의아해 했다. 길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을 마치 친 혈육마냥 끔찍하게 생각하며 친절하게 돌봐드리니 말이다. 허나 거기에는 비밀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남성에게 다시 재탈북을 권유하였고 이왕이면 우리 가족 탈북을 적극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실지 그 사람은 훗날 다시 탈북을 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우리 가족도 2001년 12월 두만강을 넘었다.

▶그때의 심정은?

정말이지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내 고향, 내 조국 땅을 뛰쳐나와 남의 나라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신세는 정말 비참하다. 낯 설은 중국 땅에 들어서서 천만다행히도 1주일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이다.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우리 가족은 베트남, 라오스, 태국 방향으로

이동 루트를 잡아 2003년 대한민국에 입국

탈북청소년대안학교인 ‘한꿈학교’ 2년 다녀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뷰티샵에 출근해

원장님 조언에 세계서울사이버대학교 졸업

 

▶중국에서 얼마나 체류했나?

일단 조선족이 많이 사는 연변으로 갔다. 우리의 탈북을 도와준 그 남성(북한사람)을 통하여 한국인 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우리가 한국에 가려면 우선 교회에서 합숙훈련을 받아야 한다면서 우리에게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렇게 10개월간 교육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정확히 말해준다면…

교회에 우리 가족을 포함하여 세 가족, 모두 10여 명이 있었다. 먼저 두 가족을 몽골국경 쪽으로 출발시켰는데 한 가족은 중국공안에 붙잡혀 북송되었고 다른 한 가족은 국경을 넘어 몽골에 입국하였다. 몽골에 입국하면 최소한 북송은 안 시키며 되도록 탈북자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우리 가족은 베트남, 라오스, 태국 방향으로 이동 루트를 잡았고 2003년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남한에 와서 공부를 했나?

당시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탈북청소년대안학교인 ‘한꿈학교’를 2년간 다니면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미용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서울 OO동에 있는 모 뷰티샵에 출근하였다.

원장님은 모 대학교 뷰티과 객원교수를 겸하고 있는 분이었다. 어느 날 원장님이 나에게 젊었으니 공부도 함께 병행하라며 조언을 해 주었다. 덕분에 세계서울사이버대학교를 2008년에 졸업하였다.

▶이후에는 무엇을 했나.

해외취업훈련 비자를 받아 싱가포르에 2년간 연수를 다녀왔다. 물론 미용계통이다. 이 분야도 들여다보면 다양하고 경쟁도 치열하다. 나는 미용업계 회사에 취직하는 많은 연수생들과 달리 독립적인 프리랜서로 활동하였다. 그게 어쩌면 더 빠른 시기에 그 분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한 일도 뷰티일이겠다.

그렇다. 일을 하면서 또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솔직히 말해 나에게 공부는 할수록 더 하고 싶은 영역이었다. 하여 전라남도 무안군에 있는 초당대학교 뷰티학과를 기숙사생활로 2년 다녔고 2015년에 졸업하였다. 이듬해 10월 그동안 내가 모아 두었던 돈과 부모님이 보태주는 돈을 합쳐 이 가게를 오픈하였다. 직원은 현재 2명 있고 올해 안에 1명 더 쓰려고 한다.

 

미용계통으로 싱가포르서 2년간 연수

이 분야도 다양하고 경쟁도 치열해

미용업계 회사에 취직 대신 독립적인

프리랜서로 활동…기술 습득에 도움

 

▶남다른 미용 애착에 대한 사연은

남한에 와서 공부도 일도 오직 미용분야를 하였다. 벌써 1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어쩌면 그 분야에서 ‘선수’가 되었다고 자신한다.(웃음) 내가 어릴 때 부주의로 뜨거운 물로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 그것을 감추려고 늘 신경을 썼던 것이 이렇게 남한에 와서 일자리 선택에 연결 됐다.

 

전남 무안군에 있는 초당대학교 뷰티학과

기숙사생활로 2년 다녔고 2015년에 졸업

이듬해 10월 모아 두었던 돈과 부모님이

보태주는 돈을 합쳐 가게 오픈…직원은

현재 2명 있고 올해 안에 1명 채용계획

 

‘탈북민뷰티협회’를 만들어 쌓은 노하우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어…공부 더 하여

대학교서 뷰티학 가르치는 교수가 소망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일과 공부를 병행하라,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공부도 필요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일자리에 맞는 공부, 구직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라고 권고해주고 싶다. 도중에 ‘다른 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꿋꿋이 참고 이겨내야 ‘성공’을 만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뭔가?

언제인가 ‘탈북민뷰티협회’를 만들어 내가 쌓은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적극 알려주고 싶다. 물론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이 분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공부를 좀 더하여 대학교에서 뷰티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려고 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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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26 [14:26]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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