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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어려운 삶…두만강 건너던 필사의 각오로 이겨내길”
[인터뷰] 푸드스마일즈 우양 박영철 과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11/02 [15:03]

현저하게 차이가 있는 남과 북의 두 사회를 온몸으로 체험한 탈북민들이다. 단도직입적인 표현으로 서울에서의 행복조건이라고 하면 인생역전의 기회인 로또복권 당첨이나 혹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최고명예인 대통령직, 아니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건강, 그리고 나눔과 봉사 등이 될 수 있다.

간혹 일확천금의 복권당첨으로 단란한 가정이 깨지고, 평생토록 개인적인 행동의 자유가 없는 대통령이 행복의 조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작은 것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행복의 조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 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복의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가진 것과 없는 것의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행복했던 날들이 모여 오늘이 되고, 오늘이 있어 내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사는 마음도 행복의 조건이다.

3만 천 여 탈북민 사회에는 자유를 찾아 남한에 와서 사회복지학을 전공,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 마포구에 소재한 사회복지법인 ‘푸드스마일즈 우양’에서 근무하는 박영철 과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8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고 형제는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중앙은행 무산지점에서 근무하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내가 고등중학교 시절에 ‘고난의 행군’(북한에서 최악의 경제 사정으로 300만이 굶어죽은 시기)을 맞았다. 당시 학급생 절반 이상이 밥을 먹지 못해 결석했다. 나도 졸업을 1년 앞두고 중퇴하였다.

▶고난의 행군은 어떻게 알았나?

당시 학교와 인민반(주거지)에서 주민들을 모아 놓고 강연을 했다. 내용은 우리가 지금 하는 ‘고난의 행군’ 이유가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이 사회주의 우리 공화국을 없애버리려고 악랄하게 경제제재를 하기 때문’ 이라고 선전했다.

▶이후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유는 배고픔도 있었지만 중국으로 돈 벌러 떠난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이다. 15살 때인 1997년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마음뿐이지 그 넓은 대륙에서 어머니를 찾기는 풀숲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다. 그러다가 어느 농촌에서 농사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자세히 소개해준다면…

우선 신분 때문에 어느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일을 하지 못했다. 씨뿌리기, 김매기, 농작물수확, 축산관리 등 농촌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일단 주인이 먹여주고 재워주니 그것만으로도 꿈같은 일이었다.

▶임금은 어떻게 받았나?

당시 하루 일당은 중국돈 5위안(한화 7~800원)이었다. 똑같은 일을 한 현지인이 받는 일당은 25~30위안이다. 때로 한 달 내내 일하고도 150위안 받아야 하나 50위안 받아도 아무 말 못했다. 이유는 신분이 불법체류자인 탈북자이기 때문이다. 공안에 잡혀가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82년 함북 무산서 출생...고등중학 시절

‘고난의 행군’시기 학급생 절반 이상이

밥 먹지 못해 결석…졸업 앞두고 중퇴

 

▶중국 돈의 가치를 말해 달라.

내가 중국에서 불법체류 신분이라 마음 놓고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북한 돈과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중국 돈 100위안이면 내 고향 무산에서 우리 세 식구가 6개월 내내 옥수수밥에 시래기국을 배불리 먹는다.

▶그렇게 얼마나 일 했는가?

농사일은 계절노동이다.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도 많았다. 중국에서 4년간 일하면서 모두 2~30회 이상 두만강을 넘어 북한에 드나들었다. 그 와중에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된 것은 4회이다. 청진, 무산 등 안전부 구류장에 들어가면 짧게는 1달, 길게는 2~3달 처벌을 받았다. 미성년자이어서 경한 처벌이다.

▶탈북을 하게 된 이유는 뭔가?

성인이 되었으니 군대에 나가게 됐고 혼자인 아버지와 8살 아래의 어린 남동생이 눈에 밟혔다. 내가 ‘우리 중국에 가서 살자’고 설득했으나 아버지는 ‘무섭다’며 끝내 거절하였고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손목을 잡고 탈북하였다. 내가 20살 때다.

 

두만강 건너 중국 땅 도착…농사일 도와

씨뿌리기, 김매기, 농작물수확, 축산관리

먹여주고 재워주니 그것으로 꿈같은 일

 

하루 일당은 중국돈 5위안(한화 7~800원)

똑같은 일 한 현지인 받는 일당 25~30위안

한 달 일하고 50위안 받아도 아무 말 못해

 

▶무섭지 않았나?

중국을 4년간 수십 회 드나들고, 또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어 구류장에서 온갖 죽을 고생 다해서인지 그깟 두려움은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 가지인데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선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 가장 위대하고 걸출한 ‘인민의 수령’ 김일성과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을 당과 국가의 수반으로 높이 모시고 사는 이 세상 최고의 영광이다. 이것을 북한에서는 ‘수령복’ ‘장군복’ ‘원수복’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은 어떤 지도자의 정치를 받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다르다고 한다.

위대한 최고지도자가 이끄는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강국, 미국과도 군사적으로 대등한 지위에 있으며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민의 지상낙원인 공화국에서 사는 명예로운 특권이다. 이것을 마련해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게 언제나 다함없는 흠모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사는 것이 북한주민들의 영광이다.

허면 북한주민들은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을까? 아니다. 거기도 분명 부와 명예가 중시되는 세상이다. 다만 제도의 특성상 국가와 사회이미지에 오점이 될 만한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이나 표현, 모습들이 통제되고 있을 따름이다. 독재사회인 것만큼 수령 외에 대중의 우상화 대상이 되는 것을 금지한다.

북한에서의 주민들이 선호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 드리고 기쁨과 만족을 올리는 것으로 사회와 인간의 최고 미덕으로 평가한다. 국가가 주민들을 혁명사상교양으로 세뇌시킨 결과이다. 주민들이 평생토록 수령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음은 또 하나의 말 못할 고통이다.

▶어린 나이에 남한에 왔다.

2001년 7월 두만강을 넘어 한 달 만에 태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몇 달을 보내고 12월에 남한에 입국했다. 20살인 내가 12살의 어린 동생의 손목을 잡고 탈북해 남한에 입국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칭찬해주었다.

▶사회생활 어떻게 시작했나?

경기도에 임대아파트를 배정 받았다. 동생은 지역 초등학교에 입학시켰고 나는 북한에서 중퇴한 고등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안학교에 갈까? 일반학교에 갈까? 고민하던 중 일반학교인 안산동산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나보다 3~4살 어린 친구들과 함께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대학공부는 어디서 했나?

2004년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2008년에 졸업하였다. 굳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생활방향을 설계하는 사회복지학을 배우고 싶은 것은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고향에 돌아가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서이다.

▶여기가 첫 직장인가?

아니다. 처음 취업한 직장은 금융기관인 신협이었다. 거기에 1년 6개월을 근무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은행의 셔터가 오르면 들어가고 내리면 나오고, 그 안에서 돈을 많이 만지는 은행원이면 좋은 직업이지만 인생이 돈이 다는 아닌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배운 사회복지학과도 거리가 먼 직업이었고.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였는가?

내가 ‘푸드스마일즈 우양’에 들어와서 지금껏 쭉 해오는 일은 탈북청소년 교육지원업무와 남한의 독거어르신에게 먹거리지원 업무이다. 탈북민 관련해서는 ‘평화강사양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탈북청년들의 경험을 남한의 초·중·고·대에 가서 강의해주는 것이다.

 

2004년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입학해

2008년에 졸업…생활방향 설계하는

사회복지학 배운 것은 통일되었을 때

고향에 돌아가서 일하고 싶었기 때문

 

▶또 다른 것이 있다면…

통일축구대회 프로그램이다. 남과 북의 청년들이 함께 하는 축구만큼이나 쉽고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것도 흔치 않다. 스포츠에는 국경이 없다 할 정도로 비정치적이 아닌가. 이것도 나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내년이면 만들어진지 10주년이 된다. 우리 단체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그램이다.

▶직업이 적성에 맞나?

은행일 하던 것보다는 훨씬 만족하다. 사람을 찾아가서 만나고 그들과 오늘과 미래를 상담하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프로그램)을 창조하는 사회복지사 일이 즐겁다. 동변상련이라고 내가 탈북의 아픔을 겪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탈북청년들에게 아쉬운 점은

글쎄, 북한에서 김일성 때문에 생긴 나쁜 습관이라고 할까? 대부분의 탈북청년들이 남한에서 살면서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인사말) 표현을 잘하지 못한다. 아마도 북한에서 4살 때부터 ‘김일성 원수님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으니 ‘고맙다’는 말은 당연히 수령에게만 하는 것인 줄 아는 버릇이 굳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면...

남한에서 정착은 어쩌면 탈북보다 힘들다. 탈북민이 두만강을 건널 때의 위험은 한 순간이지만 남한에서의 어려운 정착은 수개월 수년 일수도 있다. 누구든 남한정착 기간에 두만강을 건너던 필사의 각오를 잊으면 안 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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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02 [15:03]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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