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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반란사건<1>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12/07 [16:35]

<김형수 객원기자>

1988년 투서사건과 90년대 동유럽에서 유학생들 집단망명 ‘북한민주화운동’ 시초

북한에 대한 호기심 중의 하나가 ‘왜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시위나 폭동, 군사정변이나 인민봉기가 없느냐?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이다.

 

김일성 우상화에 첫 반기 든 지식인

 

북한에선 김씨 일가의 파쇼독재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없었을까? 북한 당국이 떠들고 있는 김일성 시대 ‘종파투쟁’이 한국으로 말하면 실패한 혁명, 군사정변과 무장폭동 모의였다. 북한에서 인민봉기와 반란사건들도 많았다.

10월 1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70돌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해 9월 27일 김정은은 ‘주체혁명의 새 시대 김일성종합대학의 기본임무에 대하여’라는 서한을 김일성종합대학 교직원 학생들에게 보냈다.

서한에서 먼저 김정은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민족간부육성의 중심기지이며 주체과학교육 발전의 최고전당이라고 추켜세우면서‘대학이 걸어온 역사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영도의 업적이 깃들어 있다’고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자랑을 늘여놓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역사가 김정은의 말처럼 김일성과 김정일의 영도업적으로 흘러왔을까?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파쇼독재에 누구보다 일찍이 반기를 든 사람들이 바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던 지성인들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해방 후 1946년 10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 법령 제40호에 의거해 개교한 북한의 첫 대학이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이름을 놓고 논란이 무성했다.

초기 국내 민족주의자들과 독립 운동가들은 김일성종합대학을 국립민족 종합대학으로 이름 지을 것을 논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을 대리통치(임정)하던 소련이 김일성을 전적으로 밀어주면서 대학의 이름도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되었다. 김일성이 직접 스탈린으로부터 대학건설을 위한 자금과 자재를 지원 받았다.

당시 소련이 첫 대학을 거점으로 북한과 유학생 교환을 비롯해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한다는 계약을 김일성과 직접 체결해 김일성 지지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김정은이 서한에서 주장한 것처럼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도구로만 활용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우상화에 첫 반기를 든 지식인들도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 소련과 동유럽에서 스탈린의 우상화를 반대하는 흐름이 세차게 타올랐다. 이를 계기로 소련과 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이 북한 정권과 김일성의 독재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철학연구와 필독활동 비밀리에 확산

 

급해 맞은 김일성 정권은 1970년대 초부터 소련과 동유럽에서 유학생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1980년대 초까지 완전한 쇄국정치에 매달렸다.

1980년대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에 올라선 후에야 북한은 해외 유학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1988년 김일성종합대학 투서사건과 대학 총장이었던 황장엽 비서의 망명, 1990년대 동유럽에서 유학하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의 집단망명 사건은 오늘날 한국에서 북한민주화운동의 시초가 되어 지금도 김정은 정권을 위협하고 있다.

1980년대 사회주의는 그 결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스스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주의 정치가들이 ‘몇몇 자본가들을 위한 사회’라고 비난을 아끼지 않았던 자본주의는 눈부시게 비약하며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세계의 모든 발전이 그러하듯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그 앞장에 지식인들이 있었다. 당시까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4월 테제’와 같은 낡은이론 속에 파묻혀 세계의 변화에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독과 뽈스까(폴란드)를 비롯해 서방세계와 일정하게 연계를 유지하고 있던 국가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도서들이 흘러들었다. 솔제니친과 같은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서방세계에 사회주의 추악하고 너절한 진실을 알렸다.

1980년대부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식인들이 중심이 돼 자본주의 철학연구와 필독활동이 비밀리에 확산됐다. 당연히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도 이런 도서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소련과 동부독일, 웽그리아(헝가리) 등 사회주의 나라 대학생들 속에서 널리 확산된 서방의 도서들로는 플라톤의 ‘국가론’,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과 같은 도서들이었다.

 

‘순수 이성 비판’ 읽은 학생들 모두 숙청

 

1930년대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된 철학자 집단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주창하던 이성운동 ‘위대한 거부’는 당시 소련과 동유럽 지식인들의 양심의 표본으로 간주돼왔다. 이는 북한의 유학생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동유럽사회주의가 무너지자 북한은 김일성종합대학 유학생 출신들 가운데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과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읽은 학생들을 모조리 색출했고 이를 읽은 학생들은 이유 불문하고 숙청했다.

동유럽에서 유학생활을 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 중에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서 ‘노예의 길’이 제일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사회주의 국가창시자 일리이치 레닌과 오랜 친구였던 미국의 시인 맥스 이스트만의 말을 인용한 때문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에 현혹돼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스탈린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 온 이스트만의 비난은 김일성에게 현혹됐다가 김정일에게 분노를 느낀 북한 지식인들 정서와 비슷했다.

하이에크가 인용한 이스트만의 비판은 ‘스탈린주의는 파시즘보다 낫기는커녕 더 열악하며, 더 무자비하고 야만적이며 불공정하고 비도덕적일뿐더러 반민주주의적이며 어떠한 희망이나 양심의 가책에 의해 속죄될 수 없는 초파시스트주의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였다.

이 문구는 유학생 출신들에 의해 1980년대 김일성 종합대학에 유입됐다.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어 가던 1980년대 말에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속에서 김정일을 은유적으로 비난하는 문구로 활용되어 왔다.

지금도 북한에서 일부 친지들 사이에 오가는 말 중에 ‘히틀러는 자민족을 위해 타민족을 죽였지만 이건(김씨를 지칭) 자기 민족을 죽여 체제를 유지하려는 가장 악한 제도’라고 비난하는 표현도 이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어난 투서사건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반란사건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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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07 [16:35]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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