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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수리 배우고 싶은 탈북민에 기술 전수 해주고 싶다”
[인터뷰] 하루 소득 20여만 원 올린다는 땡큐열쇠 박영애 실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12/14 [15:51]

박영애 땡큐열쇠 실장(62년생)은 구두수선 및 열쇠수리기술로 하루 매출 이십만 원 가까운 소득을 자랑하며 똑 소리 나는 삶을 살고 있다. ‘기술 배우려는 탈북민이 있다면 기술 전수도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에 와서 정착을 잘하면 그게 바로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박영애 씨‘탈북병사 생명을 살려준 이국종 교수님,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 했다.

그 사람이 오죽하면 왔겠는가 싶어 텔레비전 보면서 많이 울었다’면서 또 눈물을 훔친다. 박영애씨를 인천논현동 사업장에서 만나 남한정착사례를 들었다.

▶고향 등 자신에 대해 소개해 달라.

함경북도 청진시가 고향이다. 서른두 살 때 남편과 사별 후 홀로 아들 하나, 딸 둘 삼남매를 키웠다. 청진에서는 장터에 나가 쌀 옥수수 국수 등을 파는 장사를 했고, 아들은 냉장고 수리하는 일 등을 했다. 워낙 힘든 때라 배낭에다가 오십 킬로 정도 되는 등짐을 메고 다녀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아들이 자전거로 태워 데려다주고는 했는데 나중에는 직접 배워 장사를 했다. 현재 아들은 스물일곱, 첫째 딸은 서른하나다. 둘째 딸은 중국으로 탈북한 후 소식을 알 수 없게 됐다. 그 아이만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생사를 알 수 없어 걱정이다.

▶당시 북한 고향의 경제상황은 어땠나.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제 고향 주변만 해도 나이 오십 지나면 육십까지 사는 노인네가 없었다. 자식들한테 부담되니까 밥 한 숟가락 더 자식한테 주려고 목메서 자살해 죽고 약 먹어 자살해 죽고…. 그렇게 죽어가는 분들이 당시에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평양 다음으로 큰 도시인 청진에서도 그 정도 힘들었는데, 시골 같은 데서는 오죽했을까.

군인들도 먹을 것이 없어, 다들 집에 올 정도였다. 같이 국수 장사하던 아줌마도 아들이 군인이었는데 병원에 있다는 얘기에 가보니, 걷지도 못하고 벌벌 기어서 엄마한테 오는 것을 보았다. 당시 그 병원 안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이 백 명 정도는 된다고 했다.

그래도 군대에 있는 것보다는 장사하는 엄마 밑에 있는 게 나으니, 집에 데려와 영양보충 해줘 살만해질 쯤 군대에서 다시 데리고 갔다. 근데 그 정도로 경제가 어려워도 북에 있을 때는 당시 지도자였던 김정일 장군이 지켜주시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감히 원망이란 것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

 

자식들 부담 덜어주려 자살한 부모들 많아

50킬로 넘는 짐 메고 옥수수, 국수 등 팔아

처음엔 탈북 한 딸이 남한에 있는 줄 몰라

탈북하려 아들과 태국경찰에 일부러 붙잡혀

 

▶어떤 계기로 탈북하게 됐는지.

2011년 10월 6일. 아들하고 함께 탈북 했다. 남한에 온 건 먼저 정착해 살던 큰딸을 통해 오게 됐다. 처음엔 딸이 남한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중국 어딘가에 있는 줄 알았다. 딸이 탈북 할 당시는 중국으로 넘어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중국가면 잘산다는 얘기가 파다했던 때다. 나중에 북한 경찰인 안전부에서 부모들 다 불러놓고 조사를 하러 왔다. 우리 집 딸들이 둘인데, 둘 다 탈북을 했다. 이름과 나이를 적으며 붙잡아오겠다고 했다.

▶잡히면 어떻게 되나?

중국에 있다 잡히면 본인만 일반 교도소에 가고, 한 삼년 있다 나온다. 마을에 있을 때 감옥에 있는 자녀를 위해 보모들이 먹을 것을 계속 나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교도소서 옥수수 껍데기 썩은 것을 죽으로 만들어 주는데, 그것만 먹고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근데 그분들 딸은 3년 있다가 풀려놔도 다시 중국으로 탈북 했다.

중국 가면 일반교도소지만, 한국으로 갔다가 북송되면 가족까지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간다. 이때는 면회고 뭐도 없다. 그저 죽는 것이다. 뭐든 한국 관련된 일과 접촉하면 위험하다. 한국드라마를 봐도 가족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남한으로 파견된 간첩도 북한에 가면 죽임을 당한다.

▶남한으로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어느 날 브로커들이 오더니 딸하고의 전화 통화를 연결시켜줬다. 이때도 딸이 중국에서 전화를 한 줄 알았다. ‘여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 고저 먹고살기에 지장이 없다’며 딸이 넘어오라고 했지만 무서워서 못 간다고 했다.

이후 세 번째로 통화했을 땐데 딸이 내가 안 넘어오면 열심히 벌어 브로커들에게 준 돈이 모두 무효가 된다고 해서 아들보고 누나한테 가서 3년만 살고 돈 벌어 오자고 했다. 탈북을 도운 것은 소대장, 중대장 등 군관 출신의 브로커들이 도왔다. 청진에서 중국 경계선인 해산까지 오면서 갖고 있던 주민등록증, 시계 등을 모두 버렸다.

처음엔 중국 길림 어느 집에 갔는데, 집주인이 두 시간만 있으면 딸이 온다고 했다. 어디서 오냐고 하니, 남한에서 왔다고 하더라.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미국 놈들이랑 조선 괴뢰당이라 어떻게 사느냐며 암담해했다.

딸이 하는 말이 남한이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른다며,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는 거였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한번 가보자, 이후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몇 주간 버스를 갈아타며, 태국으로 넘어갔다.

거기서는 일부러 현지 경찰을 찾아다녔다. 태국경찰에 잡혀야 남한 국정원 쪽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마약범들이 있는 태국 감옥에서 또 몇 개월간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태국 음식이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도 없이 거의 맨 물에 밥 말아 먹으며 딸이 보내준 돈으로 고추장 등을 사서는 그걸 찍어먹으며 버텼다. 남한 국정원 쪽으로 와서야 비로소 살 것 같았다.

 

영화 같은 나라도 있구나, 화려함에 놀라

북에서 남한국민 깡통 차고 있는줄 알아

버스카드 찍을 줄 몰라 종점 갔다 오기도

마음 따듯한 사람 많아…후회한 적 없어

 

▶처음 남한을 접한 소감은 어땠는지.

중국에 처음 갔을 때도 뭐 이런 영화 같은 곳이 다 있나 싶었는데, 남한에서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 천지였다. 너무 화려해서 꼭 영화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북에서 배울 때는 남한 사람들은 깡통 차고 빌어먹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잘 살고 전기도 많이 들어오고….

▶정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남한에 이미 정착해있던 딸이 있어 그나마 수월했지만, 워낙 발전되고 놀라운 것들 천지라 처음엔 환경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한 번은 회사 면접을 보려고 버스를 탔는데 초인종 누르는 걸 몰라서 내리지 못한 채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되짚어 간 적도 있다. ATM기계에서 돈 뽑는 것도 신기했고, 은행가서 번호표 뽑는 것을 몰라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다행히 마음 좋은 남한사람들이 많아 정착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구두 수선하러 온 손님들 중에도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거스름돈도 안 받고 가시는 분들도 계신다. 남한에 오기를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탈북민 대다수가 이곳에서 죄 지은 거면 모를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만나서 구두수선과 열쇠기술 배워

배우겠다는 탈북민에게 언제든 기술전수

딸은 대학 다니고, 아들 전기 관련 일해

돈 모아 생사 모르는 둘째 딸 찾고 싶어

 

▶현 사업장을 운영하게 된 계기는.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부터다. 4년 전에 남편을 알게 됐는데, 당시 나는 송도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구두도 수선하고, 열쇠도 만드는 일을 했다. 우리 회사는 퇴근이 보통 4시였는데, 그 일 끝나면 남편한테서 와 매일 앉아 지켜보며 기술을 배웠다.

평일엔 회사 다니고, 주말엔 알바를 하고, 나머지 시간엔 기술을 배우는 바쁜 시간이었다. 이후 나도 남편처럼 가게를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해 지금의 인천 논현에서 이 일을 하게 됐다. 매출은 하루평균 이십만 원 정도 된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딸은 대학 다니고, 아들은 인력개발원을 졸업하고 전기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아들, 딸은 걱정을 안 한다. 그러나 돈을 벌면 중국에 있을 둘째 딸을 찾고 싶다. 또 북한에 있는 형제들도 데려오고 싶다. 또 저처럼 기술을 배우고픈 탈북민이 있다면, 기술 전수도 해주고 싶다.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정착을 잘하면 그게 바로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되면 북에 공장도 세울 수 있고, 북한 사람들도 일하고 돈 벌고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다. 통일 되는 게 당장 어렵다면 노동자, 농민은 이리로 다 넘어왔으면 좋겠다.

 

탈북 병사 뉴스 보며 울기도 많이 울어

생명 구하느라 혼신 다한 교수에게 감사

남한정착 잘하는 건 통일에 기여하는 것

통일되어 고향 땅 밟을 날 오기를 기대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탈북병사 생명을 살려준 ‘이국종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요즘은 날마다 탈북 한 북한 병사 소식이 나오는 뉴스를 찾아보곤 했다. 그 사람이 오죽하면 왔겠는가 싶어서 텔레비전 보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같은 탈북민으로서 그 병사를 살려준 이국종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이국종 교수가 회충 얘기도 했는데, 그런 얘기가 알려져야 처음 남한에 온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회충 검사도 하고, 약도 주고 관리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저도 2012년 위액 검사를 하면서 실지렁이 같은 버러지들이 속에 있는 걸 알았다. 이후 꼬박꼬박 회충약을 먹었는데 2년이 지나서야 겨우 없어질 정도였다.

아직도 우리들의 삶은 고되다. 그러나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안보였던 북한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다. 모두가 내가 할 탓이라고 생각하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윤진석 기자 38tong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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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14 [15:5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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