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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정착 과정 통해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것 체감
[인터뷰] 인천환경공단 청라사업소 최광일 주임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7/12/21 [14:44]

인천환경공단 청라사업소 최광일(34)주임의 걸음이 분주하다. 북한군대에서 10년 있다가 중국을 거쳐 남한에 온 것은 2011년. 한 마디로 광폭행보였다. 전국 건설현장을 누비며 거침없이 돈을 벌던 때를 지나 ‘기술’이라는 것을 배우러 폴리텍대학의 문을 두드린 시절은 남한정착과정에 있어 희망의 디딤돌이 되어 준 터닝 포인트 시기였다.

이후 숱한 지원 끝에 지금의 공단에 근무하게 된 그는 배움을 향한 나래를 멈추지 않고 있다. 기계기술 관련 고려사이버대 졸업 및 에너지관리기사 취득부터 8급으로의 승진, 인하공대 대학원 합격통지서를 이제 막 받았다며 상기되어 있다. 훗날 박사과정을 밟아 환경에너지 분야의 전문성을 더욱 높이고 싶다며 야무진 포부를 밝힌다.

그는 열심히 사는 것이 곧 남북통일을 앞당기고, 통일 후를 준비하는 탈북민으로서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다. 남한 정착 과정을 통해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는 걸 체감했기에 초심을 지키며 자기계발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최광일 주임을 만나 정착사례의 일면을 들어봤다.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하게 된 계기는.

고향은 청진이다. 군 생활을 십년간 했다. 17살에 입대해 2009년도 제대했다. 부대가 있던 함경도서부터 청진 집까지 꼬박 5일 걸렸다. 이틀 분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는데 나중엔 거의 굶다시피 왔다. 그렇게 온 집이었건만, 설레는 맘으로 대문을 두드리니 전혀 모르는 딴 사람이 나왔다. 알고 보니 그 해 봄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신 거였다.

억장이 무너져 술 한 병 들고 부모님 산소를 찾아 종일 울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청춘을 받쳐 조국을 위해 나라를 지켰는데, 부모님 돌아가신 것도 몰랐고, 집은 이미 처분됐지, 밥 한 그릇 해줄 분 없었고 쉴 공간조차 없었다. 나름 모범 군인으로 만기 채워 대학교 추천서도 받고 입당도 하게 돼 고향에 돌아오면 당 간부도 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살 줄 알았는데 한순간 모든 꿈이 물거품 됐다.

옆집 할머니 집에 삼 일간 신세지다 생각해낸 게 중국 국경인 해산에 계신 친척을 찾아가는 거였다. 그곳서 3개 월 정도 있다가 중국 가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했다. 처음엔 한 이삼년 벌다 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겨울이었는데 브로커 도움 없이 산을 탔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삼일 간을 헤맸다. 정신력으로 버틴 셈인데 다행히 인가가 보여 왔다. 농사를 짓는 중국 분이었는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 말하니 밥을 줬고, 밥값을 해야 하니 농사일을 거들었다.

▶남한은 어떻게 오게 됐나.

중국서 일하며 남한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부터다. 처음 만난 중국분이 제가 농사일 돕는 걸 보고는 친척 중 조선족 사람이 있다며 소개해주었다. 한 달여 식당에서 일한 뒤 중국 텐진에 있는 남한과 거래 중인 식품도매업의 배달 일을 소개받았다. 당시 남한에 대해 남조선이란 말은 알아도, 한국이란 말 자체를 몰랐다. 함께 일하는 분들이 한국서 돈 벌고 온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한국이 엄청 잘 사는 나라란 걸 그분들 통해 알았다. 이후 한국드라마TV, KBS 한민족방송 라디오 등을 접하며 푹 빠져 살았고,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그럴수록 무서움도 컸다.

북한에 있을 땐 몰랐는데, 세상에 나와 북한이 어떤 나란지 알게 된 터라, 북송되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걸 알기에 두려움이 커져간 것이다. 밤에는 칼을 머리맡 등 5개를 두고 잘 정도였다. 매순간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 일하고 돈을 모아, 브로커를 통해 2011년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십년 만에 군 제대해 고향 집 갔더니

부모님 돌아가시고, 살 곳마저 없어져

술 병 들고 산소 앞에서 온종일 울어

삼일 꼬박 산타고, 눈밭 헤치며 탈북

 

▶초기 남한 정착과정이 궁금하다.

하나원서 공부를 많이 했다. 지금도 노트를 보관하고 있는데, 당시 강의를 들으면서 항시 메모했다. 무엇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응 계획에 대해 기록했다. 덕분에 하나원 졸업 시험 때는 80명 남자 기수 중 일등을 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사회에 나오니 실제 남한사회는 너무 낯설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망망대해 표류하며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진 것처럼 앞이 캄캄했다. 정보가 넘치는 사회에 파묻히다보니 하나원에서 취업정보를 알려준다는 그 단순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벼룩시장을 뒤적였는데, 하루 일당 7,8만원 광고가 있어 전화했더니 인력사무소였다. 첫차 타고 새벽 5시에 가면, 오는 순서대로 일자리를 줬고, 일마치고 사무실로 되돌아 그날 치 일당을 받아갔다.

한 달 후쯤 한 곳의 사장님이 인력사무소 거치지 말고 여기서 일해 볼 생각 없냐. 수수료 없이 2만원 더 준다고 했다. 인테리어 현장의 철거반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집 짓고 땅 파기 등을 해서인지 적성에 맞았다. 그땐 돈을 많이 받았다.

최고 많이 받을 때가 18~20만원이었다. 한 달에 못해도 500,600은 벌었다. 덕분에 한국 오느라 브로커들에게 일부 빚진 돈도 털어낼 수 있었고, 북에 있는 친지한테도 생활비를 보내줄 수 있었다.

 

하나원 졸업시험서 남자기수 중 1등

막상 사회 나오니 망망대해 표류 심정

건설 철거작업서 돈 버는 재미 느끼기도

기술배우란 조언 듣고 폴리텍대학 입학

 

▶건설현장에 있다가 기술 업에 종사하게 된 배경은.

일 년간 건설현장에서 만난 형님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저 같은 탈북자, 중국동포, 외국인노동자 외에도 회사가 부도나서 일자리 구할 데가 없어 오신 분, 주식하다 빚 져서 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건설 현장서 일했다. 여러 동료들과의 술자리서 인생 얘기하다 자주 듣는 얘기가 ‘젊을 때 기술을 배웠으면…’ ‘기술 하나 있으면 먹고사는데…’ 등의 아쉬움을 내비친 토로들이었다. 저에게도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리니 젊었을 때 배워라’ ‘기술 하나면 정년이 없다. 늙어죽을 때까지 돈 벌 수 있다’ 그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하나센터 통해 상담 받은 것이 기억났다. 곧장 남북하나재단에 전화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한국폴리텍대학에 대해 듣게 됐고, 무작정 학교를 찾아갔다. 지금이야 전기 용접 등 다양한 종류의 기술이 있는 걸 알지만, 첨엔 기술이라면 한 가지 기술인줄 알았다. 총무과 가서 기술 배워달라고 하니, 어떤 기술을 배우고 싶은지 물어오는 것이었다. 어떤 기술이 있나요? 되물으니 ‘우리 학과에만 해도 15개 있다’ 는 거였다.

15개과 교수님을 다 만나 설명을 들었다. 교수님들께서 친절히 알려주셨지만, 기본지식이 없으니 듣고 나서 더 캄캄해졌다. 그때 생각나는 분이 한 분 계셨다. 교수님, 저 왔다고 하니까 따스하게 손잡아주시고, 커피 타주시고, 가족은 있냐고 물어봐주시고…. 나도 모르게 서럽고 외로운 마음이 절로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아 이 교수님이구나, 여기로 가야되는구나. 그래서 택한 과가 응용기계설비학과였다.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첫 대학생활은 어땠었나?

“막막 그 자체였다. 택한 학과가 컴퓨터 안에다 시뮬레이션 하고 이런 건데,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다. 북에 있을 때 군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긴 했지만, 영어는 하나원에서 겨우 알파벳을 뗀 정도였다. 컴퓨터 문외한이었던 나로서는 8시간 앉아있는 수업시간이 외계어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큼 곤욕이었다. 엉덩이는 또 얼마나 배기는지, 열흘 노가다 뛴 것보다 한 시간 수업 듣는 게 더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기술을 배워보겠다는 초심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후회가 밀려왔다. 오늘만 다니고 안 간다고 반복했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무슨 생각인지 학교에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웃음) 그러다 건설현장 나가면 18만 원까지 벌 수 있는데 그 돈 버리며 공부하는 건데, 이러면 안 되겠다며 정신을 다잡았다. 나중에 다른 길 찾더라도 후회남기지 않도록 제대로 열심히 해보자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후 교과서 내용을 알든 모르든 스무 번씩 끊임없이 읽었다. 배웠던 과목을 다시 읽고, 모르면 교수님께 찾아가 다시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밤 12시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다가 막차 타고 집으로 오기 일쑤였다. 탈북민이어서 등록금은 무료이고 기초생활수급비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해 예전 일하던 건설 철거 현장에서 금, 토, 일 야간 일을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학과 생활 중 보람된 일이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맘 터놓고 지내는 동기들이 생긴 것과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그리고 국토순례를 했을 때다. 반에서는 세 번째로 나이가 많았고, 대부분 저보다 10살 어린 학생들이었다.

첫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강원도에서 왔다고 속일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솔직하게 북한에서 왔고 군에서 10년간 있었다고 했더니, 북적거리던 교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때의 무거운 정적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약속이나 한 듯 저하고 눈을 마주치려는 애들이 없었고, 앉아있으면 곁을 안 줬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동기들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때마다 고맙다며 밥이나, 커피, 우유, 빵 등을 사줬다. 처음엔 불안감을 안고 쭈뼛쭈뼛 가르쳐주던 친구들도 차츰 마음을 열고 형, 북한 군대는 어때요, 등 호기심을 갖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성실히 알려줬고, 정말 많이 친해졌다.

점점 도면이 보이기 시작하며 공부도 가시적으로 성과가 드러났다. 중간·기말고사 때는 도서관에서 밤새고, 다음날 식당에서 2,300원짜리 밥을 사먹었다. 최선을 다해 시험을 봤지만 성적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중하 정도의 위치였다. 이후 졸업 할 때는 4.0으로 졸업했다. 교수님들이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게 보이니까 성적을 잘 주신 게 아닌가 싶다.

18박 19일간 국내 여행을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부산부터 여수 목포 청주, 구미 울산, 경기도, 춘천 등 전국을 누볐다. 학교,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오가다 여행을 통해 남한사회는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각자의 위치에서 정말 열심히 살고 있구나 실감했다. 한국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고, 힐링도 되고 에너지도 충족됐다. 나중엔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국토순례도 했다.

 

오리엔테이션 때 북에서 왔다니 순간 정적

눈 마주치는 학생 없을 만큼 첨엔 어려워해

공부 결심 후 교수님, 동기들에 도움 구하고

수십 번 교재 읽고 배워 4.0으로 졸업‘뿌듯’

 

▶자격증 취득부터 공단 취업 도전기도 듣고 싶다.

과 동기 중 두 살 위의 형이 있었다. 직장 그만두고 다시금 학교를 다니는 분이었다. 형님은 토, 일에도 학교 나와서 공부하고, 프로젝트 연구하고 정말 열심이었다. 많이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학년 되면서 형님이 자격증을 준비하는 거였다. 기술 가진 사람은 기술자격증을 필수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때 처음 자격증을 따야 하는 걸 알았다. 문제풀이를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본 결과 기계설계산업기사 등 일 년 새 딸 수 있는 자격증을 다 취득했다.

2학년 1학기 끝나면서 과 학생들이 취업준비에 돌입했다. 2013년도 하반기였는데 공채가 시작됐다. 온라인 구직사이트를 통해 기계 관련 직종은 200군데 넣었는데 전화가 엄청 많이 왔다. 면접 볼 때 솔직한 소견을 얘기하면 된다고 해서 ‘돈 많이 주면 열심히 다니겠다.’ ‘돈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오직 돈만 보고 다니겠다며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정말 합격되는 줄 알았다. 취직이 어렵다더니, 어려운 게 없네! 라며 의기양양했다.

▶결과는 어땠나, 합격한 곳이 있었나.

한 군데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동기들은 삼성, 대우 등 대기업 중견기업 등에 많이들 취직이 됐다. 학교에 가면 어느 날은 세 명, 또 어느 날은 다섯 명의 자리가 없어졌다. 위기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자기소개서를 다시 썼다. 진솔하게 나는 탈북민이고, 그동안 무엇을 배웠고 회사 가서도 열정을 다해 일할 것이라고 썼다. 또 교회 지인의 도움을 받아 면접컨설팅도 받았다. 그분이 뽑아준 예상 질문 10개에 대해 나만의 스토리가 담긴 답변을 만들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몸동작 등 제스처를 익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50대 1의 경쟁률이었던 지금의 공단에 합격하게 됐다. 10년 이상 경력자, 4년제 대학 졸업 등 쟁쟁한 분들이 오셔서 풋내기인 저로서는 명함도 못 내밀고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러자 오히려 부담감이 없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 준비한 것만 보여주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헌데 연락이 왔다. 공단도 합격하고, 현대중공업에서도 연락이 왔다. 잠시 고민하다 이미 정든 정착지를 떠나 너무 먼 울산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공단 취업 당시는 대한민국 온 지 정확히 2년 8개월째였다. 생각해보면 중국서든 남한에서든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려고 하는 분들을 잘 만난 것 같다. 또 작년에는 폴리텍대학 이사장님이 국회서 의원들과 함께 남북한 통일시대 준비를 위한 탈북민 직업훈련 세미나를 하셨는데, 그곳에 초청 돼 어떻게 공부했는지 등을 소개하는 의미 있는 시간도 가졌다.

 

남한정착 2년8개월 만에 공단에 입사

대학원 진학 등 배움의 길 쉴 수 없어

통일되면 학교서 기술 가르치고 싶어

라면 맛 전해준다면 변화 앞당겨질 것

 

▶앞으로의 계획과 꿈이 듣고 싶다.

일의 전문성을 더해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싶다. 입사하고 일 년 후 고려사이버대학교 기계기술과에 편입해 올 2월 졸업했다. 기사시험도 봐서 에너지관리기사를 취득했다. 이 점이 인사고과에 반영돼 9급에서 8급으로 진급했다. 우연찮게 인터뷰하는 날, 대학원 합격통지를 받아 기쁜 마음이다. 막 발표가 났는데 인하공대 석사과정에 합격했다.

통일은 어느 순간에 올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우리한테 올는지 모른다. 훗날 통일이 되면 우리가 할 일이 많고 감당해야 할 것이 엄청 많을 텐데, 기회는 준비된 사람한테 온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공부해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현장에서 실무 경험을 더 쌓고 싶다. 폴리텍대학 같은 직업전문학교가 북에 생기면, 북한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그런 역할이 오지 않을까, 그런 사명감으로 초심을 잊지 않고 열심히 연마하고 싶다.

▶북한주민들에게 특히 소개하고픈 것이 있나?

“한국의 라면 맛을 알려주고 싶다. 돈 대신 라면을 보내주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으로 생각한다. 한 장의 삐라보다 라면봉지 하나가 큰 효과를 줄 것이다. 쌀 같은 경우는 어디서 온 건지 출처를 감추기 쉽지만, 라면은 봉지 안에 스프도 있어 한국라면임을 모르게 감추려 해도 어떤 식으로도 알려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봉지가 귀해 다 먹고 남은 봉지는 버리지 않고 담배도 말아 넣고, 여성들은 소지품을 넣어 다니기도 할 것이다.

겨울에 뜨끈뜨끈한 국물을 먹으면 얼마나 좋나. 특히 북한 군인들한테 먹이고 싶다. 위까지 들어가는 그 맛을 잊지 못해 탈영할는지도 모른다. 북한의 모든 사람들이 남한의 라면 맛을 알면 변화는 앞당겨질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덧붙이거나 강조하고 싶은 말은.

최근 최전방에 있던 병사가 탈북 했다. 최전방에 있는 군인이라면 북한에서 최고급 대우를 받는 군인임을 뜻한다. 출신성분이 좋은 엘리트들을 뽑는데 제대하면 무조건 당 간부 할 확률이 많다. 그곳 병사가 탈북 한 것이니, 어찌 보면 빨리 깬 것이다. 큰 댐도 자그만 실금 등이 보이면서 균열되고 무너지듯이 북한주민들을 중심으로 북한사회도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많이 바뀌었다.

남조선은 남조선인가보다 하는 시대가 아니다. 저를 비롯해 이곳에 온 탈북민이라면 죄책감도 없지 않아 있을 게다. 북에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이렇게 맛있는 거 먹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 때 마음이 아파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리텍대학 다닐 때 2500원짜리 밥과 3500원짜리 돈까스 중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 적도 많다. 북한 사람들도 이곳처럼 맛난 거 많이 먹을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을 바라고 꿈꾼다.

윤진석 기자 38tong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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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21 [14:44]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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