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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통치방식 마땅치 않게 여긴 측근들 불만 ‘배경’
[북한실체를 밝힌다] ‘심화조’ 사건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3/08 [15:31]

<김형수 객원기자>

1966년 10월 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와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은 갑산파를 숙청하고 세습 권력의 토대를 구축했다. 당시 동유럽사회주의 지원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으며, 이러한 경제성장은 김일성의 독재를 미화하고 묵인하는 기회로 악용됐다.

 

고위층 겨냥…간부들 사리사욕에 혈안

 

19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로 북한의 경제도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더욱이 1994년 김일성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최악의 위기에 몰렸다.

체제 붕괴냐 권력 유지냐를 판가름하는 갈림길에서 김정일에겐 인민의 생명재산, 조국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었다.

수백만 인민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는 그때 김정일은 ‘금수산기념궁전’을 새로 단장하는데 수억 달러를 탕진했다.

한쪽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에 보기 드문 인간 대학살을 전국의 곳곳에서 자행했다. 1990년대 김정일의 공포정치는 크게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먼저 사망한 김일성 측근들의 숙청이었다.

이는 북한의 공식적인 문건들에서 ‘채문덕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나 간부들 속에서는 ‘심화조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심화조 사건’이 고위층들을 겨냥했다면 인민군 보위사령부 검열은 북한의 중간급 지방 간부들을 겨냥했다.

마지막으로 김정일이 1995년 4월 당시의 사회안전부, 지금의 인민보안성(경찰)에 내린 지시에 의한 민간인 대학살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사회안전부가 올린 보고서를 접하고 ‘이젠 온 나라에 총소리를 울릴 때가 됐다’는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995년 5월 초부터 북한 전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개처형이 시작됐다. 처형된 주민들은 대체로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동으로 된 전화선을 자르거나 협동농장의 소를 잡아먹은 사람들이었다.

1995년 9월 3일 양강도 혜산시 연봉2동 채석장에서 협동농장의 소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는 죄로 검산 협동농장의 청년 세 명이 공개처형을 당했다.

소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세 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잃을 때 지방 간부들은 사리사욕에 혈안이 되었다. 처음엔 중국에서 들여오는 식량을 빼돌려 돈벌이를 하다가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 활발해지자 그 범위도 크게 확대됐다.

중간급 간부들의 부정부패로 가뜩이나 굶주린 북한주민들의 삶이 더 악화되고 그로 인한 분노는 고스란히 김정일 정권을 향했다. 중간급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두면 분노한 인민들에 의해 김정일의 권력이 붕괴될 우려도 높아졌다.

‘심화조 사건’으로 인민들이 공포에 떨던 그 시각 당시의 인민군 보위사령부, 현 북한의 인민군 보위부가 남포시를 검열했다는 소식이 전국을 강타했다. 남포시를 휩쓴 보위사령부의 다음 표적이 자강도라는 소문도 함께 번졌다.

당시 자강도당 책임비서였던 연형묵이 보위사령부의 검열소식을 듣고 김정일에게 자강도에 대한 검열을 자청했다는 소문이었다. 남포시 검열을 통해 보위사령부는 11명의 간부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수많은 간부들을 비공개로 처형했다.

 

수많은 간부들 공개·비공개로 처형

 

보위사령부의 다음번 표적이 자강도라는 소식에 양강도의 간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강도를 검열할 동안이면 그동안 저지른 범죄의 흔적을 덮어버리기에 충분하다는 타산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보위사령부의 표적이 바뀌었다. 김정일의 지시로 보위사령부가 자강도가 아닌 양강도를 검열한다는 소식이었다. 양강도 간부들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1999년 1월 보위사령부 선발대가 양강도에 발을 들이밀면서 간부들과 주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는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과 함께 북한의 3대 정보기관, 사찰기관에 속한다. 초기 인민군 보위국으로 출발했는데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보위사령부로 승격시켜 인민군 내부만이 아닌 민간도 함께 감시하도록 했다. ‘선군혁명’의 구호를 든 김정일 정권에서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위세는 그 어떤 사법기관보다 막강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북한 간부들과 인민들 속에서 더욱 악명을 떨친 건 그 잔혹한 고문수법과 상상을 초월하는 처형방식 때문이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은 무법천지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양강도에서 공개처형 한 간부들과 주민들은 모두 4차례에 걸쳐 19명이었다. 이외에 비공개로 처형된 간부들과 주민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중엔 부관 참시된 인물들도 있었다.

양강도 혜산시 성후동에서 밀수를 전문으로 하던 31살의 김호철, 일명 호빼로 불리던 인물은 고문에 의해 혜산 냉동 창고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보위사령부는 사망한 김호철을 주민들이 가득 모인 혜산비행장에서 총살하는 놀음까지 벌렸다.

가장 많게는 1998년 5월 혜산비행장에서 11명의 간부들과 주민들을 집단 처형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앞서 혜산시 위연지구 ‘위연중학교’ 앞 공지에서 4명을 총살했다. 그중 한명은 아편을 팔아먹은 의사였고 나머지 3명은 아편중독자였다.

또 양강도 대오시천에서 ‘지주’로 불리던 김창국을 공개 처형했고 양강도 보천군에서는 아편을 복용한 혐의로 세 명의 주민들을 공개처형했다. 처형자들의 가슴엔 하나같이 이름과 죄명을 먹으로 크게 새긴 종이팻말들을 걸고 있었다.

처형장 뒤편엔 인민들을 향해 기관총을 걸어 놓은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았다. 보통 북한의 공개 처형방식은 처형자들의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가슴과 다리, 몸에 각각 세 발씩 모두 9발의 총탄을 발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대가 처형하는 방식은 9발의 총탄을 모두 사람의 머리에 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잔인하기 그지없는 처형방식은 ‘머리가 썩은 자들은 그 대갈통부터 날려버려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화조 사건’의 배경에는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마땅치 않게 여긴 김일성 측근들의 불만이 있었다. 반면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동원해 지방의 간부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이면에는 김정일을 향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의 분노가 배경이 됐다.

김정일의 잘못된 정치를 중간층 간부들의 잘못으로 덮어씌우기 위한 술책이었다. 평양시는 호위사령부가 지키고 있어 인민들의 저항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으나 지방은 호위사령부와 같이 인민들의 저항을 막을 만한 병력이 따로 없었다.

이러한 원인도 지방 인민들의 저항을 두려워 한 김정일에게 보위사령부를 개입시킨 계기로 되었다. 실제로 ‘고난의 행군’시기 북한은 무법천지였다. 하지만 김정일은 인민들의 저항을 두려워하면서도 중요한 한 가지를 방관하고 있었다. 당시 굶주린 북한의 인민들에겐 들고 일어날 여력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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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08 [15:3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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