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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
어수선한 시국 황장엽 국제담당비서 비롯/해외에 파견되었던 간부·외교일꾼들 망명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3/15 [15:31]

<김형수 객원기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995년 5월초부터 전역에서 간부들과 주민들을 상대로 한 대대적인 공개처형이 시작됐다. 그중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간부들을 고문하는 방식과 처형하는 형식에서 잔인하기로 비교할 데가 없었다.

 

사회 전반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

 

김정일이 이렇게 위기를 감수하면서 북한의 수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것은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당시 북한 내부에서 있었던 복잡한 사건들도 대량학살을 초래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은 동유럽 붕괴에 따른 경제난,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과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재해, 김정일의 무능에서 비롯됐다. ‘고난의 행군’ 직전 북한은 푸룬제 명칭 러시아 군사학교 졸업생들이 군사정변을 모의한 사건으로 내부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타고 1995년 초 함경북도 주둔 인민군 6군단 사건까지 발생했다.

6군단 사건은 사단참모부가 행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월권행위였을 뿐 김정일을 반대하는 군사정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민군 보위국의 검열을 통해 6군단 사건은 반란사건으로 요란하게 변신했다.

6군단 사건을 조작한 인민군 보위국에 김정일은 보위사령부라는 명칭을 부여해 주었다. 1995년 ‘고난의 행군’ 초기 상황은 김정일에게 무언가 사건을 고의적으로 조작해서라도 인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려세워야 할 만큼 다급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보위사령부를 인민군 내부는 물론 사회전반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당시 김정일은 “간부들 속에서 일상화 된 부패타락과 패배주의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첫 보위사령부 사령관은 6군단 사건을 조작해낸 원응희였다.

보위사령부로 승격되고 나서 원응희가 가장 먼저 손을 댄 인물이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었던 리봉원이었다. 리봉원은 인민군 고위간부들 숙청으로 유명한 자였다.

당시 리봉원은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김명국이 김정일의 큰 신임을 얻고 있는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명국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음을 알아 챈 리봉원은 정치사상 학습을 게을리 하였다는 구실을 붙여 김명국을 해임하려 했다.

이는 먹잇감을 찾아 헤매던 보위사령관 원응희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보위사령관 원응희는 즉각 리봉원을 체포했다. 김정일이 신임하는 유능한 군사지휘관을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제 멋대로 처리하려 했다는 구실이었다.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죄행 성토

 

초기 리봉원의 죄행 역시 월권행위였으나 보위사령부의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간첩사건으로 비화했다. 리봉원이 한국 안기부가 심어놓은 고정간첩이고 그가 김정은 정권을 뒤집어엎기 위해 심어놓은 첩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었다.

리봉원의 여독을 청산한다며 보위사령부는 인민군 총정치국과 군부대 장성 60여 명을 체포, 구금, 처형했다. 이러한 시기에 일명 ‘송림시 사건’이라고 불리는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과격행위가 발생해 김정일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배급이 끊기자 황해제철소 노동자들 속에서 아사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공장 간부들은 당위원회와 합의하여 군수물자로 보관하고 있던 강철의 일부를 해외에 수출해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했다. 김정일은 당에 보고하지 않고 군수물자를 마음대로 처리했다며 황해제철소 간부들을 국가반역자로 몰아붙였다.

김정일의 지시로 사회안전부가 공장 부지배인과 판매과장 심지어 옛 김일성의 개인 간호사까지 9명을 노동자들 앞에서 처형했다.

이에 제철소 마당에 모인 노동자들은 공장 간부들을 반역자로 처형한 사회안전부의 죄행을 성토하며 해당 관계자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사회안전부와 국가안전보위부(국가보위성)가 나섰지만 성난 노동자들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바빠 맞은 김정일은 황해북도 송림시에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파견해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과격행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는 모여 있던 노동자들이 잠이 든 새벽 4시에 제철소 마당으로 탱크를 들이밀었다.

탱크 앞에서 노동자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보위사령부는 단지 제철소 마당에 있었다는 이유로, 김정일이 아닌 사회안전부 간부들의 처벌을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탱크를 들이 밀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갰다.

이렇듯 어수선한 시국에 황장엽 국제담당 비서를 비롯해 해외에 파견되었던 북한 고위급 간부들과 외교일꾼들의 망명이 줄을 이었다. 권력을 지키려는 김정일이 보위사령부와 같은 조직을 내세워 인민대학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이다.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무자비

 

김정일이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동원해 북한의 중간급 간부들을 검열하고 처벌하도록 한데는 지방 간부들의 도를 넘는 타락과 부패행위도 분명히 있었다. 지방 간부들의 타락과 부정부패는 ‘고난의 행군’을 맞으며 더욱 악화되었다.

만약 부의 원천이 될 만한 무언가가 없다면 아무리 날고뛰는 북한의 간부라 할지라도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간부들이 부를 축적할 수단이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물자들이었다.

고위급 간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지방의 중간급 간부들도 북한 인민들에게 보낸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물자들을 노골적으로 빼돌려 장마당을 통해 부를 축적해 나갔다. 김정일은 이를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검열을 통해 김정일은 자신의 정치가 옳았지만 부패 타락한 중간급 간부들이 지시 집행을 그릇되게 해 나라의 경제를 파탄 낸 것처럼 위장했던 것이다.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무자비했다.

당시 북한에서는 “보위사령부라는 말만 꺼내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99년 양강도에 대한 보위사령부의 검열은 당시 도당 책임비서였던 이수길이 김정일에게 보낸 제의서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노동당 중앙위에서 부부장, 자강도당 책임비서를 지내다가 1998년 8월에 양강도당 책임비서로 부임되어 내려온 이수길이 1999년 1월에 김정일에게 “혜산시가 완전 자본주의화 되었으니 대책이 필요하다”는 제의서를 만들어 보냈다.

김정일은 국경지역인 양강도가 보위사령부 검열의 가장 적중한 대상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김정일은 1999년 2월 인민군 보위사령부가 직접 양강도에 내려가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대학살의 정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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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15 [15:3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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