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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통일동지들에 평생 못 갚을 큰 사랑을 받았다”
[인터뷰] 암 투병 이겨내고 6월 신간 발간하는 김성민 자유북한방송대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5/03 [16:02]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서울M병원에서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달음에 달려간 M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운 김 대표를 보았다. 창가에는 탈북단체장 등 여러 지인들 명의의‘빠른 쾌유를 바랍니다’는 문구가 적힌 꽃바구니가 보였다.

몇 주 뒤, 회복치료중인 김성민 대표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또다시 놀랐다. 의학적으로 폐암 4기이면 말기이다.

일상에서 암과 관련해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도 폐암 4기이면 90%가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한 해가 지난 지금 김성민 대표는 건재하다. 어쩌면 ‘기적’이란 말은 이때 쓰라고 생긴 표현이 아닐까 한다. 신비에 가까울 정도의 놀라운 그 사연을 취재했다.

▶처음 발병을 어떻게 알았나?

2017년 3월 중순, 한 달 뒤 미국에서 있을 ‘제14회 자유북한주간’ 행사준비로 무척 바빴다. 워싱턴과 시차 때문에 새벽 4시 사무실로 나와 업무를 보았다. 그 와중에 어느 날 PC에서 쓰는 글(문자)이 조합 안 되는 걸 보고 다소 놀랐다. ‘이게 뭐지? 내가 피곤했나?’ 하고 넘겼다. 며칠 뒤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어 동네병원에 가서 CT를 찍었다. 뇌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고 이후 대학병원인 서울M병원에 갔다. 여기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뇌종양(암) 판정이 나왔다.

▶폐암 진단 4기는 무슨 소리인가?

3주간 M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에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그게 일주일 뒤에 나왔다. 폐에서 암이 시작되어 뇌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암에서 이전된 암은 치료가능성이 매우 낮고 환자의 생존확률이 10~15%라고 했다.

담당의사는 “치료 타이밍을 놓쳤다. 암 치료를 받는 도중에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그냥 남은 시간동안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가고 싶은 곳 다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 순간 앞이 캄캄했고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눈에서 불이 났다. 그는 직업의 특성상 많은 환자들을 상대하고 치료하는 전문 의사이다. 허나 내 입장에서 보면 주변의 여러 사람들 중에 ‘너는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극도의 증오심이 생겨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지만 두 눈을 꾹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누구였나?

황장엽 선생이다. 나의 정치적 생명의 스승이신 분이다. 황 선생이 생전에 못 다한 북한민주화를 필생의 사명으로 간직하고 그 완성을 위해 탈북민들과 함께 가자고 했던 통일의 길을 나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 비통했다.

15년간 자유북한방송 직원을 거쳐 간 50여 명 탈북민들의 얼굴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갔다. 또한 북한에서 고통 속에 사는 우리 형제들이 떠올랐으니,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다음날 의사에게 ‘항암치료 받겠다’고 했다.

대부분 암 환자의 식사는 링거로 영양제를 맞는 것으로 대체한다. 링거를 한 번 맞으면 1주일가량 버틴다. 구역질이 너무 심해 다른 음식은 전혀 입에 대지도 못한다. 어느 탈북민이 자기 경험으로 생밤과 인절미를 먹었다고 해서 나도 따라했는데 그중 생밤을 갈아서 쓴 죽은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그분께 고맙다.

▶생명의 은인 의사는 누군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조병철 교수의사다. 마침 그가 참여하는 본 병원과 미국의료연구원이 공동으로 임상실험 및 연구 프로젝트가 있었다. 날보고 거기에 응해보라고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의했다. 이후 조병철 교수는 “살 수 있다. 약이 많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진짜 비싼 항암제인데 500cc가 천만 원이 넘는다. 다행히 보험처리가 되어 수십만 원 정도, 3주에 1회씩 지금까지 모두 11대 맞았고 계속 맞아야 한다.

 

암이란 진단 받고 황장엽 선생 떠올라

정치적 생명 스승이 못 다한 북한민주화

필생의 사명으로 간직하고 그 완성 위해

탈북민들과 함께 가려 했던 통일의 길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에 비통함 들어

 

15년간 자유북한방송을 거쳐 간 50여명

탈북민들의 얼굴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가

북한에서 고통 속에 사는 형제들 떠올라

‘살아야겠다’는 결심하고 항암치료 받아

 

▶투병 중 국회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어쩌겠는가? 현재 시국을 보면 내 눈에는 기가 막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김정은이 백기를 들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이 절묘한 순간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니 말이다. 물론 평화도 화해도 중요하다. 그러나 김정은 독재자 발굽 밑에서 숨죽이며 짐승처럼 살아가는 2천만 동포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문 대통령의 철학 ‘사람이 먼저다’는 남한사람도 북한사람도 사람이란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김성민 대표는 1962년 6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났고 이후 평양에서 살았다. 부친은 김일성종합대학의 첫 문학창작 지도교수이면서 1958년까지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시인 김순석 선생이다. ‘벼 가을하러 갈 때’ ‘황금의 땅’ 등 3천여 편의 시를 쓴 북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김 대표는 1978년 인민군에 입대하여 4군단 28사단에서 복무했다. 1988년에 군(軍)위탁생으로 평양의 김형직사범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하고 1992년 620훈련소 예술선전대 작가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1996년까지 복무하였으며 최종계급은 대위였다. 비교적 빠르게 진급했는데 그만큼 당과 수령에게 충성했다.

그는 인민군 병사생활 10년간 대북 삐라를 자주 접했다. 그로해서 세상의 진실을 알고 나니 김정일 독재정권에서 자신은 한갓 노예이고 벌레나 마찬가지임을 깨달았다. 하여 1996년 가을 부대를 탈영하여 중국으로 밀입국했다. 이듬해 2월 체포, 평양으로 압송 중 탈출하여 중국에서 3년 고생 끝에 1999년 남한으로 왔다.

▶서울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석사공부를 하였다. 이후 황장엽 선생의 요청으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회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가장 잘한 것은 생전에 황장엽 선생을 곁에서 보좌해드린 일이다.

자유북한방송은 탈북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2004년에 개국했다. 목적은 2천만 인민에게 남한의 소식을 사실대로 알려주고 수령의 독재정치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함이다. 기자,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직원 7명이 모두 탈북민이다.

▶많은 시련을 겪은 줄 안다.

솔직히 말해 우리 탈북민들이 무슨 돈이 있겠나? 한때 미국의 NED(민주주의진흥재단)를 통해 지급되는 연방정부의 지원금,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을 다소 받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종교단체의 기부금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2008년 국경 없는 기자회 매체상, 2009년 대만민주화기금 아시아민주인권상을 수상했다. 국내외 각종 행사에서 자유북한방송 운영과 관련한 표창과 시상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3만 탈북민들이 받은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가을 부대 탈영해 중국으로 밀입국

이듬해 2월 체포, 평양으로 압송 중 탈출해

중국서 3년 고생 끝에 1999년 남한에 입국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 공부

황장엽 선생 요청,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회장을 맡으며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가장 잘한 것은 선생 곁에서 보좌해드린 일

 

▶암 투병을 응원해준 고마운 분들은?

비싼 항암제를 쓰는 암 투병에는 돈이 많이 든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체구가 작고 나이가 60대 후반의 여성인데 500만원씩 2회에 걸쳐 모두 1000만원을 보내주셨다. 이미일 이사장 외 3명의 통일동지(남한사람)들이 1000만원씩 보내주셨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정성산 영화감독, 허광일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등이 SNS에서 ‘김성민후원회’를 만들었는데 깜짝 놀랐다. 많은 탈북민들이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기는 100만원까지 귀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100여 명의 분들인데 그 중에는 탈북단체장들, 일반 탈북민들 심지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탈북민들도 있었다. 그것을 보며 솔직히 나는 이불속에서 많이 울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니 꿈만 같았다.

▶기도를 해주신 목사님들이 있었다.

손인식 목사(그날까지선교연합 국제대표), 하충엽 목사(숭실대학교 교목), 임창호 목사(고신대학교 부총장) 등 모두 10여 명의 목사님들이 지난 1년간 내가 치료중인 Y병원이나 자택을 방문하여 치유 및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전진희(남) 해외선교사는 투병 첫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SNS로 성경구절이나 복음성가 등을 꼭꼭 보내주신다. 그걸 계속 보다나니 이젠 어느덧 내가 교회로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미일 이사장이 천만 원 보내주시고

박상학, 정성산, 허광일 위원장 등이

SNS에서 ‘김성민후원회’를 만들어

많은 탈북민들이 10만원에서 많기는

100만원까지 귀중한 후원금 보내 줘

 

▶이번에 얻은 교훈이 있다는데?

병원에서 많은 환자가 죽는 걸 봤다. 교통사고로 다음날 죽는 것은 다반사. 거기에 비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번에 큰 교훈을 찾았다. 그동안 시집 1권, 공저도서 3권을 냈는데 나의 고향과 가족, 인민군이야기 등이 전혀 없으니 자칫 하늘나라로 갔으면 엄청 후회했을 것이다.

▶험한 인생길에 큰 산을 넘었다.

정말이지 죽음의 문턱 앞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교체하더라. 고민, 억측, 불신, 미움, 사랑 등이 혼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사람목숨 참 질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파리 목숨만큼 하찮은 것임을 이번에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다.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것은 어쩌면 구상중인 신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 지금 열심히 집필 중이며 6월에 출간예정이다. 조촐한 출판기념회까지 하려고 한다. 이번에 신세를 진 모든 분들께 인사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50여 탈북·통일동지들에게 평생을 다해도 못 갚을 큰 사랑을 받았다. 물론 죄 많은 이 생명 거두어가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탈북민 김성민이 반드시 항암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북한민주화운동 맨 앞장에 당당히 서는 것으로 꼭 보답하겠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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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03 [16:02]  최종편집: ⓒ 통일신문
 
힘내세요 독자 18/05/18 [14:54] 수정 삭제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암을 이겨낸다는게 말처럼 쉽지않은데 김성민대표가 하루빨리 완쾌되었으면 하고요...^^
응원합니다. 박수 18/05/19 [16:59] 수정 삭제
  정말 기적이네요. 저분의 바람대로 북한민주화와 인권이 조속히 실현되는 통일의 날이어서 와야겠는데 용기내고 꼭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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