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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 고백하는 북의 힘들었던 삶과 성공한 남한의 꿈
[탈북민의 삶 그리고 희망] 김정원 前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5/30 [16:41]

북한사회에도 ‘부부싸움’ ‘가정불화’ 등 많이 있다. 굳이 남한 식으로 표현하면 ‘가정폭력’에 해당한다. 북한에서는 부부가 맞벌이를 안 해도 조직생활만큼은 둘 다 해야 한다. 주부인 아내는 동사무소(주민센터)에 소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북한사회에서의 ‘부부싸움’이나 ‘가정불화’는 말 그대로 가볍고 경미한 수준에서 그치는 조용한 싸움일까? 그렇지 않다. 전체 주민의 사상까지 국가에서 통제하는 북한에서는 그런 풍경이 매체를 통해 잘 드러나지 않을 뿐 거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가정에서의 크고 작은 폭력과 이혼, 가출 등이 비일비재하다.

평양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이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사는 모범적인 시민들의 준칙에 어긋난다며 이혼을 하려면 지방에 나가서 하라고 한다. 다시 말해 평양시민으로 살려면 이혼을 하지 말라는 소리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인데 북한에서는 그것이 국가법 마냥 존재하니 마치도 정당한 사유로 착각되기도 한다. 3만 탈북민들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들은 북한사회에서의 가정폭력은 참혹함 그 자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탈북여성 김정원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1969년 11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천강전기공장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아래로 남동생 한 명이 있다. 함흥은 북한에서 대표적인 공업도시이다.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인데 1980년대 후반까지는 그런대로 식량배급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중학교 때 신병치료로 1년간 휴학을 하다 보니 1988년에 함흥소나무고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원래보다 1년 늦게 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성천강전기공장 기능공학교에 배치 받아 2년간 다녔다. 1990년 전후로 북한에서는 당국의 조치에 의해 외화벌이 관련 공장, 기업소 등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늘어나던 때였다. 이때 함흥에 있는 은덕수출피복공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원래 100명 직원의 규모가 20배가 되는 2,000명 직원의 공장으로 급히 커졌다. 그러니 함흥시내 일부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처녀들이 이 공장으로 이직하였다.

▶그 공장의 수출 품목은 어떤 것인가?

소련(지금의 러시아)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점퍼와 원피스를 만들어 수출하였다. 당시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들이 대거 망하면서 소련의 피복 공장들이 인력난에 허덕이자 인권비가 싼 북한에 임가공형식으로 무역을 하였던 것 같다.

일은 8시간씩 3교대로 나뉘어 했다. 일감이 많을 때는 사회적인 농촌지원, 건설동원, 행사준비 등이 없지만 일감이 없을 때는 외화벌이로 도토리수집에 차출된다. 따로 주는 특식품은 한 달에 설탕 500g, 식용유 반 병 정도였다.

▶도토리 수집은 왜 하나?

피복공장에서 도토리 수집을 하면 직원 식당에서 쓰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수출용으로 수집하였다. 북한은 어떤 공장, 어느 단위든 전부 당의 지시를 받기에 당국에서 시기별로 요구되는 모든 행사 및 과제수행에 참여해야 한다. 식량난에 허덕이면서도 도토리를 수집하여 당국에 바치는 것이다.

 

함흥의 은덕수출피복공장 크게 성장

100명 직원 20배가 되는 2,000명

시내 공장에서 일하던 처녀들 이직

 

러시아에서 원자재 들여와 점퍼와

원피스 만들어 수출…당시 동구권

나라들이 망하면서 피복 공장들이

인력난에 허덕이자 인권비 싼 북에

임가공형식으로 무역을 하였던 것

 

▶결혼 생활이 궁금하다. 신혼생활은 행복했었는지?

1991년 도토리 수집을 위해 친구와 함께 함경남도 정평군으로 갔다. 물론 공장에서 발급하는 허가증을 받고 말이다. 함께 갔던 친구의 친척이 사는 곳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신평협동농장 분조장인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농장의 배급 실태도 한심하다. 가을에 받은 분배는 봄철이면 다 떨어진다. 여름부터는 밭에서 나오는 곡물(감자, 콩, 옥수수 등)을 배급한다. 여물지도 않은 것인데 그것도 넉넉하지 못하고 겨우 가족이 풀칠 할 정도의 양이다.

결혼 후 아기가 출생하였고 이 애가 3살 때 몹시 앓았다. 1994년이다. 공교롭게도 이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그 시기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김일성 동상 조문에만 온갖 신경을 썼지 환자는 돌보지 않았다.

7월 1일에 아이가 입원하고 21일에 퇴원하였으나 다음날 쇼크 상태에서 아이가 죽었다. 어쩌면 김일성에게 충성해야만 사는 그 제도가 아이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때부터 정신이 절반 쯤 나간 사람이 되었다.

 

간부가 될 남자가 성분 좋지 않은 여자와

결혼하면 승진에 지장받아…농촌처녀와

도시남자 결혼후 남자 농촌으로 이주해야

군수공장 근로자 타지 여성과 결혼제한도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시집에서는 당연히 나를 구박했다. 남편은 매일 같이 술 먹고 나를 폭행하였다. 단지 자기 아이가 죽었다는 이유에서다. 처음에는 ‘내가 죄인이지’하고 묵묵히 받아 들였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10개월이 이어지면서 나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친정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친정집에서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 고통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겠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생각도 수십 번 했다. 방법은 양잿물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양잿물을 먹으려는 순간 ‘내가 이걸 먹고 죽지 않고 병신이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그것도 쉽게 못 마시겠더라.

또다시 친정으로 가서 하소연했고 부친은 결국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친과 동생은 나에게 속을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북한사회에 대한 원망에 사무쳤다. 나의 불행은 제도가 잘 못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도 남한처럼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이 있다. 남녀가 근로현장에서 함께 일하다가 서로를 잘 알게 되어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친인척과 지인의 소개로 배우자를 만나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지극히 소수이지만 영예(상이)군인들에 대한 결혼은 당국에서 은밀하게 부추기는 현실도 있다. 앞으로 간부가 될 남자가 성분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면 승진에 지장을 받는다.

농촌처녀가 도시남자와 결혼하는 경우 남자가 농촌으로 이주해야 한다. 또한 군수공장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타 지역의 배우자와 결혼이 제한되기도 한다.혼수용품 준비는 그리 많지 않다. 신랑은 신부에게 줄 옷감이나 화장품을 준비하고 신부는 신혼살림에 필요한 이불, 가구, 주방용품 및 시댁 식구들에게 줄 예물(옷감, 신발 등)을 따로 준비한다.

북한에서는 주택이 부족하여 결혼을 해도 분가하지 못하고 시댁 식구들과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북한에서는 이혼을 법적으로 제한한다. 1956년 3월 합의에 의한 이혼제도를 폐지하고 재판에 의해서만 이혼하도록 했다. 복잡한 이혼절차와 이혼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재혼의 어려움으로 인해 합법적 이혼은 그리 많지 않다.대부분의 이혼 사유는 아이를 못 낳든지, 성격에 문제가 있든지, 배우자의 부정행동(외도나 범죄행위) 등이 있다. 이혼할 경우 위자료는 전혀 없으며 단지 아이를 어머니가 키울 경우 남자가 한 달 월급의 20% 정도를 양육비로 주게 되어있다. 하여 북한 여성들은 남편의 폭력이나 외도 등에도 웬만하면 참고 산다.

 

중국 용정에 있는 고모네 집에 은신

이때 배부르게 쌀밥, 고기 실컷 먹어

10일 지나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데

여기 남아 고모와 함께 살자 호소에

고민 끝에 고모 의견 따르기로 결심

 

▶탈북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돌이켜 보면 북한에서 정말 바보처럼 살았다. 중국에 고모와 친척이 있었는데 그 고모가 북한에 친척방문도 나왔고 또 아버지가 중국도 다녀왔다. 그런데도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으니 너무 순진했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와 남동생도 남처럼 쌀쌀해졌으니 머리도 아프고 하여 중국 고모네 집에 가서 10일 정도 휴식하고 오리라 결심을 하고 1997년 8월 두만강을 넘었다. 정말 눈물의 두만강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중국에 와서 용정에 있는 고모네 집에 은신하여 보냈다. 이때 배부르게 쌀밥도 실컷 먹어보고 고기도 많이 먹었다. 10일이 지나서 나는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또한 두만강을 넘을 때 국경경비대원 군인에게 10일 뒤 온다는 약속을 하고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안 돌아갔는가?

고모가 울먹이며 “아버지도 없는 고향인데, 우리 가문 핏줄이라고는 너 혼자 뿐인데 굳이 가야하겠냐? 그냥 여기 남아서 고모와 함께 살자. 북조선은 경제적으로 생활이 좋아질 기미는 앞으로 수십 년 가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속으로 다소 놀랐다. 중국 사람인 고모가 어떻게 북조선사람인 나보다 더 북조선을 잘 아는지 말이다. 역설적으로 북한주민은 그렇게 암둔하고 무식하게 살고 있다. 고민 끝에 고모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고모네 집이라도 위험하지 않던가?

2년 뒤 연길로 나와 한국인이 간접 운영하는 피복임가공공장에 입직하여 2년간 일을 하였다. 공장에는 주변에서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살면서 일하는 탈북여성 4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공안당국의 급습하여 이들을 모두 북송시켰다.

물론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맡기고 말이다. 눈물겨운 참혹한 그 현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대로 있다가는 나도 언제 저들처럼 귀신 몰래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2000년 전후로 2~3년간 중국당국에서 탈북자 색출에 혈안이 된 이유가 있었다. 북한 당국이 통나무수출을 탈북자북송과 맞교환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제안을 환영하였는데 정말이지 북한과 중국은 인권말살국가이다.

2년 동안 일하면서 안 먹고 안 쓴 돈을 모아 일부는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주었고, 나머지는 남조선으로 가기 위한 자금으로 썼다. 2003년 5월 북경 주재 한국영사관에 뛰어 들어갔고 그해 12월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남한에 와서 어떤 일을 하였는가?

2004년 3월 하나원을 퇴소, 서울에 있는 ‘솔로몬회계학원’을 3개월간 수료하고 경기도 안양 산본에 있는 모 기업의 경리보조 서무로 1년간 일을 했다. 이후 서울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하였고, 2013년부터 3년간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지금은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중이다.

▶공부를 하면서 일도 하였던데…

한국야쿠르트 대리점에서 4년간 경리로 일했다. 점장은 50대 중반의 여성인데 이 분에게서 남한사회에서 정착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 2010년 1월부터 올해(2018년) 2월까지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서 전문상담사로 근무했다.

남한에 정착 중인 탈북민을 상대로 취업, 정착, 생활 등의 분야를 상담하는 일이다. 내가 북한에서 가정폭력 피해 경험자이었기에 누구보다 탈북여성들의 일부 아픈 마음을 생동하게 들여다보고 상담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서울사이버대학교와 숭실대 교육대학원서

석사과정 졸업…현재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중, 올해 2월까지

남북하나재단에서 전문상담사로 근무 해

 

15년 직장생활 했는데 다른 일 하고 싶어

박사 공부 마치고 인터넷미디어 분야의

개인사업 계획하고 있어 남편 이분야에서

일하는데 보조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겨

 

▶상담사로 기억에 남는 일은…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중반의 탈북남성인데 북한에서 받은 트라우마(정신적 신경장애)로 집 밖을 나서기를 무서워했다. 밝은 대낮에서 커튼을 치고 베개 밑에는 항상 칼을 감추고 살았다. 꿈에서 보위원이 나타나기 때문이란다.

이 분을 수개 월간 마음까지 터놓을 정도로 친절하게 상담하면서 그렇게 가기 싫어했던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게 만들었던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분은 지금 많이 완쾌가 되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재단 일을 그만둔 이유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15년간 직장생활을 해보니 이제는 뭔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지금 하고 있는 박사학위 공부를 마치고 인터넷미디어 분야의 개인 사업을 해보고 싶다. 남편이 현재 이 분야에서 일하는데 보조해주고 싶다.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에서 9년간 일하며 현재 고경빈 이사장님께서 탈북민 출신 상담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심으로 하여 업무에서 너무나 편했고 재미있었다. 남북하나재단에서의 생활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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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30 [16:4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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