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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신의주 반공학생 사건 <1>
1945년 평북 용천군 용암포에서 발생한 공산당폭력 사건이 도화선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6/28 [16:22]

<김형수 객원기자>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은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도소재지인 신의주에서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과 공산당을 반대하여 저항한 학생운동이다. 신의주 학생폭동사건 혹은 신의주학생시위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근저에는 기독교 정신이 깔려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고장이 평양과 신의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청년회 조직돼

 

옛날부터 농사를 짓기 좋은 환경과 서해바다를 끼고 중국대륙과 연결된 철도노선인 경의선으로 장사가 잘되던 평안북도는 자작농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나 중국에 유학을 가장 많이 간 지역이 평안북도의 신의주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만큼 교회도 많았고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해방이 되자 신의주제1교회 윤하영 담임목사와 신의주제2교회 한경직 담임목사가 중심이 되어 평안북도의 기독교인들을 기반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민주주의정부의 수립과 기독교정신에 의한 사회개혁을 정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지부를 조직해 소련공산당과 김일성이 제창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에 맞섰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였으며 다른 지방의 공산당원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북한 전역에 민주사회를 건설하려는 방대한 목표를 내세우고 기독교사회민주당의 명칭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향으로 우리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조직이 신의주학생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945년 11월 18일에 평안북도 용천군 부내면의 용암포에서 발생한 공산당의 폭력사건이 신의주학생사건의 도화선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의주에서 경의선을 따라 남쪽으로 약 16km(40여 리) 내려오면 용천군 읍이 있고 용천군 읍에서 서남방향으로 약 10km(25리)정도 가면 용암포가 있다.

당시 평안북도 용천군 공산당지부책임자였던 이용흡은 용천군인민위원회 위원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아부하면서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사회민주당의 활동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그러는 이용흡을 용천군 주민들은 점차 멀리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그는 자기한테서 멀어지는 민심을 달래고 소련군정을 통해 소련공산당에도 신임을 얻고자 11월 18일 오후에 시민대회를 열었다. 당시 용암포에 있던 수산학교가 공산당소속의 정치훈련소로 강제로 이전되면서 이에 대해 울분에 차있던 학생들이 오히려 이 시민대회를 이용흡과 그 일당을 성토하는 기회로 만들기로 계획 하였다.

당시 학생대표로 연설을 하기로 결정된 수산학교 4학년 최병학 학생은 그 전날인 11월 17일 밤늦게까지 기숙사 사감과 학생후원회를 맡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연설문을 완성하였다.

 1945년 11월 18일 시민대회장을 꽉 메운 시민들과 학생들은 학생대표로 연설한 최병학의 연설구호에 호응하여 “공산당은 수산학교를 내놓으라! 소련군의 앞잡이 이용흡과 그 주구들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목청껏 외쳤고 결국 ‘공산당 타도’구호로 번졌다.

급해 맞은 공산당은 무장한 보안대원들을 동원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시위대회 현장은 주민들과 보안대원들 사이 난투장으로 변화했다.

그날의 충돌로 수십 명의 중경상자들이 발생했다. 결국 그날 시위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승리로 끝났고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보안대원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을 돌려주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산당과 협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이튿날인 1945년 11월 19일 새벽에 용천군 공산당지부책임자인 이용흡은 용천군 부라면(府羅面)에 소재하고 있던 동양경금속 노동조합산하 적위대원들과 북중면(北中面)의 농민 등 2,500여 명을 화물자동차(트럭)에 태워 용암포로 들이닥쳤다. 새벽에 수산학교 기숙사에서 잠자던 학생들은 몽둥이세례를 받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용천군 내의 학생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도 용암포 진입로에서 잔혹한 폭행을 당했다. 이러한 참상을 지켜볼 수만 없어 항거하였던 제1교회의 홍석황 장로마저 그 자리에서 몽둥이에 맞아 숨졌다.

삽시간에 이 소식은 신의주 시가에 전파되었고 3,500여 명의 학생들이 궐기해 나섰다. 각 학교의 학생대표들은 21일 밤에 신의주 동중학교 강당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당시 신의주시에는 동중학교(東中)를 비롯하여 제1공업학교, 사범학교, 상업학교, 평안중학교, 제2공업학교, 의주농업학교 등 7개 학교와 1개의 여학교가 있었다.

회의에서는 학생조사단을 용암포로 파견하여 용암포참사 진상을 규명하고 사태수습을 위한 다음 행동으로 넘어갈 것을 합의해다. 용암포에서 수산학교를 공산당의 정치훈련소로 만들었던 당시에 신의주에서도 재판소 청사가 공산당 당본부로 이전되어 신의주 시민들은 물론 학생들마저 몹시 분개하던 참이었다.

선출된 5명의 조사단 학생들은 용암포로 내려가 용암포사건의 실태를 샅샅이 알아보았다. 조사과정에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병사들의 약탈행위를 비롯해 공산당의 학원 간섭, 평북도 보안부장 한웅의 관료행위, 신의주에 집결한 중국귀환동포들 비인도적 처우 등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안들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공산당과 소련주둔군에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반공산당 투쟁이 핵심으로 되었다.

다음날인 11월 22일 밤에 다시 모인 각 학교의 학생대표들은 연약한 여학생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남학생들로만 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여학생들도 자진해서 궐기해 나섰다. 학생대표들은 11월 23일 오전 9시에 제1공업학교 강당에 다시 모여 전날 회의에서 결의한 사항들을 재확인하는 한편 공격목표, 인원동원, 공격개시 시간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

 

여학생들도 자진해서 궐기에 나서

 

최종적인 공격시간은 정오 사이렌신호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가 다시 오후 2시 별동대가 압록강가의 목재소에 불을 질러 타오르는 연기를 보고 일제히 공격하기로 재결정 되었다.

공격목표로는 동중학교와 제1공업학교는 평안북도 도 인민위원회가 들어있는 도청과 평안북도 보안부를, 사범학교와 제2공업학교는 평안북도 공산당 본부를, 상업학교와 평안중학교는 신의주시 보안서를 일제히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범학교와 제2공업학교가 공격하기로 되어 있는 평북도 공산당본부는 재판소였던 것을 공산당이 강압적으로 틀고 앉은 상태였다. 학생들은 이런 공산당의 행태를 두고 가장 분격을 표출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1월 23일 공격신호가 나기도 전에 공산당본부 주위를 천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벌써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주머니에 자갈들을 품고 있었다.

당시 신의주학생사건에 참가했다가 월남한 증언자들에 의해 당시의 사태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밝혀졌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0년대 소련정부가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 자료들이 대한민국에 제공되어 북한에서 감추고 있는 신의주 학생들의 정의로운 시위는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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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28 [16:22]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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