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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신의주 반공학생 사건 <2>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바라던 선열들의 거족적 애국학생운동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7/05 [14:38]

평북도 공산당본부를 공격했던 천여 명의 학생들이 소련군과 공산당 무장보위대의 총에 맞아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도인민위원회와 도보안부를 공격한 학생들도 총탄사격으로 희생되면서 학생들이 진압당한 시간은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진압에 탱크와 야크비행기도 동원

 

당시 그들이 외친 구호는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등이었다. 공산당 소속의 보안대와 무장한 소련군에 의한 참혹한 진압에는 땅크(탱크)와 야크비행기도 동원되었다.

그날 시위진압과정에 이정식, 백광진 등 23명이 희생되었고, 유영태, 김기철 등 7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신의주반공학생시위는 소련군과 공산당이 맨주먹의 학생들을 총탄으로 마구 죽인 유혈적인 참사로 끝났지만 이것이 결코 끝은 아니었다.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검거선풍으로 첫 날에 만 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신의주시 보안당국은 보안서에 모두 가둘 수 없어 신의주시 인민위원회에도 많은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고문이 계속되었고 주모자라고 생각되는 학생들은 도보안부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소련군 비밀경찰에 넘겨졌다.

신의주 시민들도 총탄으로 학생들을 마구 죽이며 시위를 진압한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해방군의 탈을 쓰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정은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들의 앞잡이에 불과했던 김일성을 사건 다음날에 신의주현지로 내려 보냈다.

북한정권은 이 사실을 두고 당시에 김일성이 사태수습을 위해 자진해서 신의주로 내려갔다고 했지만 소련군정의 당시 기록에 의하면 소련공산당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한 김일성의 연설도 소련군정에서 작성해 준 것이었다. 신의주 동중학교 교정에 모인 학생들과 시민들 앞에 나타난 김일성은 허리에 찼던 권총을 연단 위에 올려놓고 무려 두 시간 동안 장황하게 연설을 했다.

“하필이면 이곳 평북도 신의주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이곳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보안부의 책임자 간부들이 일을 잘못하였기 때문이다”며 “이것은 위대한 소련군의 해방자적, 원조자적 역할에 대한 오해와 또 공산당의 사명과 정책에 대한 착오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용을 당한데 불과한 것이고 사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분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책동의 결과임에 틀림없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당시 평북도 도당간부들이었던 김휘, 박균, 이황 등과 평북도 인민정치위원회 보안부장 한웅 일당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둘러 됐다. 김일성이 연설할 때 준비시킨 공산당원들이 군중 속에서 박수를 먼저 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유도하기도 했다.

 

학생들 중 백여 명 시베리아로 연행

 

김일성은 북한을 강점하고 있었던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라 이 사건을 계기로 평안북도 공산당 내의 간부들을 마구 해임, 철직시켰다. 학생시위의 책임을 지고 도 인민정치위원회 보안부장 한웅은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1948년에는 간첩 협의를 받고 처형되었다.

소련군정과 공산당은 체포한 천여 명의 학생들 중에서 위험인물로 백여 명은 소련 씨비리(시베리아)로 연행해갔고 7명은 주모자로 감금하였다. 이 사실만 봐도 소련군정은 물론 김일성마저 신의주반공학생사건에 얼마나 놀랐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북한주민들이라면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맞는 3.1독립만세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던진 수류탄이 주석단에 떨어지자 그것을 집어 던지려다가 한 팔을 잃은 소련군 군인이었던 야코프 노비첸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당시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했던 이 사건은 신의주반공학생운동을 살인적인 폭력으로 제압한 공산당에 대한 원한의 복수이기도 했다.

‘공산당을 타도하고, 소련군을 몰아내자’ ‘신의주 학생들의 피는 지금도 끓고 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떨어진 삐라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보아도 그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했던 목적이 소련군의 북한강점과 신의주반공학생들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당시 삐라를 제작하여 뿌렸던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김인호 부회장이 그때의 일들을 자세히 밝혀 그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1928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그는 반공애국청년단체인 백의사의 대원이었던 이성열의 요청으로 친구들인 이응용과 김병기 등과 함께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독립만세 행사장에 삐라를 만들어 뿌렸다.

1946년 3월 1일 오전 10시, 김일성을 비롯해 김책, 강양욱, 최용건 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소련군 지도부 간부들과 함께 평양역 광장에 행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주석단 단상에 올랐다. 김일성이 연설을 마치자 그 순간을 노려 백의사 대원

 

반공의 이념 안고 목숨 바쳐 싸워

 

수류탄은 주석단 단상에 떨어졌고 노비첸코가 그것을 주어 던지려는데 수류탄이 터져 한쪽 팔을 잃고 눈을 다쳤다. 김성만은 소련의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다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신의주 반공학생시위는 북한에서 반소반공 투쟁의 불꽃이 되었다. 평양과 함흥, 해주, 길주 등 곳곳에서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와 소련반대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소련군정의 지시로 김일성이 이들에 대한 탄압에 열을 올리자 대거 남으로 의거하여 왔다.

소련군정의 학정과 공산당의 탄압으로 1945년 8월 해방된 날부터 1946년 4월까지 1년도 안 되는 약 8개월 동안에 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북한주민들은 약 50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의주반공학생의거에 참가했던 학생들도 백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압록강동지회를 조직하고 공산당과 소련군 강점을 반대하여 반공일선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활약하였다.

김일성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일으킨 6.25남침전쟁에서도 반공 애국운동의 선봉투사들이었던 신의주학생운동 참가자들은 195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신의주 학생 의거 11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할 것을 결의했다. 그 다음해인 1957년부터 11월 23일을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마다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의 주최로 신의주학생의거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11월에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한국자유총연맹 구내에 건립된‘학생반공의 탑’을 찾아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

공산당을 타도하고 소련군 강점을 반대하여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벌어진 반공반소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신의주반공학생시위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주의를 바라던 선열들의 거족적인 애국 학생운동이었다.

비록 그들의 애국적인 활동은 소련군과 공산당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저지당했지만 제2, 제3의 신의주학생운동은 북한전역에서 새로운 불길로 타올라 김씨 왕족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김형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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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05 [14:3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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