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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조선공산당총비서 박헌영 숙청<1>
뛰어난 조직적 수완과 영향력 지녀/김일성에게는 가장 큰 정치적 적수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7/12 [15:02]

<김형수 객원기자> 

세상에 유일한 현대판 노예상속왕국인 북한의 3대 세습은 숙청정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김일성을 잔인한 통치자, 인민독재자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해방이후 권력유지를 위해 정적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였기 때문이다.

고위간부에 대한 숙청 무자비하게 강행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에 떠밀려 북한의 지도자로 되면서 처음 배운 것이 소련공산당 내에 존재했던 정치철학이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일 것이다.’ 이것이 소련공산당 지도부에서의 정치철학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공산당 식 숙청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지도부 간부들을 외국 간첩딱지를 붙여 학살한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스탈린은 1934년 측근인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을 계기로 이른바 공산당 내 ‘불순분자’에 대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1938년 말까지 숙청된 1,200만 명 중 처형된 사람은 100여만 명이며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000여만 명에 이른다.

스탈린의 숙청정치를 그대로 답습한 김일성이 고위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무자비하게 강행하였다. 정치권력의 경쟁자들을 온갖 죄목을 씌워 처형하는 것이 공산독재자들이 해온 상투적인 권력유지 수법이다.

북한의 조선로동당은 해방 후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생긴 당이다. 초기 조선로동당의 지도부에는 10명의 정치위원이 있었다. 이 10명의 정치위원 중에 자기의 수명까지 살다가 죽은 사람(자연사한 사람)은 1994년에 82살의 나이에 급사한 김일성과 1951년 67살의 나이에 병으로 죽은 허헌 두 사람뿐이다.

권력유지에서 가장 걸림돌 되는 인물

박헌영, 허가이, 박일우, 박정애, 이승엽 등 8명은 숙청되어 죽거나 전쟁 때 목숨을 잃었다. 숙청된 정치위원들 중에서 박헌영은 당시 김일성에게 권력유지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김일성보다 나이도 12살이나 많은데다가 더 오랜 공산주의 운동 활동경력을 가진 공산주의자였다. 또한 뛰어난 조직적 수완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김일성에게는 가장 큰 정치적 적수였다.

박헌영은 1900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쌀 장사꾼인 박현주와 소실인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헌영은 김일성이 8살도 안되던 1919년에 서울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말한다.

1899년 4월에 설립되어 1900년 10월에 개교를 시작한 이 학교는 남북한 통틀어 처음으로 생긴 정규 중등교육기관이다. 김일성이 다닌 길림육문중학교에 비하면 역사도, 학생들의 실력도 비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상해에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그해 4월 김단야, 임원근 등과 함께 국내에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려고 입국하다 신의주에서 체포, 1년 6개월간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만기 석방된 이후에 신문기자로 활동하였고 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으나 창당 7개월 만인 1925년 11월 30일에 또다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공산당이라는 명칭의 정치조직이 처음 창당된 것은 1925년 4월 17일이다. 이날 서울의 유명 음식점이었던 아서원에 모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생겨났던 것이다.

당시 참석자들로는 김재봉, 조동호, 김찬, 조봉암, 김약수 등이었다. 그 다음날 서울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의 집에서 공산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발기모임이 열렸고 의장으로는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박헌영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처참했던 시기가 당시 감옥에서 그가 정신병자 행세를 했던 비화이다. 그는 감옥 안에서 미친 척하려고 똥을 먹기도 하였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면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란을 피우자 일본경찰은 그가 정말 정신병자가 된 줄 알고 석방시켰다.

수감 된지 2년이 되어오던 1927년 11월에 미치광이로 행세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부인인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1928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한국인(조선)학교에서 교원(교사)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29살 나던 1929년 6월에 모스크바에 소련공산당이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치교육과정으로 개설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2년간 교육받았다. 1933년 1월에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공산당 기관지 ‘코뮤니티’를 제작하여 국내에 배부하려다가 그해 7월 상해에서 체포돼 국내에 압송되어 6년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45년 서울 장안빌딩서 ‘조선공산당’창당

1939년에 대구형무소에서 만기로 석방되었지만 결국 그는 3번에 걸친 9년 반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길림감옥에서 7개월 옥살이를 한 것에 비해도 긴 감옥살이였다.

김일성의 길림감옥 옥살이는 18살의 어린 김일성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선전물들을 살포하다가 잡혔던 것에 불과하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공산주의 청년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기에 옥살이를 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철없는 장난처럼 남을 따라다니던 시절에 박헌영은 소련에서 체계적인 공산주의교육도 받고 국내공산주의 조직 설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일제경찰의 요시찰대상이 된 그는 해방되기 전까지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의 한 벽돌공장에 피신하여 일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박헌영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4일이 지난 8월 19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서울에 올라오니 이미 일명 장안파공산당이라고 일컫는 공산당조직이 창당되어 있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일본 히로히토천황이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항복을 선언하자 그날 저녁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장안빌딩에서 설립된 해방 후 처음 등장한 첫 공산당조직이다.

그들은 1945년 8월 16일에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이영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그리고 제2비서로 이승엽이 선출되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장안빌딩에서 창당되었다고 하여 ‘장안당’이라고도 불렸고 8월 15일에 창당되었다고 하여 ‘15일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안파공산당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함경도 북청출신인 책임비서 이영 등 대부분의 당원들과 간부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전향을 하였거나 공산당활동을 중단했던 인물들이었다.

박헌영은 서울에 상경하여 일제시기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공산당 이념을 고수하였던 이주상,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등과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박헌영은 당시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을 방문하여 부영사 샤브신을 만나 소련공산당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장안파공산당은 스스로 해산되었고 남한에서는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됐다.

다음 호에는 박헌영이 왜 북한에 오게 되었고 김일성이 자기의 가장 큰 정치권력의 적수였던 그를 어떻게 처형하게 되었는지에 설명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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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2 [15:02]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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