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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하면서 입은 장애 딛고… 기쁜 마음으로 일합니다”
[인터뷰] 장정수 통일미래연대 안보강사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7/19 [13:11]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은 한반도이다. 38선 이북지역에 김일성 공산독재정권이 들어섰고 그 아래서 도저히 못살 것 같아 하나뿐인 목숨까지 걸고 이남으로 내려온 수 백 만의 실향민이다. 이들의 평균 나이가 80세 이상으로 완전한 고령이며 죽기 전에 두고 온 이북고향 땅을 밟아보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100세가 되면 정신은 물론이요 육체건강 마저도 희미해진다. 물과 불이 무섭다고 해도 세월만큼은 무섭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이면 이 땅에 실향민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때는 탈북민이 지금 실향민들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탈북민과 실향민은 북한정권의 피해자들이다. 해방 후부터 전쟁 시기를 거쳐 휴전 이전까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이고 휴전 이후 현재 계속 내려오는 탈북민이다.

2018년 여름, 현재 대한민국에 3만 2천여 탈북민이 있다. 그들은 언제인가 꼭 오리라 확신하는 자유통일이 되면 반드시 성공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 마음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다. 얼마 전 서울 모처에서 조선인민군 425훈련소 정찰부대원 출신인 탈북민 장정수 씨를 만났다.

▶고향이 어디인가?

1982년 황남 청단군에서 태어났다. 황해남도 남동쪽에 위치한 인구 14만 여명의 청단군은 연백평야를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곡창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청단1중학교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형제는 3형제에 내가 둘째이다.

1999년 청단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려 했는데 키가 145cm로 너무 작아 신체검사 불합격이 되었다. 하여 청단소금밭건설사업소에 배치 받아 거기서 1년간 일을 하였다. 이후 1년은 평양-남포고속도로 건설장에서 일했다.

 

평양-남포고속도로 건설장에서 일해

경제가 어려웠던 1998년 11월 착공

2000년 완공한 왕복 8차선 고속도로

열혈청년들이 삽과 곡괭이, 마대자루를

이용하여 하루 14시간 강도 높은 노동

 

▶그 유명한 ‘청년영웅도로’ 말인가?

그렇다. 북한에서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1998년 11월에 착공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한 왕복 8차선의 고속도로이다. 열혈청년들이 삽과 곡괭이, 마대자루를 이용하여 하루 평균 14시간의 강도 높은 노동을 하였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갈림길(해방 후 김일성이 조부모가 기다리는 고향 만경대로 가지 않고 건국을 위해 남포강선제강소로 먼저 갔다는 삼각지점)에서 남포시 천리마구역까지 49km를 잇는 구간이다.

▶인민군에는 언제 입대했나?

신기하게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3개월 사이에 15cm 키가 컸다. 다행히 군 입대 신체검사 기준에 해당이 되었다. 청년영웅도로 건설장에서 돌아 온 다음해인 2001년 7월 인민군대에 입대하였다.

북한에서 청년들이 군 입대를 영예롭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군복무가 ‘조국과 인민을 수호하는 영예로운 혁명임무’이기도 하지만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에서는 청년들이 입당하기 힘들다. 일단 입당해야 발전(승진)도 있다.

▶자세히 말해 달라

20살 나이에 입대한 부대는 425훈련소 정찰부대여단이었다. 훈련소는 군단급 규모의 정규군이며 그 안에 764여단, 523여단, 628여단 등 여러 개의 여단이 있다. 여기서 숫자는 모두 김일성이 항일운동하며 특정 전투를 했던 날짜이다.

425훈련소 본부는 평남 개천군에 있다. 훈련소는 폭풍군단급 보다는 낮고 일반 군단급보다는 높다. 특수군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내가 속한 523여단(정찰여단, 유사시 적진지 침투 정찰임무 수행)은 평남 평원군에 주둔해 있었다.

 

청년들이 군 입대를 영예롭게 생각

군복무가 ‘조국과 인민을 수호하는

영예로운 혁명임무’이기도 하지만

노동당에 입당하기위한 기본 과정

청년들 일단 입당해야 승진도 있어

 

▶추억할 만한 일이 있었다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그런 일이 있었다. 2002년 4월 최고사령관인 김정일이 우리 여단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날 병사들이 먹을 쌀밥, 돼지고기, 간식 등 준비해놓았는데 김정일이 안 오니 모두 수거하여 상부(훈련소)로 올려갔다.

그해 11월 김정일이 여단을 방문하였는데 그가 다녀가고 달라진 것은 하루 800그램 식량이 백미 잡곡 5:5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하루 500그램 식량이 100% 잡곡이었는데 주로 감자, 옥수수, 도토리 등이다.

▶군 복무기간 중 탈영한 이유가 뭔가?

군대에서 명절이 되면 상부에서 내려오는 후방물자(피복 및 부식물 등)는 전혀 없고 모두 각 부대별로 자체 해결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 그래도 명절이라면 “돼지가 장화 신고 물 건너간 국물”(멀건 돼지고기 국물을 이르는 비속어) 이라도 병사들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문제의 돼지고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 소대장은 상관의 눈치를 보고 “어디 가서든 돼지만 훔쳐오라!”고 명령한다.

▶이해가 안 된다.

군인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제 정신으로는 도무지 못하겠다고 하니 하급 병사들의 구타가 들어왔다. 물론 소대장이 시켰던 것이다. 어느 날 밤, 고민 끝에 소대장을 때려눕히고 탈영했다. 개천, 안주, 요덕, 함흥, 아오지를 거쳐 두만강을 넘었다. 2004년 8월이었고 도착한 곳은 중국 훈춘이었다.

▶군복 입은 채로 넘었단 말인가?

중국 땅에 발을 디딘 즉시 군복은 벗어 버렸다. 공안은 둘째 치고 중국 사람에게만 눈에 띠워도 당장 신고대상이다. 북한군 군복 입은 모습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이후 산골로 들어가서 어느 축산업장에서 양몰이 일을 9개월간 하였다.

2005년 4월 15일 중국공안에 단속체포 되어 심양감옥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일주일 수갑을 찬 채로 지내다 탈출하였으나 다시 붙잡혔다. 변방대에서 37명의 탈북자와 함께 4월 30일 단동을 거쳐 신의주세관 보위부로 넘겨졌다.

 

소대장 ‘어디 가서 돼지 훔쳐오라’ 명령

고민 끝에 소대장을 때려눕히고 탈영해

개천, 안주, 요덕 등 거쳐 두만강 건너

2004년 8월에 도착한 곳은 중국 훈춘

산골에서 축산업장서 양몰이 9개월

1년 만에 중국공안에 체포 심양감옥 수감

37명 탈북자와 신의주세관 보위부로 넘겨져

 

금야 교양소에서 형기 마치고 현역 복귀

교화소는 형기를 마치는 동시에 제대시켜

병사시절 불붙는 건물에서 김일성 초상화

꺼내 온 공적 인정받아 수감기간도 감형

제대 후 청단수지일용품공장 기능공 배치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군인이었기에 인민군 보위사령부 10처에서 데려갔다. 425훈련소 6과 구류장에 구속되어 앉은 자세에서 1년 3개월을 지냈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한 고문은 없을 것 같다. 이후 인민군 607소 노동교화소(평남 회창)에 2년 수감되었다.

인민군 606소 노동교양소는 함경남도 금야에 있다. 교양소는 형기를 마치고 현역에 복귀하지만 교화소는 형기를 마치는 동시에 제대한다. 나는 2007년 2월 607소 노동교화소 형기를 마침과 동시에 제대하였다.

▶직업 배치를 어디에 받았는가?

다행히 병사시절 불붙는 건물에 들어가 김일성 초상화를 꺼내 온 공적을 인정받아 교화소 수감기간도 감형을 받아 절반 정도만 채웠다. 제대하여 황해남도 청단군에 있는 청단수지일용품공장 기능공으로 배치를 받았다. 공장에 전기가 안 들어 올 때는 바다에 나가 물고기 잡이를 하였다. 공장의 후방사업을 위해서 말이다.

▶북한의 바다에서 인명피해가 많다던데…

내가 고향에서 목격한 사고만도 2000년 여러 배에 나눠 타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던 700명의 사람들이 풍랑에 뒤집혀 죽었다. 이후 2008년에는 바다에 나가 일하던 600명의 사람들 중 절반이 넘는 330명이 풍랑을 만나 죽었다.

북한은 언론 정보가 폐쇄된 사회이다.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일부 공개하지만 인재 즉 사람의 실수(정책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는 인명피해나 사고들은 철저히 감추고 있다.

▶보상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나?

아무 것도 없다. 유족에게 통보나 해주면 다행이다. 사망자의 소속 회사(기업소)가 조금 여유가 있다면 유족에게 쌀 1~2kg 공급해주면 큰 것이다. 합동장례는 고사하고 개인장례도 못 치른다. 산 사람 입에 들어갈 식량도 없는데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차려줄 식탁이 있겠는가? 북한에는 보험제도가 전혀 없다.

 

남한과 가까운 황해남도 지역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남한TV 볼 수 있어

당국의 감시가 너무 무서워 못 볼뿐

바다에 나가면 대북방송 라디오 들어

방송들으면서 남한에 대한 동경 생겨

 

▶남한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는가?

지리적으로 남한과 가까운 황해남도 지역에서는 사실상 마음만 먹으면 남한TV를 쉽게 볼 수 있다. 당국에서 “썩어빠진 남조선 텔레비전은 절대로 보면 안 된다”고 하기에 너무 무서워 못 볼뿐이다. 특히 바다에 나가면 대북방송을 라디오로 생생이 들을 수 있다. 대북방송을 들으면서 남한에 대한 동경이 조심스럽게 생겼다.

▶탈북동기가 뭔가?

2006년 경 백두산 고향도(양강도, 김정일의 생가가 백두산에 있음)지원 사업이 있었다. 일용품공장에서 생필품을 그곳으로 지원해야 하는데 물량이 적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상부에서 검열이 내려왔는데 지배인은 그 ‘죄과’를 나에게 들씌웠다.

물론 내가 공장 간부들의 심부름은 했다. 현실적으로 간부들이 공장제품을 장마당에 몰래 내다 팔고 이익을 챙겼는데 그 죄를 나에게 씌웠다. 2008년 가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어느 날 지배인을 때려눕히고 다시 탈출하였다.

▶재 탈북인가?

그렇다. 2008년 11월 원한의 두만강을 다시 건넜다. 화룡시에서 벌목장을 거쳐 산골에 들어가서 멧돼지사육 일을 1년간 하였다. 이후 도시로 나와 실내 인테리어 일을 1년간 하는 도중 장애(오른손 신경마비)를 입었다. 탈북자 신분이니 치료를 받을 수 가 없었고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11년 1월 남한에 입국했다.

 

생필품을 지원하는 사업에서 물량 적어

지원하지 못해…상부에서 검열 왔는데

간부들이 제품 장마당에 몰래내다 팔고

이익을 챙겼는데 지배인이 죄 떠 넘겨

 

재 탈북 중국서 일하는 도중 장애 입어

탈북자 신분이니 치료 받을 수 없었고

라오스, 태국 거쳐 2011년 남한입국

현재 현장설치업체서 독립적으로 일해

통일미래연대 안보강사 작년부터 시작

 

▶이후 무슨 일을 하였는가?

처음 자동차정비 일을 1년간 하였다. 그 와중에 고향에 있는 형을 데려오려고 시도했다. 형은 두만강을 건너다가 인민군 총탄에 맞아 죽었다. 함께 움직이던 형수는 체포되어 현재 사리원교화소에 들어갔고 조카는 행방을 모른다.

그 일로 하여 정신적 공황상태가 왔다. 도무지 한국에서 살 것 같지 않아 외국에 나가서 1년간 지냈다. 다시 한국으로 와서 지금은 행사현장 설치 업체에서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다. 통일미래연대 안보강사는 작년부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탈북민들이 회원인 사단법인 ‘통일미래연대’에서 사회생활의 일부를 하고 있다. 고향에서 온 사람들끼리 만의 특별한 감정도 분명 있다. 얼마 전 여기서 한 생의 반려자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통일미래연대를 잘 이끌어주는 탈북민들의 아버지이고 맏형인 최현준 대표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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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9 [13:11]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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