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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민족보위성 초대부상 김무정의 숙청<2>
연안파 대표인물,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포병연대 사령관…해방 후 김일성과 권력암투 벌려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8/09 [15:18]

해방되어 한 달이 지난 9월 19일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부인 김정숙과 소련에서 태어난 당시 러시아 이름으로 김유라였던 4살배기 김정일과 함께 원산항으로 귀국한 사실은 인민군 작전국장을 하였던 유성철의 고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팔로군에서 항일무장투쟁…애국자

 

유성철은 김일성과 소련군대에 복무하였던 88저격여단 통역관이었고, 해방 후 인민군 작전국장을 하였지만 1958년 소련파 숙청시기 해임되자 1959년에 다시 소련에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렇듯 김일성은 반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소련으로 피해 달아났지만 무정 장군은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던 진짜배기 애국자였다.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복무한 사람들로는 최현, 안길, 최용건, 김책, 오진우, 리을설 등 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소련으로 달아나지 않고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중국공산당 산하 팔로군 출신들은 수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북한의 모든 정치, 경제, 외교를 소련공산당이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1945년 9월 19일에 귀국하여 한 달도 되지 않았던 10월 14일 소련공산당은 북한의 최고영도자로 김일성을 소개하는 행사를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있는 현재 개선공원에서 개최하도록 하였고 당시 34살의 김일성이 개선연설을 하게 된다.

이 광경을 보면서 무정 장군은 격분을 참을 수 없었다. 김일성보다 나이도 8살이나 많았다. 중국 팔로군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김무정 장군은 김일성이 소련공산당과 소련 붉은군대의 힘을 입어 북한의 영도자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서 격분해 했다.

그는 술만 마시면 “소련으로 도망갔던 사람이 소련공산당을 등에 업고 득세하였다”고 격노하면서 불평불만을 터뜨렸고 결국 김일성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갔다. 그러나 김일성도 김무정에 대해 마구 대할 수 없어 당시에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 전에 평양시에 있었던 일본음식점들이 해방되어서도 남아있었는데 1945년 11월 어느 날 저녁에 일식집 다마야에서는 중국 팔로군출신 귀국환영모임이 있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무정 장군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기분들이 좋지 않았다.

오랜 세월 산에서 풍산노숙하면서 싸웠던 그들이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에 의해 북한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군 출신들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억이 막혔던 것이다. 그날 환영모임에 김일성도 참가하지 않았고 당시 불만이 많았던 김무정 장군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산에서 싸우면서 무정 장군 만세를 불렀던 팔로군 출신들로서 소련으로 도망쳤던 김일성보다 무정 장군을 더 존경하고 따르는 연안파출신 항일투사들이었던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던 무정 장군이 소련군정으로 김일성에게 눌려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권력욕 있으나 계책 꾸미는 인물 못돼

 

김일성은 자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김무정 장군을 그렇다고 마구 대할 수 없었다. 수백여 명의 중국공산당 소속 팔로군출신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무정 장군은 서북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제2비서로 추대되었다.

제3차 북조선분국 확대집행위원회와 제4차 분국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2비서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면서 당중앙위원회 간부부장을 맡으면서 당내 간부 등용을 도맡기도 했다.

그는 군부에도 막강한 세력을 뻗쳤는데 1946년 2월에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 훈련대대가 창설되면서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인민군 창설 이후에는 제2지휘소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무정 장군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남로당 출신 고위간부였던 박병엽이다.

그는 ‘무정 장군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뛰어났지만 정치적인 면은 부족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권력욕은 있었으나 김일성보다 계책을 꾸미고 무자비한 숙청을 하는 그런 무자비한 인물은 못 된다는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무정 장군에게 시련이 닥쳐온 것은 6.25남침전쟁 시기였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락을 받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김무정 장군을 제2군단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용맹스런 무관기질과 중국 팔로군시절에 떨친 명성으로 그는 민족보위성 부상,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도 겸했으며 1950년 9월에는 평양지구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가 이끄는 제2군단이 1950년 11월에 낙동강지역에서 여러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자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어 7군단장으로 후방지역인 자강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강도 만포시 지역을 순찰하다가 팔로군 출신 병사가 부상당한 것을 목격하고, 군의관인 리청산이 바쁘다는 구실로 진료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총으로 위협한다는 것이 그만 죽여 버렸다.

 

47세 나이로 사망…국기훈장 1급수여

 

결국 김일성은 1950년 12월 4일에 자강도 만포군 별오리에서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특별 전원회의에서 낙동강 패전책임과 명령 불복종, 군의관 사살 등의 죄명으로 무정 장군을 해임 철직시켰다.

해임 철직된 무정 장군은 195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더 심해지자 당시 중국지원군 사령관으로 북한에 나와 있던 팽덕회의 주선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서 중국인민군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병세는 더 악화되었고 다시 북한에 귀국해 치료를 받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무정은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미 해임 철직되었던 관계로 간부들이 치료를 받는 병원에 입원 할 수 없었다. 인민군 일반병사들이 입원하는 인민군 39호병원에 입원, 1952년 10월에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무정 장군의 죽음은 곧 북조선 권력의 한 축이었던 연안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그가 해임 철직되면서 그가 주축이었던 중국공산당 계열의 연안파는 1956년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숙청과정에서 정치권력 경쟁구도에서 사라져버렸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에서 반일독립운동에 공헌한 무정 장군의 역할과 중국공산당과 홍군에서 그가 활약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선인민군 육군대장과 민족보위상이 추서, 국기훈장 1급이 수여되었으며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자기의 정치적인 적수로 간주하고 구실을 붙여 숙청했지만 김일성은 그의 업적마저 묵살해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그의 딸 등연려 씨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해외무역총공사 종합업무부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무정 장군이 중국 홍군에서 포병사령관으로 활약하였던 1938년에 산하 포부대의 정치위원이었던 중국인 여성 등기와 결혼하여 출생한 1남1여 자녀 중의 맏딸(장녀)이다.

연안파의 대표인물로 잘 알려진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 포병연대 사령관이었고, 해방 후 북한에서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김일성과 권력암투를 벌릴 정도로 유명했던 무정 장군의 생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김형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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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9 [15:1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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