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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주민 인권개선…동포들에 자유를 주자는 데는 왜 인색한가?”
[통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환 대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8/30 [12:54]

지난 4월 판문점 남측지역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미국 대통령과 북한최고지도자가 만났다. 이 모든 것이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가령 북한에 핵이 없다면 혹은 만들지도 않았다면 이러한 그림은 없었을 것이다.

북한에 체제유지 목적의 핵이 있다고 가정하자. 허면 그 체제는 핵으로 지킬 만큼이나 불량스럽다. 어쩌면 북한이 핵을 가졌다는 것은 주민들의 인권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이 ‘민족의 파멸을 촉구할 핵 보유는 반대한다’고 노동당을 비판하는 작은 소리만 있어도 그것이 확산되어 체제전복이 두려운 독재정권이다.

70여 년간 그런 절대적인 독재정권 속에 무지몽매하고 굶주리며 사는 북한주민들이다. 사실 2천만 인민에게 참다운 자유와 인권을 주는 것이 북핵 폐기보다 더 중요하다. 많은 북한인권단체들이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다.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52년 5월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1975년까지 살았다.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1990년대 모 여행사에서 근무했다. 마침 그 즈음 한중수교가 되었으며 중국에서 3년간 일하면서 개인사업 구상을 가졌고 1994년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당시 조선일보 주최로 중국 동북3성을 순회하는 ‘고구려벽화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걸 보려 한국에서 관광객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그들을 대상으로 무엇을 해도 될 듯싶었다. 중국은 인구 13억의 나라이다. 하다못해 연필 한 자루씩만 팔아 1전씩만 남겨도 엄청난 돈이 될 거라 보고 문구류사업을 생각했다.

▶첫 북한주민을 만난 것은

장백현 호텔에 한국관광객들과 투숙했을 때이다. 평양만수대창작사에서 나온 화가 2~3명이 함께 투숙했는데 그 중 누가 ‘조선화’(동양화) 강매를 부탁하더라. 가로·세로 30×50 사이즈의 풍경화인데 200달러를 달라고 했다. 관심 없다고 하자 값이 50달러까지 내렸다. 한국관광객들에게 호소하여 생필품이며 여비까지 마련하여 200달러 이상 주었다. 그림은 필요 없었지만 동포의 가난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평양 화가들을 만나 후 몇 달 뒤, 북한 회령이 잘 보이는 지역으로 여행을 갔었다. 어느 날, 여관주인의 소개로 회령에서 넘어 온 21살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남한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물었다. 반대로 내가 묻는 북한소식은 잘 모르겠다고 하던데 어려서부터 그런 문화 속에 살았기에 몸에 배인 습관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졌나?

내가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북한의 혜산과 회령은 적막한 도시였다. 밤에도 불빛이라고는 김일성 동상과 사적관에나 겨우 들어오고 집집마다 연탄불 피우는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마치도 남한의 1960년대 수준을 방불케 했다.

더욱이 연길시내 시장을 돌아보면서 북한 꽃제비(방랑소년)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에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중국 사람들이 “북한거지들이다”는 소리에 격분을 금할 수 없었다. 꽃제비들은 우리 동포의 자녀들이 아닌가? 그것을 보면서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연길시내 시장을 돌아보면서 북한 꽃제비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에서 너무 큰 충격 받아

중국 사람들이 ‘북한거지들이다’ 소리에 격분

꽃제비들은 우리 동포의 자녀들이 아닌가?

그때 북 주민 인권위해 뭔가 해야겠다 결심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데 글(서류), 증언(육성), 사진(동영상) 등의 방법이 있다. 그 중 사진이 효과적인데 그건 생명의 위협이 뒤따른다. 또 다른 방법은 북한주민이 그린 그림이다. 사진과 그림이 주는 효과는 말과 증언보다 효과적이다.

국제사회에 북한주민과 사회의 실상을 고발하는 말과 증언은 번역과 통역이 있어야 하지만 사진과 그림은 전혀 그렇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관심을 가진 것이 그림이었다.

▶장길수 가족을 알게 된 계기가 그림이겠다.

중국에서 알고 지내던 최 모 조선족여인이 있었다. 북한에 친척이 있는데 예전부터 북한방문 때마다 내가 그녀에게 국제사회에 알릴 목적으로 북한실정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오라는 부탁을 조심스럽게 했다.

사진은 위험하니 못 내오고 대신 고난의 행군시기에 북한주민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중국 친인척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수십 통 가지고 나왔다. 그녀한데 어느 날 탈북꽃제비 중에 그림소질이 있는 아이가 있다는 전화가 왔다.

 

중국에서 알고 지내던 조선족여인에게

국제사회에 알릴 목적으로 북한실정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오라고 부탁

 

사진은 위험하니 못 내오고 대신 고난의

행군시기에 북 주민들이 어려움을 중국

친인척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수십 통 가지고 나와…탈북 꽃제비 중에

그림소질 있는 아이가 있다는 연락받아

 

회령에서 탈북해 중국 연길, 장춘, 대련 등

농촌에 들어가 은신해 있던 장길수 가족의

피신 3년 동안 도와…국제사회에 이 가족들

통해 북한의 주민탄압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그 아이가 장길수인가?

그렇다. 당시 나는 한국에 있었는데 만사를 제치고 즉시 중국 연길로 날아가서 그 아이(장길수, 당시 17살)와 가족을 만났다. 장길수 가족은 부모와 친인척 등 모두 4가족에 16명이었다. 그들은 회령에서 탈북 하여 중국 연길, 장춘, 대련 등 농촌에 들어가 은신해있었다. 중국에서 3년 동안 장길수 가족의 피신을 도왔다.

당시 1인당 위조여권을 만들어 중국에서 벗어나 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데 만도 최소 수 백만 원이 든다.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무엇보다 국제사회에 장길수 가족을 통해 북한당국의 주민탄압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 실현이 중국 내 유엔사무소 진입인가?

그렇다. 먼저 장길수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7명이 움직여 중국 주재 UNHCR사무소에 진입했다. 그 전까지 연길에 숨어 있는 길수가족을 도와달라고 수차례 호소했지만 끔쩍하지 않은 유엔사무소다. 5번이나 소장을 만나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방법으로 일본 기자들을 대동하고 UN사무소에 진입했다.

 

 

운이 좋게도 7명은 유엔사무소에 진입한지 4일 만에 남한 땅을 밟았다. 남은 두 가족 중 한 가족은 몽골로 해서 한국에 입국, 남은 한 가족은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한미네 가족인데 보위부의 고문을 받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00호 관리소’라고 불리며 보통 수백 명씩 수감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데 주로 북한에서 굵직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거나 체제를 비판한 외국유학생 등 이른바 반동(정치범)들이다.

수감자들 지은 죄 중에 가장 무서운 죄가 김 씨 일가를 의심하거나 비난, 욕설한 것이다. 심지어 김 씨 수령의 동상이나 사진을 고의적으로 훼손해도 정치범에 속한다. 물론 남조선으로 도망가려 했어도 정치범이다.

정치범은 경제범(일반 범죄자로 살인, 강간, 방화, 사기, 절도, 폭력 등)보다 2~3배나 되는 긴 수감생활을 한다. 그들에게 차려지는 밥이래야 쭉정이 옥수수국수를 푹 끓인 멀건 죽 한 그릇이 전부다.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이 기본이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북한에 끌려갔던 한미네 가족은 수개월 만에 북한을 재 탈출하였다. 그리고 다시 연변에 들어왔다. 문 대표는 또 다시 있는 돈 없는 돈 굵어 모아 중국으로 날아갔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안심시켰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찾아낸 방법이 일본대사관 진입이다. 지금 인터넷상에 외국공관으로 진입하려는 아기(김한미, 당시 2살)를 업은 엄마와 그 남편이 필사적으로 중국공안과 대항하는 장면이 바로 한미네 가족이다. 다행히 한국에 왔다.

 

탄압 구제 실천이 중국 UNHCR사무소에 진입

연길에 숨어 있는 길수가족 도와 달라 수차례

호소했지만 끔쩍도 하지 않았던 유엔사무소

최후 방법으로 일본기자 대동 UN사무소 진입

 

▶북한인권국제연대는 언제 만들었나?

지난 2002년 북한주민들의 인권개선을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설립했다. 미국의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솔티가 미국대표, 남신우 재미교포가 세계대표, 우리 세 사람이 공동대표로 되어있다.

현재 미국, 일본 등 국내외에서 ‘북한인권전시회’ 등을 열어 북한주민들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나?

장길수의 그림을 서울에서 열린 세계NGO대회에서 전시회를 하였다. 당시는 정권이 북한의 눈치를 보며 탈북민들의 활동을 별로 반기지 않던 때이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하였다. 그 그림 전시회는 미국 뉴욕본부와 한인교회에서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국제사회에 조금이나마 알렸다는 것에 의미가 깊다.

▶숙원사업이 있다는데 무슨 소리인가?

림 작가가 봐서 알겠지만 이곳은 우리 단체 사무실 겸 북한인권전시장이다. 서울에 하나뿐인 희소성이 많은 시설이다. 여기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은 그동안 장기수 가족 구출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 가족이 사용한 기차표, 숙박영수증, 전화카드, 편지, 언론에 소개된 기자회견 자료 등인데 전부 수백 종에 이른다.

이 소중한 자료를 국가나 혹은 지자체(서울시)에서 소장·관리했으면 좋겠다. 훗날 통일이 되어서 후대들에게 현시대 남북의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어떻게 살았는지 생동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현 정권에서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럴 수 있겠다고 본다. 문제는 정치인들을 비롯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다. 솔직한 말로 보수정권, 진보정권 할 것 없이 언제 그들이 진심으로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실효적인 대책을 세웠던 적이 있는가? 전부 선거 때 자신들의 당선과 재선을 위해 북한, 통일, 탈북민 등을 팔고 또 팔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안보의 중요성은 뭐라고 보나?

안보가 뭔가? 국가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북한은 항상 우리를 노리는 집단이다. 북한을 잘 아는데서 3만 탈북민보다 나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들의 말에 국민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요즘 정권 사람들이 평양과 김정은에 대해 귀맛 좋은 소리를 많이 하는데, 그것도 맞겠지만 탈북민들의 소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 대표의 안보관은 뭔가?

내가 여러 행사장에서 북한인권소리를 하면 일부 사람들이 “그러면 북한과 전쟁을 하자는 소리인가?” 라고 한다. 기가 막히다. 그러면 나는 “전쟁! 자유를 지키려면 전쟁도 해야 한다. 동포인 북한주민에게 자유를 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라고 한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는 분명 피와 바꾼 것이 확실한데, 그 자유가 좋다고 말을 잘하면서 북한 동포에게 자유를 주자는 데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사람만큼 이기적인 동물도 없다고 본다.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은 구출에 관련된 것들

가족이 사용한 기차표, 숙박영수증, 전화카드,

편지, 언론에 소개된 기자회견 자료 수백 종

이 소중한 자료를 국가나 혹은 서울시에서

소장·관리했으면 바라…훗날 통일이 되어서

후대들에게 북한사람들 어떻게 자유를 찾아

살았는지 생동하게 보여줄 필요 있다고 생각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보는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상회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그에 앞서 지금의 정부가 진정으로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북핵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현 정권의 슬로건이 ‘사람이 먼저다’고 하는데 그러면 헌법에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고 우리 동포라고 명시되었는데 북한 주민은 사람이 아닌가?

현 정부의 100대 정부과제가 있는데 여기에 90번째 이후에 탈북민과 국군포로 문제가 있다. 어쩌면 관심 밖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다. 말로는 우리 동포요, 통일이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무관심 속에 있다는 소리이다. 그깟 입으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림 작가도 탈북민으로써 체감이 되지 않던가?

▶고마운 사람이 누구인가?

가족이다. 아내는 보모(아이를 돌보는 일)로 일하는데 그 수입의 일부를 내가 단체 운영기금으로 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세 자녀는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을 했는데 어쩌면 내가 북한인권운동을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가 수십 년째 장길수 가족구출 및 정착도움활동, 북한인권개선운동을 하고 있으니 어려서부터 자립성을 갖고 성장하였다. 어쩌면 내게는 잘 된 일이었다. 내가 돈 많이 벌어 아이들 뒷바라질 해준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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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30 [12:54]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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