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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현주소를 찾는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숙청<1>
조국독립 위해 일제와 투쟁으로 맞서 싸워/애국지사들과 거리를 둔 무장투쟁론 펼쳐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09/13 [13:16]

김원봉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와 무장투쟁으로 맞서 싸웠다.

선생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다.

 

밀양 출생…중국 길림서 의열단 조직

 

1898년 9월 28일에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 올라와 중앙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중국에 건너가 1918년에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김원봉은 유난히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는 일본 천왕 메이지 생일날에 동창들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던져 버리기도 했다.

지금도 경상남도 밀양에 가면 김원봉의 생가 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밀양독립운동가연구소가 제작하여 설치한 생가 터 기념비석이 있다. 기념비에는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의열단장, 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총대장, 광복군 부사령,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신 밀양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선생님께서 태어나신 유서 깊은 곳입니다’라는 글발이 새겨져 있다.

김원봉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반일 감정과 독립정신을 확인하고 크게 감동하여 그해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이종암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김원봉에 의해 결성된 의열단의 반일애국투쟁은 그들이 내세운 7가살(七可殺)과 5곳의 파괴 대상지를 보고도 잘 알 수 있다.

7가 살은 암살해야 할 7가지의 대상 분류인데 첫째 조선총독과 조선총독부 내 일본 고관들, 둘째 일본 군부 수뇌, 셋째 대만총독, 넷째 매국노, 다섯째 친일파 우두머리, 여섯째 일본놈 밀정, 일곱 번째 악질적인 지방 관리 등이었다. 그리고 파괴 대상지 5곳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일본이 관리운영하는 중요기관들이었다. 의열단 단원인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에 부산경찰서를 폭파했다. 최수봉은 그해 12월 27일에 밀양경찰서를, 김익상이 1921년 9월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하는 등 당시 일제식민지통치기관들을 연쇄적으로 폭파하였다.

 

항일독립운동 핵심인력으로 활약

 

1921년 3월 5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에는 의열단 단원이었던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실을 ‘밀양의 폭탄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실기도 했다.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 많은 의열단 단원들도 일제의 고위장교 처형과 관공서들을 폭파하였다.

일제와 소규모적인 투쟁으로는 조선독립을 성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의열단의 핵심성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나서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사격과 폭탄 제조, 투척 방법 등 군사 지식을 배운 단원들에게 김원봉이 강조한 말을 봐도 그의 반일애국의지를 잘 알 수 있다. ‘조선총독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해마다 2번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정식 명칭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는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로서 중일전쟁과 국공내전당시에 활약한 중국의 많은 군사가들이 이 학교출신이다.

장개석이 초대 교장이었고, 주은래가 정치부 부주임이었던 것으로 하여 김원봉은 그들과도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인연을 맺은 장개석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인력으로 활약한 150여 명의 애국인사들을 직접 육성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원봉이기에 일제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내건 현상 액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당시 100 만원이면 지금 시가로 대한민국 돈으로 약 300억원이 된다.

미국달러로 약 3천만 달러가 되는 셈이다. 북한에도 잘 알려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의 현상금보다 김원봉에게 걸었던 현상금이 2배나 더 많았다는 사실은 일제가 얼마나 그를 두려워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 당시 소련으로 도망가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조국광복보다 소련공산당을 위해 복무한 김일성에게는 1전의 현상금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은 김일성보다 김원봉의 반일애국투쟁이 얼마나 더 맹렬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광복 전까지 반일애국투사로 활동

 

김원봉은 일제에 의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10월 10일에 새로운 반일 독립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결성하고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총독부 정보기관의 자료에 김원봉이 1937년 7월 10일에 당시 중국을 대표하였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초청으로 남경에 초대되었고, 김구와 함께 조중 반일통일전선 결성을 중국정부로부터 권유 받기도 했다.

1942년에 의용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 이후 그는 광복 전까지 이 직책에서 반일애국투사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은 평안도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1931년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이었던 박차정과 결혼했다. 둘째 부인인 박차정도 1939년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 후유증과 관절염으로 1944년에 사망하였다.

이어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동선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두 아들 김중근과 김철근은 김원봉이 숙청되면서 함께 피살되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폭력투쟁과 무력항쟁, 유격전 등으로 일제를 몰아낸다는 그의 폭력투쟁론은 당시 안창호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내세운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 위임통치론과는 거리를 둔 무장 투쟁이론이었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고위간부들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처음에는 대한민국에서 새 국가건설에 투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공산빨갱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과 경찰의 고문을 받다가 북한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던 불우한 애국지사였다.

1920년대 초에 김원봉이 신채호에게 부탁하여 집필한 의열단 강령인 ‘조선혁명선언’에는‘민중은 혁명의 대 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라는 내용이 있다. 이 선언 마감부분에는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는 민족혁명당 강령에서도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국민경제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반일애국투사 김원봉이 바라던 조국은 김씨 일가의 3대 세습에 너무도 다른 세상이 됐다. 김형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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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3 [13:16]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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