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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평양으로 돌아갈 날 그리는…‘통일을 연주하다’
[인터뷰] 국내 유일의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탈북민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1/29 [13:34]

지역사회 시민단체에서 마련한 ‘통일과 문화, 그리고 우리의 역할’ 이라는 주제의 토크콘서트에 초대받아 갔다.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 한 탈북민은 3명이었다. 한 명은 북한 지방대학 교수출신이고 다른 한 명은 나와 같은 고향인 평양출신의 젊은 음악인이었다.

평양출신의 후배가 예전에 통일문화 토크콘서트에 함께 출연했던 박성진 소해금 연주자다. 여러 탈북민 단체의 활동을 취재하면서 특히 탈북음악인들의 공연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남한에서 오래전부터 사라지는 전통 민속공연의 명맥을 탈북민들이 지켜간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도 이것은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지향할 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끝자락을 향해 간다. 얼마 전 서울에서 국내 유일의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독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71년 4월 평양시 보통강구역에서 태어났다. 현재 평양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인 105층 류경호텔이 보통강구역에 소재하고 있다. 형제는 내 위로 누이 3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평양의 김책공업종합대학 화학학부 교수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나는 11살 때 ‘평양예술전문학교’(예능수재양성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예술전문학교는 이후 ‘평양예술학원’ 다시 ‘평양예술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에 소재하고 있으며 나는 민족기악학부에서 9년간 소해금 연주 공부를 하고 1991년에 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싶었다. 북한에서는 남자들이 입당을 해야 떳떳하다. 입당하기 쉬운 곳은 바로 군대이다. 하여 지인의 인맥을 동원하여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선전대에 입대희망의사를 표시했고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입대하였다. 군복을 입고 유급선전대(전문예술 활동하는 단체)인 여기서 4년간 근무하였다.

조선인민군의 총참모부 선전대 입대

군복을 입고 유급선전대 4년간 근무

동계훈련기간(12월~3월) 위문공연

선전대는 대장, 연출가, 지휘자, 작가

편곡자, 대원들까지 포함 대략 20명

▶자세히 말해준다면…

총참모부 산하에는 군 단급 부대도 있고 직속 부대도 여러 개 있다. 대열보충국, 통신국, 작전지도국, 총무국, 사관양성소 등이다. 이런 곳으로 공연을 나간다. 내용은 90% 이상 김일성·김정일 찬양 노래와 춤, 화술, 기악연주다.

주로 동계훈련기간(12월~3월)에 위문공연을 많이 나간다. 선전대는 대장, 연출가, 지휘자, 작가, 편곡자 그리고 대원들까지 포함해 대략 20명 정도의 인원이다. 선전대원들에 대한 후방사업(부식물공급)은 양호한 편이었다.

▶공연할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

산하 부대에 나가 공연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군인병사(사병)들의 초췌한 모습이다. 말이 군인이지 남한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보다 작은 체구의 모습이다. 거기에 영양섭취를 제대로 못해 얼굴이 새까만 모습을 보며 ‘나는 그래도 평양에서 인민군총참모부 선전대에서 군사복무 하니 호강을 하누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한 일이 있었다면…

어느 날, 지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갔다. 고위 간부 집이었다. 하객들이 술에 취하자 날보고 연변(남조선)노래를 불러 보라고 하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남조선노래 ‘칠갑산’ ‘개똥벌레

부대에 나가 공연을 할 때마다 느끼는

군인병사들 초췌한 모습…남한 중학생

고등학생보다 작은 체구에 영양섭취를

제대로 못해 얼굴이 새까만 모습 보며

인민군총참모부 선전대서 ‘군사복무

하니 호강 하누나’ 하는 생각이 들어

등을 불렀는데 하객들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며칠 후 보위부로 끌려갔다. 그날 내 노래를 들은 결혼하객 중 누군가가 나를 보위부에 고발한 것이다. 분명 노래를 부른 나와 들은 사람 모두 똑같이 처벌해야 하는데 대부분 간부들이어서 묵시했다. 나는 3.3㎡짜리 독방에 감금되었고 40일 후 ‘여기서 있었던 일을 비밀로 지키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났다.

이후 황해남도 태탄군에 있는 사금채취사업소에 내려가 1년간 혁명화(하루 14시간의 노예노동을 하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것)를 했다. 이후 총참모부 사관양성소 6개월 교육과정을 마치고 본 양성소에 배치 받아 고정사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2000년 9월 제대하면서 장철구평양상업대학에 입학하였다.

▶평양에서의 대학생활을 말해 달라.

평양의 각 대학마다 선전대(예술공연단)가 있다. 단원(학생)들은 학교의 정규수업을 받으며 유급선전대는 아니다. 단원은 예술기량이 있는 학생들로 20~30명 정도이다. 나는 대학생활 4년 기간 ‘장철구평양상업대학’ 선전대장을 하였다.

선전대의 활동은 주로 대학생들이 학교당국의 절대적인 지시에 따라 강제로 동원되는 농촌지원전투장, 집단체조훈련장, 사회건설현장 등을 방문하여 노래와 춤, 화술, 기악연주로 근로 노력고취 공연을 하는 것이다.

▶수업은 어느 정도 하는가?

2~3일에 한 번 꼴로 수령(김일성·김정일) 역사과목 수업이 있다. 대학생들은 수령의 출생과 인품, 국가관, 도덕성, 혁명사상, 인민관 등을 심오하게 배운다. 수령역사 교과목은 일반 인문, 자연, 기술 과목보다 비중이 크다. 연중 전체 수업시간의 절반 정도가 사회적인 노력동원(농촌, 건설장 지원)으로 대체한다.

평양의 각 대학마다 선전대가 있어

단원들은 학교의 정규수업 받아야

단원 예술기량 있는 학생 20~30명

4년간 ‘장철구평양상업대’선전대장

평양에서 2개의 대학을 졸업한 탈북민 박성진 씨는 ‘1990년대부터 평양의 대학가에서는 암암리에 남조선영화 붐이 거세게 불었다. 남조선영화 제목 한두 개를 모르는 학생들은 ‘모서리’(왕따) 취급 받았다’고 했다. 각 대학교에서는 자체 규찰대(단속반)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학생들을 통제했다.

2002년 여름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그해 가을 5월1일경기장에서 있을 평양시청년학생들의 대집단체조 ‘아리랑’ 훈련을 하던 성진 씨에게 특이한 일이 생겼다. 하루 7~8시간의 고된 훈련연습 중 어느 날 휴식시간에 대열훈련 책임자가 “장철구평양상업대학 선전대장 동무! 멋진 노래를 불러보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박성진 씨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노동당 찬가를 불렀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책임자가 하는 소리는 “야! 이 새끼야. 그런데 노래는 왜 남조선 창법으로 불러?”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마치도 반동취급 당했다. 이때부터 그는 마음속으로 공화국에서는 자신의 재능이 피어날 수 없겠다고 실망했다.

2004년 ‘장철구평양상업대학’ 졸업과 동시에 부친이 “아들아! 이 사회에서는 네 재능이 피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우리 남조선으로 가자!”고 말했다. 어쩌면 성진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니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해 가을 일가족 모두가 청진과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넘었다. 2004년 10월 초였다.

처음 간 곳은 연길, 이어서 하얼빈, 거기서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중국공안당국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성진 씨는 북경의 모 라이브카페에서 가수로 활동하였다. 이때 남한노래를 실컷 불렀다. 그렇게 온 가족의 남한 행 여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2005년 9월 몽골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2007년 장윤정의 타이틀곡 ‘첫 사랑’

‘애가 타’ ‘초혼’에 해금소리 삽입해

‘동이’ ‘짝패’ 등 OST 작업에 참여

서울시립, 부산시립합창단과 협연

미국, 캐나다, 영국 등 해외공연도

▶남한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2006년 1월 하나원을 나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는 평양에서 실컷 했으니 서울에서는 실컷 노래하고 연주하고 싶었다. 제대로 된 음악을 말이다. 처음 오디션을 보고 들어간 곳이 남한의 인기가수 장윤정 씨 소속 기획사였다.

2007년 장윤정의 타이틀곡 ‘첫 사랑’ ‘애가 타’ ‘초혼’에 소리를 삽입했다. MBC 드라마 ‘동이’ ‘짝패’의 등의 OST 작업에도 참여했다. 2010년 서울시립합창단, 부산시립합창단 등과 협연했고 미국, 캐나다, 영국 등 해외공연에도 나섰다.

▶소해금은 평양예술대학에서 배웠나?

그렇다. 동시에 성악도 배웠다. 대학 졸업 후 활동은 주로 성악으로 했다. 북한에서는 음악인이 자기 하고 싶은 악기를 선택할 수 없다. 보편적으로 전국 중·고교를 순회하며 학생을 선발해 예술대학에 입학시키는데 이때 ‘인물심사’(면접)를 하고 악기를 지정해준다. 개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악기가 정해지는 것이다.

▶본인에게 소해금 연주가 만족했나?

나는 10대 시절에 처음 소해금을 지정받고 너무 창피해서 울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남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보다 소해금이라는 독특한 악기를 연주하게 된 것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대로 생각해보면 소해금은 나에게 운명 같은 악기이다.

참고로 남한에서 전통 국악기는 도레미솔라 5개음만 내기 때문에 서양악기와 협연하면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음악계의 현실이다. 그에 비하면 북한의 민속 악기는 개량하여 다른 악기들과 협주가 잘되는 특징이다.

▶북한의 민족 악기에 대해 소개해 달라.

북한은 1950년대 후 기존 전통국악기를 개량해 서양음악연주가 가능한 ‘민족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해금은 소해금, 중해금, 대해금, 대금은 고음저대, 중음저대, 저음저대로 나눴다. 가야금은 12현에서 21현으로 늘렸고, 장새납은 태평소를 개량해 관대가 더 길다. 옥류금과 어은금 같은 새로운 형태의 악기도 만들었다.

▶더 자세하게 말해 준다면…

소해금은 북한이 1960년대 초 전통악기인 해금을 개량해 만든 악기인데 해금과 바이올린 소리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해금은 2줄인데 소해금은 4줄인 것이 차이다. 소해금은 대부분 여성들이 많이 연주하는 악기이다.

남한의 해금은 2개의 현으로 이뤄졌지만, 북한의 소해금은 4현으로 이뤄져있어 소리의 폭이 더 넓다. 해금과 바이올린 소리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단 이후 남북의 음악이 서로 다른 발전양상을 보여 왔다.

 

남한의 음악은 장르가 무척 다양해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 마음껏 할 수 있어

연주기량을 인정받고 악기의 희소성

더해지면서 러브콜 받아 자랑스러워

 

▶한국에서 유일한 소해금 연주자다.

내가 서울에 와 보니까 남한의 음악은 장르가 무척 다양해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나 역시 남한에 왔기에 내가 하고 싶은 소해금 연주를 한다고 본다. 연주기량을 인정받은 데다 소해금의 희소성까지 더해지면서 많은데서 러브콜을 받는다. 대한민국에 유일한 소해금 연주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체험자로써 북한의 음악을 어떻게 보나?

북한의 음악가들은 전부 국가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가수가 아니어도 목소리가 괜찮으면 중창조에 소속되어 노래를 부르고 악기도 함께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철두철미 당국의 철저한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수령(최고지도자)의 일가를 경쟁적으로 찬양하는 음악일색인 북한에서의 진정한 음악은 없다. 예술인의 자유가 없이 당이 지정해주는 사상위주곡만 노래하고 연주하니 그것을 과연 어떻게 진정한 음악예술이라고 하겠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통일이다. 우리 3만 2천여 탈북민을 포함한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의 간절한 소원이 아니겠는가? 하루 빨리 통일돼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통일이 되면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김 씨 수령 일가를 칭송하는 음악이 아닌, 우리네 삶의 정서를 표현하는 소해금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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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29 [13:34]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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