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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노래…“한국서 사람답게 사는 것 자랑하고 싶어요”
[인터뷰] 65세이상 실버 탈북민으로 구성된 ‘통일아리랑예술단’ 강용주 감독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2/20 [14:53]

<림일 탈북작가>

2018년 탈북민 3만 2천명 시대,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다. 서울과 수도권, 각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통일관련 행사 때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탈북민 구성 예술단 중에는 탈북민 실버(노인)들로 구성된 공연예술단도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기독교 탈북민정착 지원협의회에서 매월 열리는 조찬기도회에서 만나는 ‘통일아리랑예술단’이다. 단원들은 평균 65세 이상으로 노년에 대중 앞에서 민속적인 음악에 맞추어 열정의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정열적인 ‘통일아리랑예술단’을 보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연로한 나이에 요양원이나 병원을 드나드는 어르신도 적지 않은데 대중 앞에서 밝은 모습으로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와 춤을 보인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

지긋한 연세에 젊은이들도 두려워하는 그 위험한 탈북을 성공한 것도 뭇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일인데 왕성한 예술 활동까지 펼친다. ‘통일아리랑예술단’ 강용주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인가?

1947년 1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69년 함남 신포시 소재 신포조선소 소속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포어류통조림공장’에서 8년간 일을 하였다. 그 공장은 김일성이 두 번이나 현지 지도(시찰)한 북한의 수산분야에서는 최고의 자동화 생산시설로 꾸며진 공장이다.

당시 북한에 10억 루블 빚진 소련이 동독에서 수입한 현대화설비의 두 개 수산공장 중 하나를 북한의 신포에 지어준 것이다.

▶당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어떠했나?

내가 신포에서 살았던 1970년대 중후반까지 주민들에게 식량(쌀, 옥수수, 밀, 보리 등)을 배부를 정도는 아니어도 꼬박꼬박 주었다. 그러니 직장에 결석하는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사람들은 당에 충성하는 것을 최고 임무로 여겼다.

신포는 함경남도 동해안 중부에 위치해 있는 해안도시이다. 수산사업소마다 명태가 너무 많이 잡혀 도시마을의 집집마다 2~3톤씩 강제로 배급해주었다. 겨울이면 신포시 전체가 명태에 묻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은 왜 명태가 없나?

1960년대 말 김일성이 북한 수산부문을 시찰하면서 “들어오는 물고기 떼를 맞받아 가면서 잡고, 나가는 물고기를 따라가며 잡고, 먼 바다에서도 잡고, 가까운 바다에서도 잡고, 이것도 잡고, 저것도 잡아라!”고 교시했다.

김일성의 교시는 곧 법이다. 그때 북한의 동해안 생태환경이 파괴되었다. 먼 훗날을 보면서 보존해도 안 될 판인데 수령의 교시를 관철한다며 물고기 서식지대까지 초토화해 버렸다.

▶신포에서 왜 8년 만 일했나?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어느 여성노동자는 전쟁 때 남에서 북으로 올라온 의거 입북자였다. 그녀에게 나와 동갑의 아들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당위원회에서 불러 갔는데 그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다.

이유가 뭔가 물었더니 “우리 공장은 수령님의 현지지도 단위이니 남조선출신 사람들을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계속 그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것이 문제라며 나를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광산으로 추방하였다.

 

함북회령 출생…‘신포어류통조림공장’ 8년 일해

1970년 후반까지 주민들에게 쌀, 옥수수 등 배급

직장에 결석하는 사람 없었고 당연히 당에 충성

 

신포는 함남 동해안 중부에 위치해 있는 해안도시

수산사업소마다 명태가 너무 많이 잡혀 도시마을

집집마다 2~3톤씩 강제 배급…겨울이면 신포시가

명태에 묻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요로워

 

▶그 곳에서 얼마나 있었나?

5년간 지하에 들어가 광석을 채굴했다. 정말 힘든 일이다. 북한은 당국에서 주민들 개인의 직장을 결정해주며 이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안 그러면 ‘혁명의 반동분자’로 매도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다.

고된 광산 일을 계속하기 싫었다. 하여 뇌물공작(노력배치 담당자에게 금품을 주는 것)으로 광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고향인 회령에 와서 곡산(식료)공장에서 일했다.

▶ 회령은 김일성 부인의 고향이 아닌가?

맞다. 1960년대 후반 회령에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동상이 세워졌다. 어느 날 평양에서 투사(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지)들이 내려와서 “동상의 크기가 작으니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하였고 그대로 집행되었다.

처음 세워진 조선옷 입은 동상은 김정숙 사범대학에 옮겨졌고 새로 만든 동상은 김정숙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시내 모처에 크게 세워졌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김정숙의 남동생 김오송의 동상도 김오성고등학교에 세워졌다.

 

60년대 말 김일성이 수산부문을 시찰하면서

‘들어오는 물고기 떼를 맞받아 가면서 잡고,

나가는 물고기 따라가며 잡고’등 현장 교시

그때 동해안 생태환경 파괴…서식지 초토화

 

▶그것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나? 싶었다. 동상은 역사 인물 중에 만인의 추앙을 받을 정도의 업보가 있는 특정인으로 만드는 것인데 살아있는 김일성 동상도 이해가 안 되었고, 부인이나 처남동상까지 세우니 너무 한심스러웠다. 허나 그런 기색을 표출만 해도 처형되는 북한사회이다. 북한전역에 동상, 사적관, 기념비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부터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서이다.

▶좀 더 말해 달라.

1970~80년대 북한에는 전국서 수령(김일성·김정일)에게 진상품을 올리는 풍조가 만연했다. 1989년 평양서 있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외국귀빈들에게 줄 선물(미술, 도자기, 수예품)을 각 지방의 창작사에 강요했다.

그래도 선물이 모자라 전국의 1·2급 공장기업소에 할당량이 떨어졌다. 회령곡산공장은 1급 기업소이다. 젊어서부터 조각기술이 있었던 내가 5년간 약 40점의 옥돌공예를 만들어 평양에 상납했다. 당의 명령이니 따라야 했다.

 

80년대 수령에게 진상품 올리는 풍조 만연

89년 평양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외국귀빈들에 줄 선물 지방 창작사에 강요

선물이 모자라 전국 1·2급 기업소에 할당

조각기술이 있었던 내가 5년간 약 40점의

옥돌공예 만들어 상납…당의 명령 따라야

 

▶그에 대한 보상이나 표창은.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이 끝나고 평양에서 어떤 간부가 내려오더니 ‘당중앙에서 주는 선물’이라며 타이쯔(남성용 얇은 나일론셔츠) 1개와 500원이 든 봉투를 내놓았다. 당시 내 한 달 봉급이 100원 정도였으니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 돈으로 시장에서 술, 고기, 담배 등을 구입해 동료들과 회포를 나누었다. 아마도 내가 평양에 올린 공예선물을 돈으로 환산하면 수 만원 어치는 족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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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주 감독은 청년시절에는 물론 장년시절에도 ‘조선노동당 입당’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 사회에서 본인과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입당을 해야 좋겠지만 일반주민들보다 당에 대한 충성심이 더 많아야 하는 당원은 싫었다. 정신적 및 정치적으로 온갖 행사와 학습, 조직생활에 시달리는 것이 마음에 없었다.

언젠가 부분당비서가 “강 동무! 이제는 노동당에 입당해야 하지 않을까?” 하며 권장을 받았다. 그러면서 초급당 비서 방에 녹음기(오디오) 한 대를 바쳤으면 한다고 했다. 일종의 뇌물강요이다. 화가 난 강 감독은 “아니? 위대한 수령님의 당에 드는 것을 외제물품을 바치고 하랍니까?” 하며 대번에 거절했다고 한다.

강용주 감독은 눈시울을 적시며 고난의 행군시기(1996~1999)를 회고했다. 그가 40여 년 살았던 회령 동네서 만도 150가호가 70가호로 줄었다. 80가호가 굶어죽거나 행방불명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중국으로 도강(탈북)을 했다. 국가에서 주는 배급은 전혀 없으니 그렇다고 장사를 마음대로 하라고 승인한 때도 아니었다.

그때 눈만 뜨면 내륙지대(황해도, 평안도)에서 올라온 유랑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국경을 지키던 군대들도 총을 버리고 중국으로 도망쳤던 시기도 있었다. 그도 3녀 1남 자식의 등을 떠밀어 중국으로 보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굶어죽을 것 같아 어떻게든지 살아남으라고 정신주입까지 시켜 보냈다.

이후 추방지인 산간오지에서 짐승처럼 살던 강용주 감독이다. 수년 뒤 한국에 간 막내딸한데 브로커를 통해 연락이 왔다. 보위부의 시험(브로커로 가장한 보위원이 탈북자가족 속심검사)이 아닐까 의심했고 진의를 파악하는데 수개월, 이후 중국의 연길, 대련, 베이징, 상해 등을 거쳐 2008년 12월 한국에 입국했다.

▶통일아리랑예술단을 소개해 달라.

지난 2008년 탈북민 한금복 씨 등 탈북노인들을 위주로 만들어졌다. 처음 이름은 ‘평화통일예술단’이었다. 탈북노인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어떤 형식으로든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고안해낸 방법 중의 하나다.

예술적 기량이 있는 탈북노인들이 예술단을 만들어 평소 훈련은 물론 행사장, 전국 교회 등을 다니며 전도형식으로 공연을 하는 것이다. 2011년도에 지금의 이름 ‘통일아리랑예술단’으로 바뀌었고 현재 한금복 단장이 이끈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프랑스 등

10여 개 나라 20여개 도시 방문하여 공연

어떤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손을 잡으며

‘지옥 같은 북한서 왔느냐?’며 놀라기도

 

▶공연에는 어떤 곡목이 오르나

우리 민족의 애창곡 ‘고향의 봄’을 시작으로 남북한 노래와 복음성가 등이다. ‘황금나무 능금나무’, ‘반갑습니다’, ‘통일무지개’ 등 북한음악은 아무래도 탈북민들이 좋아한다. 교회강단에서 부르는 ‘나의 등 뒤에서’, ‘북한 땅의 호산나’ 등은 교인들에게 감명을 준다. ‘다시 만납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은 관객 모두가 함께 부르는 애창곡이다. 또한 흥겨운 장단에 맞춰 추는 민속무용과 율동도 있다.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던데…

2012년부터 영국, 네덜란드,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등 모두 10여 개의 나라 20여개 도시를 방문하여 공연을 하였다. 어떤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우리의 손을 잡으며 “정말 그 지옥 같은 북한에서 왔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우리는 해외에서 공연뿐만 아니라 참혹한 북한 인권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캠페인도 함께 진행한다. 비싼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서 노래와 춤만 추고 온다면 너무나 아쉽지 않겠는가? 북한인권운동은 우리 탈북민들의 사명이다.

▶자긍심이 클 것 같다

먼 친척 중 평양만수대예술단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 1970~80년대 해외공연을 종종 나갔던 만수대예술단 배우인데 언젠가 그에게서 들은 소리는 해외공연 나가서도 전부 집단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자유롭게 외국거리를 활보한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더 훨씬 낫지 않겠는가? 나는 남한에 와서 20여개 나라 외국공연을 나가서 자유롭게 쇼핑도 하고 관광도 하니 말이다.

▶가슴에 아픈 응어리가 있는 줄 안다

큰딸이 2004년 탈북하여 중국-몽골 국경을 넘다가 체포되어 북송, 청진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지금도 생사를 모르는데 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보통 건강한 남자도 몇 달을 못 견뎌 죽는 곳이 북한의 수용소다.

둘째딸은 탈북하다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모진 고문을 받았다. 현재 장애2급으로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에게 이런 고통을 준 북한독재정권은 정말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희대의 야만집단이다.

▶감사한 일은 무엇인가?

현재 막내딸은 서울에서 회사원인 남한남자와 결혼하여 아기 낳고 행복하게 잘 산다. 외동아들은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통일아리랑예술단’에서 이 나이에도 예술 활동을 하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토록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대한민국 정부에 너무나 감사하다. 그 은혜로운 사랑을 세상만방에 아름다운 노래와 춤으로 오래도록 자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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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20 [14:53]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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