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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금강산발전소 건설현장에 묻고…목숨만큼 소중한 자유 지킨다”
[인터뷰] 북한인권운동에 열성인 탈북여성 하정옥 님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2/27 [14:49]

북한에서 군사복무 기간은 10년, 특수부대(남한의 특전사)는 13년이다. 일반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에 군대에 나가 27세 혹은 30세에 제대해 잘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대부분 집단배치가 보통이다.

말이 군사복무이지 대부분 군인들은 국가적인 대규모 건설공사 현장에 동원되는 것이 관례이다. 실제 북한에서 살았을 때 경우를 회고하여 봐도 건설현장마다 군인들이 많이 있었다. 당의 명령관철에는 민관군이 따로 없는 북한이다.

평양시 경우를 봐도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도시현대화 건설에 수많은 군인들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5월1일경기장, 충성의 다리, 통일거리, 궤도전차노선 등 크고 작은 건설대상물을 맡은 건설인력은 현역 군부대 군인들이다.

미림갑문(댐), 서해갑문(남포갑문), 각 지역의 수력발전소건설, 토지정리공사, 공장시설건립 등 지방의 대규모 건설공사에도 어김없이 군인들이 있다. 그에 대한 자료를 취재하려고 탈북여성 하정옥 씨를 만났다. 

▶고향이 어디인가?

1949년 7월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아버지는 조선인민군 항공부대장(상좌) 출신으로 제대하여 신흥식료공장 지배인으로 일을 했다. 어머니는 신흥군 여맹위원장이었다. 나는 1970년 평양에 있는 호위사령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마치고 무전수로 근무하였다.

▶어릴 때의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아버지가 1920년 생으로 경북 상주 태생이다. 이남 태생이니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로 나올 즈음 안전부에서 담화사업이라며 나를 가끔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조선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하는 질문을 자주 했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혼자서 ‘하나님 아버지’하고 중얼거리는 걸 간혹 보았다. 그래서 내가 하 씨 성이니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하나님’인줄 알았다. 그렇게 북한당국은 종교를 완전 감추었다.

▶군사복무 이야기를 해 달라.

호위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언젠가 보위지도원과 담화를 하였다. 역시나 또 아버지 탐문이다. 나는 이때 내가 호위사령부에 있을 재목이 안 되누나! 하는 직감을 가졌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1970년 평양에 있는 호위사령부에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마치고 무전수로 근무하였다.

▶당시 군인들의 생활수준은 어떠했나?

전연 지대(남한과 마주한 지역)에 주둔한 부대이어서 인지 군인들에 대한 후방물자(부식물, 피복, 생필품) 공급이 비교적 양호했다. 식량도 하루 백미 800g이었고 돼지고기와 생선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배급으로 나왔다.

기억에 남는 것은 김일성·김정일 생일이면 평양시 학생들에게 공급해주는 선물(사탕, 과자, 강정, 껌, 젤리 등이 든 1kg짜리 봉지)을 받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것은 전연부대에만 차려진 최고사령관(수령)의 크나큰 사랑이었다.

 

49년 함남 신흥군서 출생, 형제는 무남독녀

평양에 있는 호위사령부에 입대해 신병훈련

마치고 무전수로 근무…전연 지대에 주둔한

부대로 군인들에 대한 후방물자 비교적 양호

식량도 하루 백미 800g이었고 돼지고기와

생선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배급으로 나와

 

▶피복, 의류 같은 것도 풍족했나?

솔직히 말하면 풍족하게는 아니지만 모자라거나 없어서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여름피복, 겨울피복을 각각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지급받았다. 그때까지 만도 민간에서 지원받던 원호물자가 없었다. 다시 말해 국가에서 지급받은 군사물자 갖고도 군인들이 군사복무를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언제 군대에서 제대하였나?

호위사령부와 인민무력부 2군단 7사단에서 모두 7년간의 군사복무를 마치고 1989년 평양시 모란봉구역당 위원회 지도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당시만도 여성제대군인 출신이 드물었기에 비교적 좋은 직장이 차려진 것으로 생각한다.

당위원회 지도원은 행정위원회 지도원보다 권위적이고 말발(말의 힘)이 세다. 일반 행정일군의 말은 대충 한 쪽 귀로 들어도 선전일군의 말은 그렇게 못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고분고분하며 인사를 하고 예우를 해준다.

 

7년간 군사복무 마치고 평양 모란봉구역

당위원회 지도원으로 배치 받아…당시에는

여성제대군인 출신이 드물어 비교적 좋은

직장으로 사람들이 고분고분하며 예우 해

 

▶선전부 지도원이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

구역 관내에 있는 모든 공장·기업소, 각 동 인민반 등에서 해야 하는 당 정책 홍보선전에 집중해야 한다. 상급당(평양시당)에서 내려오는 갖가지 정치행사 준비는 정말 끊이지 않을 지경이다.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한 정치선전에서 이 세상 그 어느 나라도 따르지 못할 아주 특수한 나라이다. 그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나는 여군 출신이다. 그러니 모든 일을 군대식으로 하기를 좋아 했다. 산하 단위에서 무슨 애로가 있으면 해당일군들에게 항일유격대식 학습방법, 생활방식으로 일해 나갈 것을 요구하였고 애로가 되는 점을 풀어주기도 하였다.

상급에서는 나를 무척 양호하게 보았다. 남자일군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내가 나서면 해결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생길은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더라. 가정에 우환이 생기는 바람에 내 운명도 달라졌다.

 

상급당에서 내려오는 갖가지 정치행사는

정말 끊이지 않을 지경…체제유지를 위한

정치선전에서 이 세상 어느 나라도 따르지

못할 특수한 나라로 그 분야에서는 최고

 

인민군대에 입대한지 각각 4년, 2년이 된

두 아들이 ‘금강산발전소’ 건설현장에서

갱도가 무너져 죽었는데 부대에서 7개월

후 군복과 훈장, 전사자증명서 등 보내 와

 

▶가정의 우환이 무엇인가?

결혼하고 아들 두 명을 낳았다. 2년 터울의 두 아들 모두 고등학교 졸업하고 “장군님을 총대로 받드는 군인이 되겠다”며 인민군대에 나갔다. 입대한지 각각 4년, 2년이 된 두 아들이 ‘금강산발전소’ 건설현장에서 갱도가 무너져 죽었다. 부대에서는 죽은 지 7개월 후 군복과 훈장, 전사자증명서를 가족에게 보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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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지금은 ‘안변청년발전소’로 불리는 옛 ‘금강산발전소’는 강원도 통천군에 있는 수력발전소이다. 북한강 상류를 막고 그 물을 태백산줄기의 동쪽 비탈로 내려오게 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수로형식 발전소다.

금강산발전소 공사는 1980년대 최대공사였던 서해갑문건설의 2배가 넘는 방대한 공사였다. 1986년 6월 김일성의 “자연개조사업의 일환으로 강수량이 많은 강원도 일대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지시하면서 그해 10월 착공했다.

1996년 5월 김정일이 공사현장을 방문하여 발전소의 조기완공을 독려하였다. 이어 7월에는 최고사령관 ‘전신 명령 001호’ 형식으로 ‘금강산발전소 건설에 동원된 군인들과 건설자들에게 감사를 줄데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금강산발전소 건설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김정일은 1996년 8월 건설현장을 다시 방문하였다. 9월 1단계 공사를 끝내고 1단계 준공식을 가졌으며 이후 제2단계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2002년 9월에 2단계 공사를 완료하였다.

금강산발전소는 북한에서 강원도 지역의 주요한 연료 동력기지이다. 현재 이름 ‘안변청년발전소’로 불리는 것은 김정일이 국가적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발전소공사를 준공해준 청년군인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이다.

▶발전소건설장 얘기를 좀 더 해준다면…

두 아들이 군사복무(발전소 건설공사 동원)기간 중 두 번 면회를 간적이 있었다. 군인들이 감탕과 오물 속에 10시간 이상 들어가 작업을 하더라. 아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가져갔던 닭고기 한 마리를 2분도 안 되어 먹어치우더라.

내가 면회를 갔을 때도 여기저기서 사고(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훗날 건설관계자들에게서 들은 말로는 16년의 기간이 소요된 ‘금강산발전소’ 건설에서 죽은 군인만 4천여 명, 부상자는 2만여 명으로 추정한다.

▶이후 당위원회 일을 계속 하였는가?

금쪽같은 두 아들을 똑같이 ‘금강산발전소’ 건설현장에 묻었으니 어미로써 가슴이 찢어졌다. 신경쇠약증에 걸려 잠을 자다가도 헛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도무지 일을 못할 지경이었다. 당위원회에 사직서(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왔다. 몇 개월 뒤 인민반장 업무를 맡아 보면서 차츰 정신적으로 안정을 바로 잡았다.

▶북한사회에 대한 원망이 그때 들었나?

그렇다. 내가 처녀시절 바쳐 군사복무를 했고 우리 부부도 군사복무를 했고, 두 아들도 군사복무를 하던 중 목숨을 잃었다. 우리 가족은 북한군에 희생되었다. 그 군대를 통솔하는 최고사령관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지옥의 사회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하여 2000년 1월 청진, 회령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였다. 불행하게도 1주일 만에 공안의 출동으로 체포되어 북송되었다. 이어 온성 임시구류장을 거쳐 평양으로 소환되었다.

 

우리가족은 군에 희생…군대를 통솔하는

최고사령관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 깨달아

그런 지옥의 사회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아

2000년 1월 청진, 회령 거쳐 두만강 건너

1주일 만에 공안의 출동으로 체포돼 북송

온성 임시구류장을 거쳐 평양으로 소환돼

 

▶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의외로 받지 않았다. 보위부담화(취조)에서 너무나 배가 고팠고 병 치료 약을 구하려 중국에 갔었다고 하니 “다시는 절대 그러지 말라!”며 용서해주었다. 물론 ‘주변에서 나를 살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예감은 충분히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국경을 넘었던 사람이니 그냥 일반적으로 대하기는 만무했을 것이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3년 뒤인 2004년 1월 다시 청진과 온성을 통해 두만강을 건넜다. 안동에서 식당일 하다가 주민의 신고로 공안에 단속되어 9월에 북송되었다. 이후 청진집결소에 수감되었고 10일 쯤 지나 노동현장에서 기회를 보고 탈출하였다.

청진 이모네 집에 임시 거처했다가 2005년 1월 두만강을 건넜다. 신변안전을 위해 조선족 남자와 억지로 결혼을 하고 4년간 살았다. 이후 청도에 가서 2개월 살다가 지난 2008년 9월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하였다.

 

청진 이모네 집에 거처하다 2005년 1월

두만강 다시 건너 신변안전 위해 조선족

남자와 억지로 결혼…4년간 살아가다

2008년 9월 태국 거쳐 대한민국 입국

 

▶서울생활 초기 무엇을 하였나?

나이 60세에 한국에 왔으니 다소 아쉬운 생각이 많았다. 2009년 3월에 하나원을 나왔다. 이후 송내직업전문학교 전기반을 6개월 다녔고 이후 서울에 있는 모 식품회사 경리원으로 취업을 하였다. 거기서 1년간 일하고 나이가 많은 이유로 퇴사를 하였다. 이후 군부대, 교회 등을 다니며 안보강연을 하였다.

▶요즘은 어떻게 보내는가?

북한에서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닌다. 그럴 때마다 북한독재정권에 치가 떨린다. 평양을 제외한 지방의 인민들은 멀건 죽도 없어 못 먹는 판국인데 김정은은 핵무기를 갖고 있으니 그게 어디 정상인가?

그래서 대한민국의 자유수호, 태극기수호 집회에 발이 닳도록 다닌다. 사람의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고 나라의 안보도 마찬가지다. 가장 평화스러울 때 평화를 지켜야 한다. 대한민국 안보교육은 우리 탈북민이 제격이다.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탈북민들은 자기의 부모형제, 지인, 친인척, 정든 고향산천 모두 버리고 대한민국을 찾아왔다. 분명 자신의 모든 것과 바꾼 대한민국이고 하나뿐인 목숨만큼 소중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국민들이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 탈북민들을 보면서 고맙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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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27 [14:49]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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