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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국군포로 위해 목숨 걸어…“남북당국자들 천륜 흥정말아야”
[인터뷰] (사)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최성룡 이사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6/27 [12:48]

<림일 객원기자> 

평양태생인 기자가 1997년 3월 쿠웨이트 건설현장을 탈출하여 남한에서 살면서부터 분단 이후 남북역사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민족비극의 상잔 6·25전쟁을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것, 북한에 의해 1968년 청와대습격사건, 88서울올림픽 전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이 있었다는 것은 평양에서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     © 통일신문

마치 거짓말 같았고 “그게 사실인가?” 하고 질문할 정도로 당황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문헌 등을 보면서 북한당국의 치 떨리는 만행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결국은 대대손손 김일성 일족 독재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2천만 인민에게 엄청난 거짓말을 하면서 유지되는 북한정권이다.

28년간 평양에서 살면서 ‘의거입북자’ ‘월북용사’라는 용어는 매체를 통해 간간히 들었으나 ‘납북자’라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납북자! 이름 그대로 북한이 납치한 사람을 말하는데 평양에서는 이들을 ‘의거입북자’로 부른다. 북한사회에 의거해서 살기를 원해 자진하여 북으로 온 남조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등의 이름은 민족비극의 대명사이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어 70년이 훌쩍 넘도록 우리 민족은 아직도 그 아픔의 이름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서울 송파구에 소재한 사단법인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에서 최성룡 이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이 어디인가?

1952년 4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4형제였는데 내가 셋째다. 아버지는 1910년 생으로 평북 정주 태생이다. 어머니도 같은 고향이니 부모가 이북사람이다.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3척의 배를 갖고 어업을 하시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당시 우리 가족처럼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일명 38따라지)은 정부에서 ‘999번지’ 지역에 공동 거주시켰다. 전국의 모든 999번지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공동거주 촌이었다. 그때 남한사람들이 이북사람들을 엄청 무시하며 천대했다. 사회풍조가 그랬다.

▶999번지? 생소하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피난민이기는 남한사람이나 북한사람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정부에서 괜히 빨갱이 공산지역에서 왔다고 색안경 끼고 감시하기 좋게 만들어 놨겠지. 그렇다고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이사를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아이들끼리 서로 싸웠는데 나는 소년시절부터 불의를 보고는 도무지 못 참는 성격이라 많이 거칠어졌다.

▶아버지 이야기를 해준다면…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사령부가 조직한 북파공작원 첩보부대 ‘켈로부대’의 선박대장으로 활약했다. 아버지는 1967년 6월 5일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하다 북한 무장선 10여척에 포위돼 납북됐다. 북한은 아버지가 전쟁 때 좌익분자를 토벌한 공을 알고 전향을 유도했으나 아버지가 그를 거부하자 처형했다.

자세히 설명한다면 사고 당일 1척의 배에 모두 8명이 승선했다. 굳이 아버지가 배를 안타도 되는데 공교롭게 선원 한 명이 아파서 못나와 대신 배를 탔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의아했고 정부는 북한의 납치라고 발표했다.

4개월 쯤 지나 정부는 아버지가 탔던 ‘풍복호’가 돌아온다고 발표했다.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은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웬걸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납북되었던 8명 중 5명만 그것도 다른 배를 타고 돌아왔던 것이다. 아버지를 포함해 3명이 돌아오지 않았고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사령부가

조직한 북파공작원 첩보부대 ‘켈로부대’

선박대장으로 활약…1967년 6월5일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하다 북한 무장선 10여척에

포위돼 납북, 좌익분자 토벌한 공을 알고

전향을 유도했으나 거부하자 북한이 처형

 

▶아버지가 처형된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5명의 증언을 들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8명이 해주역 광장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미제의 앞잡이 최원모를 죽이라!”며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들이 ‘최원모’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는 분명 북한당국이 과거 ‘켈로부대 선박대장’ 경력이 있는 아버지를 처음부터 모함하려고 노렸다는 뜻이다. 주민들을 반미, 반 남조선 사상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유용한 미끼였던 것이다.

▶다른 두 명은 강제 억류했다는 소리인가?

아마도 그렇다고 봐야 되지 않겠나? 그들도 생명인데 왜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공산정권에 치가 떨리는 원한을 가진 우리 아버지는 북한당국의 회유에 당당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많은 주민들 앞에서 ‘미제의 앞잡이’ 팻말을 목에 걸린 채로 공개재판장에서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 비보를 처음 접한 심정은…

내가 15살 때 아버지가 북한에 의해 납치 및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우리 4형제 중 나를 유난히 사랑했다. “너는 커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멋진 선주 혹은 사업가가 되라”며 늘 말씀 하시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민간인을 백주에 바다에서 납치한 것 자체가 국제법에 어긋나지만 가족에게 생사여부 조차도 알려주지 않는 북한당국이다. 그러고도 국제사회에서 마치 정상국가로 행세하는 두 얼굴의 야만집단이다. 문제의 당사자들이 ‘납북자’ 소리를 꺼내면 싫어하기는 북한당국이나 남한당국이나 똑같다.

▶아버지가 있던 ‘켈로부대’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지.

1950년 11월 17일 평안북도에 진격한 유엔군이 중공군의 침략으로 후퇴하게 되자 정주군의 각 면 치안대가 단합하여 12월 22일 유격대로서 ‘백마부대’로 명명하고 발족했다. 그 후 서해 여러 섬을 전전하면서 대공유격전으로 북한군 3.000여 명 사살, 중공군 포로 600여 명의 전과를 올렸으며 그 외에도 철도, 교량, 터널 등 인민군의 보급로 파괴와 중요시설 기습 등으로 전투성과를 기록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유격백마부대는 병력이 2.600여 명으로서, 20개 유격부대 중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이들 각 유격부대는 처음에 미8군에서 관장하다가 1952년 11월 미 극동사령부 정보처로 이관되었다. 휴전 후 1953년 10월 국방부 산하 8250부대로 흡수되어 유격대로 존속하여 오다가 1954년 2월 국군(예비역)으로 정식 편입되었다.

▶최 대표의 경력을 말해 달라.

아버지가 납북자 출신이어서 군복무가 어렵지 않을까 다소 걱정했는데 괜한 것이었다. 육군 3년간 만기복무를 하고 1979년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어업을 많이 도와주었기에 그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했을 당시 작은 아버지는 인천에서 어업을 하셨다. 거기서 한동안 일을 하다가 1986년 수협에 입사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협은 좋은 직장이다. 요즘 말로 하면 ‘꿈의 직장, 신의 직장’이라고 한다. 그 좋은 직장에서 2005년까지 일하고 정년을 다소 남기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 그 이유가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나 혼자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편하게 사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납북자)을 위해 사명감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여 수협에 재직 때인 2000년 4월부터 납북자 구출운동에 나섰다.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중국브로커, 북한브로커들과 협동으로 했다. 당시 탈북민 1명 데려오는데 400~500만원 들었고 납북자는 1.000만 원 가량 들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나 혼자 직장에서 편하게 사는 것보다

납북자 위해 사명감 있는 일 하고 싶어

2000년 4월부터 납북자 구출운동 나서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북한브로커들과

협동으로 구출운동…당시 탈북민 1명을

데려오는데 400~500만원 들고 납북자는

1.000만 원 가량으로 위험한 일로 여겨

 

▶정부의 지원이 있을 줄 안다.

다행히 있었다. 납북자는 탈북민보다 많은 정착금(위로금)을 받았다. 그러나 정부에서 탈북자보다 더 골치 아파했다. 중국이나 3국에서 탈북자문제와 납북자문제가 제기되면 납북자문제는 의도적으로 피하는 눈치였다. 우리가 그렇게 쉬쉬하니 주재국에서는 당연히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몇 명의 납북자를 데려 왔나?

지난 2000년에 중국에서 납북자 이재근 씨를 데려오는 것으로 처음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8명의 납북자를 데려왔고 그 중 한 명은 수년 전에 사망하였다. 가장 최근에 데려온 분은 2013년에 입국한 전우표 씨이다.

지금까지 납북자 8명, 국군포로 12명을 북한에서 빼내어 중국과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시켰다. 정말이지 이 일만큼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북한에서 나를 테러하겠다고 해서 3년간 경찰의 경호를 받았다.

▶납북자가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휴전 이후 북한에 의해 생긴 납북자가 516명인데 아직 많이 살아 있다. 납북자 중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끌려간 분도 있고 학생, 목사도 있다. 정부는 북한당국과 협의하여 생사 정도라도 확인해줬으면 한다. 사람이 죽었으면 죽었고, 살아 있다면 살아있다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가 아니겠는가.

 

2000년에 중국에서 납북자 이재근 씨를

데려오는 것으로 시작…8명의 납북자를

데려왔고 그 중 한 명은 수년 전에 사망

최근 데려온 분은 2013년 입국한 전우표씨

납북자 8명, 국군포로 12명 북한에서 빼내

중국과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입국

이 일만큼은 목숨 걸고 하는 일로 북한서

테러하겠다 해서 3년간 경찰 경호받기도

 

▶정부가 납북자문제에 소극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지.

정치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당사자들은 순수 인도주의적인 문제로 보는데 정치인들은 꼭 정치적인 문제로 본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는 당선만 되면 두 팔 걷고 나서겠다고 90도 인사를 하면서 한 표를 부탁한다.

그러나 정작 당선이 되면 내가 언제 그랬는가? 하는 식이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이해가 된다. 지금껏 시종일관 ‘의거입북자’는 있어도 ‘납북자’는 없다고 강변하는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다는 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눈치를 보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다.

▶정말 국회의원들에게 실망이 크겠다.

지난 19대 국회(2012. 4.~2016. 4.) 때 일부 여당(지금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6·25전쟁 비정규군 관련보상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 기가 막혔다. 그러고도 무슨 안보정당, 보수정당이라고 했는지 말이다. 현재 20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여야가 합심하여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가장 두려워했던 ‘켈로부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부모가 국립현충원에 안장 되었다고 하던데?

박근혜 정부는 2013년 부친(최원모)을 국가유공자로 인정,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작년 6월 5일 국립현충원 충혼당에 납북된 부친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날 부친의 위패와 모친(김애란,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유공자로 인정)의 유골을 합동 봉안했다. 현충원에 납북자 위패가 봉안되고 사망일이 아닌 납북일(1967년 6월 5일)이 기입된 경우는 최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이들은 민족비극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가족이 갈라져 70여년 살고 국제법을 위반하며 국군포로를 돌려보내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 납치해가는 북한의 반인륜적 행위는 실로 야만적이다.

정부는 우리 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는데, 진정한 명예회복은 보상금으로 해야 할 것이다. 민족비극의 아픔을 권력야욕에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문제이다. 제발 남북의 통치자들이 천륜을 갖고 장난치지 말았으면 한다.

▶고마운 분은 누구인가?

아내다. 나는 좋은 직장도 그만 두고 정의를 위해 산다며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다. 겸직으로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KLO8240 유격백마부대 회장직을 맡고 있다. 전부 내 돈을 쓰며 하는 일이다. 거기에 항상 정치·사회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시끄럽게 사니 여자들로부터 호감 가는 남자는 아닐 것이다.

그동안 굿은 일 마른일 마다하지 않고 나와 두 딸을 잘 보살펴주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요즘은 쌍둥이 외손자가 생겨 그 애들을 봐주는데 정말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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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27 [12:48]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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