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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눈 어두워 감춰진 송곳 못 보면 큰 실수 범할 수 있어”
[인터뷰] 실향 1세대 박용옥 前 국방부차관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07/18 [14:39]

경기도 가평에서 있은 탈북군인들로 조직된 ‘북한기독군인회’ 2019년 봄 영성수련회에 참석했다. 세미나 축사자로 나선 몇몇 귀빈 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분이 있었다. 평양출신 실향1세대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이다.

그는 축사에서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세습독재가 끝나야 만이 가능하다. 북한독재정권은 어쩌면 미국이나 남한의 군사력보다 2천만 인민에게 전파될 수도 있는 종교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독재자 김정은은 5천만 남한 국민보다는 자기를 잘 아는 3만 탈북민을 더 무서워하고 불편해할 수 있다.

탈북민 한 사람이 북한에 기독교를 설파하는 것은 남한목사 100명이 하는 것 보다 더 유효하다”고 했다. 얼마 전 서울 양재동에서 박용옥 전 국방부 차관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북한기독군인회’ 세미나 축사 잘 들었다.

내가 군인출신이어서 탈북군인들에게 애정이 깊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복무하는 집단인데 북한군은 영원한 당의 군대, 수령의 군대라니 참 기가 막히다. 가령 대한민국 국군은 영원한 더불어민주당의 군대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군대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세미나 참석 소감을 말해 달라.

작은 희망을 보았다. 누구보다 북한을 잘 아는 인민군 출신의 탈북민들이 독재자의 군대로 전락한 100만 인민군 장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겠다니 노병인 내 마음이 다 흥분되고 비장한 결의가 넘치더라.

북한은 사실상 세계 최고 광신적 종교집단이나 다름없다. 김일성 일족이 유일한 신이고 2천만 인민이 열성성도이다.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비밀의 하나가 전체 인민에게 철저한 김일성 신격화 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군인출신이어서 탈북군인들에게 애정 깊어

탈북민들이 독재자의 군대로 전락한 100만

인민군들에 ‘하나님의 말씀’ 전파하겠다니

노병이지만 흥분되고 비장한 결의가 넘쳐

 

▶탈북민들을 어떻게 보는가?

대한민국에 들어 온 3만 탈북민은 언젠가 꼭 오는 한반도 자유민주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중한 보배이다. 정부가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내려온 탈북민들을 장차 통일준비 전문가로 차근차근 키워야 한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밝지, 안 그러면 어두운 과거나 별 차이가 없다.

▶고향이 평양이던데…

1942년 9월 15일 평양 기림리에서 태어났다. 대동문에서 멀지않은 옛날 종로통에 있던 종로인민학교(해방 후 ‘제3인민학교’로 개칭)를 다녔다. 지금의 행정주소로는 평양시 중구역 창전거리 지역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장대재교회(한국기독교사에 나오는 평양제일의 장대현교회) 권사이셨던 어머니(김정태) 손에 이끌려 형과 함께 매일 새벽기도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장대현교회 유치원을 졸업했고 유년주일학교에서 꼬박꼬박 예배를 드렸다.

▶9살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내가 8살 때 즈음인 1949년 10월, 평양 대동강 건너 선교리에서 거대 산업박람회가 있었다. 탱크와 각종 포가 실린 군용트럭이 수백 대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이 다음해에 있을 전쟁준비 시작의 일환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평양에 미군 폭격기들이 날아왔다.

▶언제 월남하였는가?

1950년 12월 5일 아버지(박춘화)가 “이 놈의 공산정권에서는 숨이 막혀 도저히 못 살겠다. 우리 가족 남쪽으로 피난을 가자!”고 하셨고 온 가족이 따랐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트럭을 타고 내려왔으나 서울은 텅텅 비었다.

다시 걷고 때로는 기차를 타면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갔다. 평양을 떠난 지 2~3개월 뒤였던 것 같다. 도착지 부산에는 피난민이 우글거렸다. 아버지는 가족을 굶기지 않으려고 부산국제시장에서 금은제품 장사를 했다.

 

8살 때 1949년 10월, 평양 대동강건너

탱크와 각종 포가 실린 군용트럭 수백 대

지나가는 것을 구경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다음해에 있을 전쟁준비 일환이었던 것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느 날, 아버지 따라 시장에 나가보니 글쎄 평양 대동강에서 겨울철이면 스케이트 날을 갈아주던 아저씨가 보였고, 또 어느 날에는 형(박용원)과 시장에 갔었는데 형이 깜짝 놀랐다. 평양종로인민학교 자기 반 담임선생님을 보았던 것이다. 전쟁은 우리네 일상을 그렇게 통째로 바꾸어 준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는가?

동족간의 혈투로 얼룩진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여름, 서울로 올라왔고 수송국민학교 6학년에 입학했다. 나보다 먼저 서울에 올라와 경기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형의 뒤를 따라 나도 경기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1955년 수송국민학교, 1958년 경기중학교, 1961년 경기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21기)에 입학, 1965년 소위로 임관했다.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9살짜리 소년이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과거 남북고위급회담 남측 군사대표였다.

19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군사대표(소장, 국방부 군비통제관)로 참석했다. 정원식 총리와 청와대, 외교부, 국방부, 안기부 등 관계자 7명으로 구성되었다. 북측 총리는 연형묵이었고 나의 카운터 파트너(회담테이블에 마주 앉는 사람)는 김영철 인민무력부 부국장(현재 노동당 부위원장)이었다.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일화를 소개해 달라

그때 북한에서는 김일성 생일 80회를 맞아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했다. 우연히 우리는 그 도로를 이용하는 첫 남측사람이 되었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가는 2시간 남짓 도로 반대쪽에서 오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평양에 들어서서 더욱 놀랐는데 길 가던 행인이나 시민들이 우리에게 미소는 고사하고 눈길 한 번 안주더라. 환영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뜻인지. 그걸 보면서 ‘국가의 통제가 저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평양에 입성한 장군의 소감은?

철부지 9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내려온 자유대한에서 어엿한 군인, 장교, 장군이 된 것만도 자랑스러운데 40여년 만에 장군복을 입고 고향 평양으로 다시 온 것은 개인적으로 한없는 영광이었다. 시내 숙소로 가는 도중 내가 살던 고장(종로)을 지나갔는데 그 순간 마음에서는 뜨거운 무엇인가 울컥했다.

 

19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

군사대표로 참석…40년 만에 장군복 입고

고향 평양으로 다시 온 것은 한없는 영광

숙소로 가는 도중 내가 살던 고장(종로)을

지나갔는데 마음에서 뜨거운 무엇 느껴져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내가 9살 때까지 다녔던 교회가 있던 부근에 대형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더라. 그걸 보면서 ‘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하나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소년시절 자주 올라가던 모란봉에 있던 해방탑도 그대로 보였다.

참고로 대표단원의 승용차는 북측이 제공하는 의전차량인데 한 명에게 한 대씩 제공됐다. 뒷좌석 옆자리에는 북측 카운터 파트너가 동승하며 운전석 옆에는 수행일군(수행비서)이 앉는다. 내 옆에는 김영철이 늘 앉았다.

▶평양에서 묵었던 숙소는?

백화원 초대소이다. 정상급 귀빈들이 묶는 숙소인데 넓은 부지에 호화스러운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답답한 것은 TV시청인데 그냥 북한 채널만 나왔다. 수령, 체제 홍보 내용이어서 별로 흥미가 없더라. 식사 수준은 나름 정갈하고 깔끔했고 손색이 없었다. 나는 그때 순대를 처음 입맛에 들여 지금도 먹고 있다.

▶서비스 수준은 어떠했나?

나름 괜찮았다고 본다. 아무래도 정상급이 묵는 숙소이니 나라에서 최고의 상태에서 준비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방에 있는 초콜릿을 먹어봤는데 그냥 설탕덩어리 같은 느낌이 들더라. 사이다, 맥주 등은 북한상표가 붙었었다.

초대소 내부 시설은 대부분 일본제품인 것 같았다. TV는 앞에 ‘진달래’ 라고 씌어져 있는데 뒤에는 메이드인 재팬(Made in Japan)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에어컨이나 냉장고도 전부 일제였다. 의전용 승용차는 독일 벤츠였다.

▶북한과 회담하면서 특별히 느낀 점은.

평양에서도 그리고 판문점에서도 북측과 회담을 하면서 느낀 점은 획일적이다. 북한은 어떠한 문제를 상정하고 토의하기에 앞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같은 것이 잘 안보였다. 무조건 자기 것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스타일이 많다. 그렇게 완고히 밀고 나가다가 안 되면 뒤집거나 꼬리를 자르는 식이다.

▶언제 전역하였는가?

1998년 5월, 육군 중장(삼성 장군)으로 전역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입고 37년간 국민을 위해 복무했다. 1998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이어 다음해 8월까지 국방차관으로 재직했다.

2009년 11월부터 2013년 9월까지 제15대 평안남도지사를 역임했다. 이북5도(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지사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 차관급 공직이다.

▶평안남도지사 재임 때 기억에 남는 것은?

고령의 많은 실향민들이 죽기 전에 고향땅을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다. 도내 각 시·군 행사장에 가보면 실향민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과반이 실향민 2세들이다. 사실 부모님의 고향이 이북이지 2세들은 남한에서 태어났다. 그래도 자기 혈맥의 뿌리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아 보였다.

 

실향민들 죽기 전 고향땅 밟아보는 것이 소원

도내 각 시·군 행사장 가보면 눈에 띄게 줄어

과반이 실향민 2세 남한서 태어났지만 혈맥의

뿌리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아 보여

 

▶이북5도위원회에 탈북민 참여가 저조하다.

나는 평안남도지사 재직 당시 탈북민들의 이북5도위원회 행사 및 활동 참여가 매우 긍정적이라고 인식하고 적극 장려했다. 해마다 서울우신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평안남도 도민의 날 체육대회’에 탈북민들과 함께 했다.

또한 매해 호국보훈의 달(6월)을 맞아 진행하는 그림그리기, 글짓기 대회 등에 탈북민 자녀들의 참여도 적극 권장했다. 실향민인 우리가 그랬듯이 탈북민들도 자녀들에게 고향사랑, 나라사랑 교육을 꾸준하게 시켜야 한다.

 

도지사 자리를 탈북민도 줘야 한다는데

긍정도 부정도 쉽지 않아 꼭 줘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어

탈북민과 실향민은 동일한 이북고향 사람

탈북민 사회에 이북5도지사로서 적임자가

있을지 면밀히 검토해 볼 수도 있다 생각

 

▶도지사 자리를 탈북민에게 주자는 소리도 있다.

긍정도 부정도 쉽지 않다. 꼭 줘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할 수 있다고 본다. 탈북민과 실향민은 동일한 이북고향 사람들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이북5도지사이기에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임명권자가 임명하면 된다. 그러나 탈북민사회에 이북5도지사로서의 적임자가 있을지는 면밀히 검토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즘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나?

답답하다. 북한의 핵문제 해결로 인해 한반도 평화정착이 중요하다는 것은 5천만 국민 모두 공감하는 사안이다. 그렇다고 남한에 대고 “오지랖이요” “주제넘게 참견 말라” 등의 모욕적인 북한의 막말행태에도 침묵해야 하나? 북한 독재자 김정은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우습게 보는 이상 핵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 탓할 일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북한에 보여 왔다. 대표적으로 정치권의 대북문제에서 여야의 갈등이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북한 김정은 독재정권에 지나친 환상을 가지는 것은 금물이다. 아니 추호의 환상도 갖지 말아야 한다. 엄밀히 북한정권은 6.25전쟁을 일으켰고 300만의 동포를 굶겨 죽인 야만집단이다. 평화에 눈이 어두워 자루 속에 감춰진 송곳을 보지 못하면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내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역사가 증명하겠지.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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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18 [14:39]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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