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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예술단원들 전문교육 수료한 ‘평화통일강사’들로 구성했어요”
[인터뷰] 탈북민 공연단체 ‘금강산통일예술단’김 아 영 대표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10/31 [11:32]

북한의 2대 수령인 김정일이 1970년대 정치를 시작하며 맡은 분야는 영화·음악 등 문화예술부문이다. 사실 이때부터 창작된 노래에는 사상적 색채가 짙게 배였다. 전체 가곡 중에 10% 정도가 비정치적 노래가 아닐까 싶다.

그 중에는 흥겨운 곡조의 가요 ‘배우자’도 있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네 / 그러니 돌아보지 마시고 / 금같이 귀중한 분초를 아껴갑시다 / 배우자 배우자 내 나라를 위해 / 배우자 배우자 앞날을 위해 / 우리의 식으로 낙원 꾸리자’

지난 8월 중순, 탈북민 전문 예술단체인 ‘금강산통일예술단’의 지방 여름수련회에서 탈북가수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사뭇 생각이 깊었다. 사람은 어느 사회서 살든 자신의 수양을 위해 항상 배워야 하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폐쇄적인 북한사회에서 태어나 황금기의 청년시절을 보내고 중년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탈북민들에게는 더욱 맞는 말이다. 배우고 또 배우고 이 사회에 정착해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만 탈북민 사회에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러 개의 탈북예술단체가 있다. 치열한 경쟁사회인 자본주의국가에 있는 만큼 이 분야에서 경쟁도 만만치 않다. 인천시 간석동에서 김아영 ‘금강산통일예술단’ 대표를 만났다.

▶‘금강산통일예술단’ 단체의 특성이 있다면 뭔가?

우리 예술단 단원들은 100% 전문교육을 수료한 ‘평화통일강사’들로 구성되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전혀 어려움 없이 강의할 준비가 된 전문가들이다. 내년부터는 평화통일 강연을 접목한 예술 공연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여러 탈북예술단체가 있지만 이 분야를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은 우리 ‘금강산통일예술단’이 처음이다. 단원들이 나를 잘 믿고 따라주는 것이 고맙다. 이것도 다른 단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이 아닐까 한다.

▶금강산통일예술단은 언제 생겼나.

수개월 전부터 꾸준한 준비 작업을 거쳐 우리만의 특성을 살리겠다는 자신감을 갖고 2018년 5월에 설립하였다. 현재 우리 ‘금강산통일예술단’에 소속된 탈북민출신 여성 단원은 모두 20명이고 악기 연주나 성악 기량이 뛰어난 인재들이다. 주 중 절반은 공연, 절반은 연습을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77년 8월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고 형제는 4남매 중 셋째였다. 아버지는 회령OO기업소 기사(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웅변술이 좋은 나는 인민학교 입학식 때 ‘충성의 결의문’을 전교 입학생들 앞에서 낭독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음악소조’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오전은 정규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5~6시간씩 각종 악기연주 및 노래연습을 한다. 그래도 전혀 힘들다고 생각지 않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있어서였다.

 

77년 함북 회령 출생…인민학교 입학식 때

‘충성의 결의문’을 입학생들 앞에서 낭독

중학교 1학년부터 ‘음악소조’에 가입 활동

 

▶예술부문 학교에 가고 싶었겠다.

물론 그랬다. 고등중학교 졸업 즈음 회령시 군사동원부 초모과에서 한 간부가 내려와 백여 명의 졸업생들 중에 나를 포함한 2명의 여학생을 특별히 선정하여 뽑았다. 목적은 조선인민군협주단 신입생 선발차원에서이다.

화술, 외모, 체력 등에서 우수하여 뽑혔는데 아버지가 한사코 반대했다. 후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해방 후 월남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평생 노동당에도 입당 못하고 늘 고민 속에서 사셨다.

▶사회생활은 어디서 하였나.

1994년 8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치 받은 곳은 아버지가 다니는 OO기업소 기능공학교였다. 이듬해 김정일 생일(2월 16일)을 맞아 기업소 예술소조종합공연이 있었는데 내가 보조 지도한 2중창(하얀서리꽃), 4중창(통일무지개), 13명 합창(우리 앞날은 밝다) 등이 우수한 성적으로 평가 받았다. 이때 초급당비서와 선전비서의 눈에 띄어 기업소 선전대로 직위이동을 하여 예술 활동을 하였다.

▶선전대 활동을 말해 달라.

‘반유급’으로 한 달 중 반은 일하고 반은 예술 활동을 한다. 매달 상순 15일간은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하순 15일간은 연습 및 공연을 한다. 주제는 “당 정책 관철에 모두가 떨쳐나서자!”는 것인데 노동당의 지침이다. 근로자들에게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당의 방침을 노래와 춤, 화술로 선동하였다.

 

고등중학교 졸업 후 기능공학교 배치 받아

김정일 생일 기업소 예술소조종합공연에서

지도한 2중창, 4중창, 13명의 합창단 우수한

성적으로 평가 받아…기업소 선전대로 이동

예술 활동, 당 방침 노래와 춤, 화술로 선동

 

▶당시 사회생활의 실태는 어느 정도인가.

1994년 이후 최악의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식량배급이 중단되니 직장에 출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떠돌이로 살거나 타지로 떠났고 많은 노동자들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옥수수 줄기와 양배추 뿌리를 뽑아서 삶아 먹었다. 그러고도 너무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끓여 먹기도 했다. 당연히 병원에는 부작용을 호소하는 환자가 차고 넘쳤으나 약은 전혀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사람들은 당국이 무서워 사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절대 못했다. 해가 바뀌어도 당국은 속수무책이었고 상부에서는 기업소 자체로 식량을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북부 고산지대인 회령은 도자기 생산지역으로 유명하다. 그 곳에는 도자기용으로 쓰는 ‘백령토’라는 하얀색의 찰흙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발명으로 이 흙 70%에 강냉이가루 30% 섞어 흙떡을 만들어 시식을 시켰었다.

▶흙떡이라니? 자세히 말해 달라.

일단 겉모양과 색깔은 일반 옥수수떡과 전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신통하다. 송편크기 만한 흙떡 두세 개를 먹으면 하루 종일 배고픈 줄 모른다. 아무런 영양가가 없고 소화가 되지 않는 흙이 위장에 차있으니 말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기업소에서는 갑작스레 있었던 ‘흙떡 배급’은 시식 한 번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고난의 행군이라 하였지만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었던 부류의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일반 주민들 속에서 굳이 꼽으라하면 당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이기주의(자본주의)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는 어떻게 보냈나.

1999년에 결혼을 하였다. 북한에서 평생 자유이직이 없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는 결혼하면 사직할 수 있고 이후 동(同)사무소에 속하여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나는 동(同)여맹위원회에 소속 되어 예술소조 활동을 했다. 사회적으로 진행되는 각종 건설 및 행사장에서 선전선동을 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전부 당과 수령우상화 및 충성을 강요하는 상급 기관에서 구성되어 내려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평생 자유이직 없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는 결혼하면 사직할 수도 있고

이후 동사무소에 속하여 조직생활

여맹위원회에 소속돼 예술소조 활동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김정일이 생전에 자기 모친(김정숙)의 고향인 회령을 ‘제2만경대’로 꾸린다며 국가적 투자로 회령 도시의 일부를 변신시켰는데 신축아파트, 식당, 편의시설 등이 생겨났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두 번이나 회령을 찾았다.

그 중 2008년 가을 ‘모심공연’(수령이 관람하는 특별한 공연) 준비를 시(市)당에서 책임지고 중앙과 도(道)에서 작가와 연출가가 내려와 성의껏 준비했다. 그러나 약 5개월간 연습한 나는 공연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유는 할아버지가 월남자(실향민)였고 오빠 가족과 어머니가 행방불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에 언제 왔는가.

2012년 9월 남편과 두 아들, 우리 4식구가 대홍단 쪽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영토인 장백현에 들어서서 용정으로 이동했고 공안의 불시순찰을 피해 심양과 북경으로 옮겨 며칠씩 보냈다.

이후 라오스, 태국을 경유하여 2012년 11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가 먼저 온 자유의 땅, 대한민국으로 왔다. 그때 소감은 마치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할까, 아니면 세상을 전부 가진 뿌듯함이라 할까, 여하튼 그랬다.

 

남편과 두 아들 대홍단에서 두만강 건너

장백현에 들어서 용정으로 이동했고 공안의

불시순찰 피해 심양과 북경에서 며칠씩 보내

라오스, 태국 경유하여 2012년 11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가 먼저 온 자유의 땅에 입국

 

▶탈북경위를 말해 줄 수 있는가.

오빠의 가족과 어머니가 먼저 탈북하여 한국에 왔다. 그때부터 ‘남조선으로 갈까?’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가족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 홀몸이라면 당장 떠났겠지만 남편과 아이들, 시집까지 생각하니 쉽게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년생인 두 아들이 12살, 11살 되면서 고민했다. 내가 월남한 할아버지 때문에 청춘의 꿈을 피우지 못했듯이 우리 아이들의 탈북한 외할머니와 외삼촌 때문에 미래가 어두울 것 같았다. 또한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러다가 자칫 영원히 어머니를 생전에 뵙지 못할 것 같았다.

▶사회생활 시작은 어떻게 했나.

우리 네 식구 1인당 850만원, 모두 3.400만원의 탈북비용을 브로커에게 지불하고 왔다. 그러니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오전에는 컴퓨터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 활용능력과 전산회계를 배웠다.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 강사자격 교육을 수료하고 2014년부터 통일교육강사로 활동한다. 또한 세계사이버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또 다른 일이 있다면.

남한에 온지 2년 뒤 ‘탈북여성들의 결혼 및 재혼문제가 진정한 통일의 한 부분이 아닐까’하는 마음에 ‘오작교결혼정보회사’를 설립해 운영하였다. 행복한 남남북녀커플(남한 남자와 탈북여성의 혼사)들을 성사시켰다.

그 사업을 하면서 특별히 깨달은 것이 있다. 남한사람들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고작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북한만 알고 있다. 요즘 TV만 봐도 모두 북한의 좋고 화려한 것만 나오니 말이다.

▶그건 맞는 소리이다.

그래서 언젠가 남한사람들에게 내가 태어나 살았던 북한을 바로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고민을 하던 중 그 방법은 바로 예술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예술은 공공장소에서 대중에게 설파하는 메시지가 정확하고 파급력 또한 대단하다. 일명 문화의 위력이라고 하는 예술에는 사람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마술 같은 힘이 있다. 그래서 예술의 힘은 대단하다고 하는 것 같다.

 

남한에서 탈북여성들 결혼·재혼문제가

진정한 통일의 한 부분이 아닐까하는

마음에 ‘오작교결혼정보회사’설립 운영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나.

올해 1월과 2월 인천시 남동구 지역주민들과 하나가 되는 어울림 나눔 행사 및 화합 공연을 진행했다. 4월에는 강화군 교동면에서 관계자들과 함께 통일염원 식수를 하였으며 지역 실향민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했다.

지난 1년 6개월간 수도권 및 전국지역을 무대로 200여회 공연을 펼치었다. 이를 위해서 뒤에서 알게 모르게 후원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다. 늘 그분들에게 감사하며 열심히 노력하여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의 실향민들 앞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드는 간절한 생각이다. 고령의 이산가족 상봉만큼은 남북이 정치적 문제로 보지 말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적극 해결해주었으면 한다. 고향을 떠나 장장 70여 년간 가족상봉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하늘나라로 간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탈북민들에게는 남의 일이 아닌 모습인데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고마운 사람은 누구인가.

사랑하는 남편이다. 부족한 내가 이렇게 사회활동을 마음껏 하는 것은 든든한 남편의 적극적인 응원과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방출장 공연으로 집에 못 들어갈 때는 두 팔을 걷고 집안일을 맡아준다. 또한 대한민국에 와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한 고3, 고2생인 두 아들이 너무나 고맙고 대견하다. 온종일 힘들었다가도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서면 피로가 절로 풀린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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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31 [11:32]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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