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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 이룩한 삶…“어르신들 취미·건강위해 아코디언 추천해요”
[인터뷰] 김태희아코디언음악학원 김태희 원장
 
통일신문 기사입력  2020/05/06 [11:27]

1990년대 중후반에 있은 북한의 사상최대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시기에 무려 300만 인민이 굶어죽었다. 당시 남한에 입국한 수천 명의 탈북민은 북한 각 지역 출신으로 그들의 생동한 증언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추출한 계산이다.

고난의 행군은 우선 그동안 동구권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에 크게 의존했던 북한의 경제체제서 비롯되었다. 또한 남한의 ‘88서울올림픽에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거액을 들여 ‘89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한 것도 원인이다.

남한 사람들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이 왜 북한경제 하락의 원인인가?’며 의아해한다. 그의 시신이 보관된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은 수억 달러를 들여 재건축한 세계최고의 호화박물관이다. 평양시민 식량공급까지 중단하면서 이뤄졌다.

당시 사상초유의 심각한 경제난은 군대에도 적지 않은 영양을 미쳤다. 사회에는 탈영 군인들의 모습도 간간히 보였던 것이다. 당시 군인가족의 실태를 취재하려 최근 김태희아코디언음악학원김태희 원장을 만났다.

 

- 군인가족에서 태어났던데.

196310월 평양 태생이다. 아버지는 조선인민군 OOO군부대 군관(장교)이었다. 1968년 여름 평양의 대홍수로 미림비행장이 물에 잠겼고 부대이동으로 황주, 원산 등지에서 근무했다. 1970년 아버지는 연대장(상좌)으로, 1977년부터 2년간은 청진공군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이후 제대하여 함경북도당 적위대부장으로 2년간 재직하였고 어머니는 군부대(사단) 여맹위원장으로 군관가족 아내들을 통솔했다.

 

- 본인을 소개해 달라.

5년제인 청진제2사범대학 음악과를 졸업하고 19849월부터 남청진고등중학교, 은덕고등중학교 등에서 음악교원(교사)으로 근무했다. 이후 27살 때 강원도 주둔 군부대 군관에게 시집을 갔다. 여기서도 2개 학교 음악교원, 군부대 유치원장 등 모두 8년간 교단에서 학생들과 아이들을 가르쳤다.

 

- 군인가족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1989년부터 군관의 아내가 되었으니 군인가족으로 살았다. 1995~96, 2년간은 정말 악몽 그 자체였다. 남편은 대대참모장(소좌)이었으며 부대에서 군관들(대대장 이하 소대장까지) 본인은 부대에서 하루 세끼 식사를 시켰다. 가족 식량배급은 최대 10개월분을 밀려서 받았는데 10개월 보내기가 정말 숨이 막혔다.

미성년자인 세 딸은 내가 아니면 모두 굶어죽을 판이다. 그러니 학교교원이라는 영예로운체면도 모두 버리고 오직 식량구입을 위해 온종일 뛰어다녀야 했다.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밤에는 마을의 군인가족 집집마다 다니며 여성들의 미용을 해주었다. 그리고 쌀, 밀가루, ·담배 등을 받았다. ·담배는 식량과 바꿀 수 있다. 부대 주변에 소규모의 개인텃밭을 일구어 감자, 옥수수, ·배추 등을 심었다.

 

아버지는 연대장(상좌), 1977년부터

2년간은 청진공군대학 학장을 역임

어머니는 군부대(사단) 여맹위원장

 

27살 때 강원도 주둔 군관에게 시집

학교 음악교원 군부대 유치원장으로

8년간 교단서 학생과 아이들 가르쳐

 

 

-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부대(대대)에는 1995~962년간 상급부대(여단)에서 모여 온 각 대대 영양실조 군인들 포함해 보통 50여명의 허약자가 있었다. 그들에게 매일 영양 죽(옥수수가루 죽)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부대에서 군인가족들에게 할당된 명령이었다. 대대에는 모두 38세대의 군관가족이 있었는데 대부분 군관 아내들은 부양(전업주부)이다.

 - 또 다른 광경이 있었다면.

가끔 부대에 쌀자루를 가득 실은 군용화물차들이 왔다. 그 쌀자루에 이천쌀’ ‘임금님표등의 글귀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남한의 적십자에서 북한주민들에게 지원해준 것 같았다. 쌀자루 운반 작업에 동원된 사병들은 상관 몰래 쌀을 훔쳐서 탄약고 등에 숨겨 놓았다가 배고플 때마다 조금씩 먹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대대참모장(소좌), 가족식량배급은

최대 10개월분을 밀려 받았는데 숨이 막혀

학교교원이라는 영예로운체면도 버리고

오직 식량구입을 위해 온종일 뛰어다녀야

낮에는 수업을 하고 밤에는 마을 군인가족

집집마다 다니며 여성들의 미용을 해주기도

 

 - 아주 특별하게 추억되는 것은.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숙 생일, 인민군 창군일은 국가명절로 군대서는 크게 기념한다. 매해 이 날을 맞아 군인가족예술소조’(군관 아내들로 조직된 공연단)20여 명이 공연을 했다. 대략 한 달간 하루 평균 3~4시간씩 연습하여 준비한 충성의 노래모임공연은 상급부대(여단)에 올라가서 각 대대 및 직속부서에서 출전한 10여개의 팀과 치열한 경합을 했다. 한 팀의 공연은 대략 20~30분 정도였다.

 - 부대에서 공연 조건을 보장해줬는가.

악기는 제공해주었다. 나머지 의상이나 화장품 등은 100% 예술소조원인 개인이 자체로 마련했다. 공연종목은 전부 김일성·김정일 홍보 및 충성선동에 관한 것이다. 경연에서 우승을 해도 특별히 주는 상금이나 상품은 없었고 부대 정치부장이 회관에서 부대의 이름으로 감사를 준다는 내용의 축사뿐이었다.

 

-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

2002년 가을 남편은 제대, 이후 사고로 사망했다. 2004년 세 딸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으로 왔다. 조선노동당 함경북도 회령시위원회 산하 출판물보급소 지도원으로 임명(배치)되었다. 하는 일은 노동신문수거 및 출판물 대금수납이다. 참고로 출판물(신문, 잡지 등) 보급은 우편국 소속 통신원들이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숙 생일, 인민군

창군일은 국가명절로 군대서 기념행사

매해 이 날을 맞아 군인가족예술소조

(군관 아내들 공연단)20여 명이 공연

 

공연종목은 김일성·김정일 홍보 및 충성선동

경연에서 우승을 해도 특별히 주는 상금이나

상품은 없었고 부대 정치부장이 회관에서

부대의 이름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의 축사뿐

 

- 당시 생활형편을 말해 준다면.

내 월급은 1.300원 정도였는데 언제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대신 식량은 감자, 옥수수 등으로 밀려서라도 꼬박꼬박 받았다. 이것도 시당위원회 소속 직장이니 가능했다. 돈이 필요했으니 어느 개인집을 교습소로 삼고 학생들에게 불법으로 아코디언, 첼로, 기타 등을 가르쳤다. 학생은 18명의 수강생이고 대부분 권력기관, 외화벌이기관 종사자 자식들이다. 한 달 수강비는 1만원, 하루 1시간 수업이다.

 

- 북한의 악기 수준은 어떠한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평양의 중앙예술단에서 쓰는 악기는 전부 일제, 독일제, 중국제 등 외제이다. 지방에도 간혹 외제가 있지만 대부분 북한제이다. 북한제 아코디언 백두산제품은 외제에 비하면 많이 후졌다. 중국 연길에 친척이 있었고 중국산 아코디언을 구입하려고 200512월 첫 도강(탈북)을 했다.

 

- 그 후 행적을 설명해 달라.

친척을 만나 아코디언을 받았으나 곧 공안에 단속되었다. 연길, 도문변방대에서 1개월 지나 회령, 온성보위부로 강제 북송되었다. 직장에서 강제 퇴직, 소문이 났으며 더 이상 과외수업도 못했다. 그리하여 중국에 가서 1년쯤 일하여 장사밑천을 마련하자는 생각에 20065월 온성지역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두 번째 탈북이다.

 

- 중국에서 탈북자로 어려웠던 점은.

연길은 탈북자 단속이 심한 곳으로 위험하여 OO지역으로 이동하였다. 5개월 뒤 북한으로 가서 11살짜리 막내딸을 데리고 나왔다. 첫째와 둘째 딸은 브로커와 약속한 돈이 모자라 후에 데리고 나오기로 하고 포기했다. 중국 OO지역 마을에서 막내딸과 함께 농가 김치움에서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2개월간 살았다. 사람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니 정신까지 이상해진다는 것을 체험했다.

 

평양 중앙예술단에서 쓰는 악기는 일제,

독일제, 중국제 등 외제...지방에도 간혹

외제가 있지만 대부분 북한 제로 질 낮아

 

중국산 아코디언을 구입하려 200512

첫 도강(탈북)... 연길, 도문에서 1개월 지나

회령, 온성보위부로 강제로 북송...직장에서

강제퇴직, 소문났고 더 이상 과외수업 못해

중국에 가서 장사밑천을 마련하자는 생각에

20065월 온성지역에서 두만강을 건너

 

 

- 언제 한국에 왔는가.

천만다행인 것은 그 농가는 친척의 집이어서 그나마도 안전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중국에서 공안을 피해 숨어산다는 것은 정말 비참한 인생임을 깨달았다. 200611월 심양,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거쳐 7개월 지나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으로 왔다. 20075월이고 그제야 비로써 참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 사회로 나와서 무슨 일을 하였나.

서울에 임대주택을 받고 첫 일자리는 감자탕집주방일이었다. 거기서 2개월 일하고 이후 청소대행업체에 취업하여 교회건물청소를 7개월간 했다. 그 와중에 목사님한데 북한에서 음악교사였던 훌륭한 분이 청소를 해서 되겠는가. 공부를 해서 더 멋진 일을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분이다.

 

중국에서 공안을 피해 숨어산다는 것

정말 비참한 인생임을 깨달아 2006

심양,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입국

 

 

- 이후 경력은 어떻게 되는가.

20093월 한국성서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음악치료사 1·2급 자격증, 사회복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후 남북하나재단에서 진행한 탈북교사 공모에 합격해 경남여자초등학교 2년 계약직 교사가 되었다. 교사의 기쁨도 잠시였다. 북에 남겨진 두 딸에게 생계비를 보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일 끝나고 이런 저런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지만 돈은 생각처럼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달라.

지난 20137월 음악교습소(성인 15명 이하 수강생만 가능함)를 차려 1년간 운영했다. 그 뒤 음악학원(학생·성인 합쳐 60명 이상 수강생 가능)으로 바꾸었다. 교습소와 학원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정당국에서 계약직교사라도 학원영업을 할 수 없다고 하기에 고민하다 좋은 직업인 교사직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국성서대학에 입학... 대학공부를 하면서

음악치료사 1·2, 사회복자사 자격증 취득

남북하나재단에서 진행한 탈북교사 공모에

합격 경남여자초등학교 계약직 교사로 취업

 

20137월 음악교습소 차려 1년간 운영

그 뒤 음악학원으로 변경...행정당국에서

계약직교사라도 학원영업 할 수 없다해서

고민하다 좋은 직업인 교사직을 포기해야

 

- 학원은 잘 운영되는가.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엊그제 학원개업을 한 것 같은데 올해로 벌써 8년째 학원에서 아코디언, 기타, 피아노를 원생들에게 열심히 가르친다. 처음에는 학부형들이 탈북민 선생이 과연 우리 아이들을 잘 가르칠까?”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실제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많이 찾아온다.

 

- 그 때 심정이 어떠했나.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음악도 마찬가지다. 악기 연주 등 북한의 음악이나 남한의 음악이나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북한노래에 김 부자 사상 충성내용만 빼면 말이다. 우리 학원의 현재 수강생은 월 30~40명이다. 매월 4회씩 지역사회복지관에서 80명 어르신에게 음악치료강의를 한다. 나의 제자 24명이 경남지역 곳곳에서 프리랜서로 공연활동을 하는 걸 보면 가슴이 뿌듯하다.

 

올해 8년째 학원에서 아코디언, 기타 가르쳐

처음 학부형들이 탈북민 선생이 우리 아이들

잘 가르칠까?” 반신반의했는데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 나면서 많이 찾아...수강생 월 40여명

 

매월 4회씩 지역사회복지관에서 80명 어르신에

음악치료강의... 제자 24명이 경남지역 곳곳에서

프리랜서로 공연활동 하는 걸 보면 가슴 뿌듯해

 

 - 그동안 어떤 봉사활동을 하였나.

지난 2015년부터 매해 200만원의 장학금을 어려운 탈북학생들을 위해서 내놓는다. 나는 11살짜리 딸을 데려와 함께 정착했기에 누구보다 한 부모가정의 어려움을 잘 안다. 탈북민 및 통일운동단체에 기부하는 형식이다. 큰돈은 아니지만 그걸 받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후에 또 그만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할 거라 본다.

 

- 카톡에 농사일 사진도 있던데.

4년 전부터 대략 460평의 임대농지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북한에서 군인가족으로 15년간 살면서 했던 일이라 몸에 푹 배였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밭에 나와서 농작물을 관리하면서 3시간 정도 일을 한다. 건강관리에도 좋고 여기서 나오는 야채는 전부 어려운 이웃과 독거노인 가정에 보내준다. 탈북독거노인 가족에게도 보내주는데 그것을 받아 든 사람들의 미소에서 작은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매해 200만원 장학금 탈북학생들 위해 내놓기도

4년 전부터 460평의 임대농지를 구입하여 농사

북한에서 군인가족으로 15년간 살면서 했던 일

몸에 배여 새벽 5시에 밭에 나와서 농작물 관리

 

 - 고마운 분이 있다면.

남한사회에 나온 다음날부터 돈을 벌겠다면서 식당에서 일하다 손에 화상까지 입었다. 그래도 몸을 돌보지 않고 청소 일을 할 때 공부를 해서 좋은 일하라고 조언해주신 목사님께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남북하나재단에서 탈북민들을 위해 애써 일하는 많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 하고 싶은 말은.

지옥의 땅 북한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던 우리 모녀를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받아준 이 나라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작게라도 그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모범시민이 되어 세금을 열심히 내며 살고 있다. 요즘은 고령화 시대이고 아코디언이 치매예방에도 좋다. 즐겁게 일하면서 한 가지 이상 취미활동 갖고 싶은 분들에게 아코디언레슨을 적극 추천한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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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5/06 [11:27]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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