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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 모닥불 피워 놓고 힘차게 부르다
[안영백의 백두산 기행] 천지(天地)의 물은 샘물처럼 맑았다 <4>
 
통일신문 기사입력  2020/06/03 [15:46]

노루발

밀림 속에서 굶주림을 참고 눈길을항일유격대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헤치며 골짜기와 능선을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막강한 일본군 부대와 싸웠다

 

밀영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유격대원들이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 숙영지였다. 삼일운동 이후인 192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항일유격대는 백두산 곳곳의 샘가에 숙영지를 마련했고, 밀영을 근거지로 하여 인근의 일본군 부대와 관공서들을 기습한 후 재빨리 백두산의 밀림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항일유격대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 굶주림을 참고 눈길을 헤치며 골짜기와 능선을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막강한 일본군 부대와 싸웠다. 영화 봉오동 전투또한 백두산의 지형과 산세를 이용한 항일유격대의 전과 중의 하나였다.

안내에 따라 막사로 올라갔다. 숲 그늘에 지은 나지막한 막사는 통나무로 기둥과 벽을 세우고, 벽 사이의 틈은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지붕은 나무껍질로 덮여 있었다.

실내로 들어갔다. 가마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 위의 작은 선반에 가지런하게 엎어져 있는 밥그릇들이 친숙해 보였다. 침상 위에는 이부자리가 잘 정돈되어 있었고, 반대편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투박한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밀영

출입문에 어른 주먹만 한 짐승의 털이

매달려 있어겨울엔 손잡이가 얼어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노루발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고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출입문에 어른 주먹만 한 짐승의 털이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뭘까? 겨울에는 손잡이가 얼어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노루발을 대신 매달아 놓은 것이라고, 강사들이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방과 취사를 하면서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아궁이와 노루발 손잡이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한번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사 맞은편에는 두 사람이 에워쌀 정도의 유리통들이 서 있었다. 덮개를 반쯤 벗겨놓은 유리통 안에는 나무 기둥이 들어 있었고, 시커멓게 변색한 줄기에는 희미한 글씨들이 남아 있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나무껍질을 벗긴 자리에 먹으로 애국 구호들을 써넣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호(口號) 나무라고 했다.

밀영 곳곳에는 병원과 사령부, 재봉소, 유격대원들의 막사들이 곳곳에 잘 배치되어 있었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투쟁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 다리미, 주걱, 깨진 병, 녹슨 깡통, 군복 등 유물들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모닥불 피워 놓고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잔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걸어온 백두산과 항일유격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밀영을 둘러본 후 지정된 숙영지에 텐트를 쳤고, 저녁 식사를 했다. 여전히 밥과 라면이었고, 산나물, 감자, 김치와 달걀이 반찬 전부였다.

이제는 아무도 먹을 수 있겠느냐, 먹을 만하냐고 묻지 않았다. 다들 수저를 들고 솥 근처를 서성거렸고, 솥뚜껑을 열자마자 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 가리지 않고 먹고 마시며 잘도 떠들었다. 식사를 마치면 개울가로 가서 가슴 시리게 차가운 물을 떠먹었다.

각자의 텐트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어나기에는 뭔가 대단히 허전했다.

거대한 침엽수림 가운데 뚫린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은빛 모래를 뿌려 놓은 듯한 밤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은하수가 비스듬히 흘러갔다. 유난히 큰 남빛 별 하나가 보석처럼 빛났다. 대기는 고요했다.

안내원이 밥솥을 걸었던 자리에 잔솔가지를 겹쳐 놓고 모닥불을 피웠다. 꼬물거리던 불꽃들이 화르르 살아나면서 춤추듯 널름거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모닥불을 둘러싸며 앉았고,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잔으로 커피를 마셨다. 지금까지 걸어온 백두산과 항일유격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닥불은 무섭도록 캄캄한 숲을 등지고 앉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서 어른거렸고, 한번 시작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함께 걸었던 안내원들과 친구가 된 지 오래였다. 혼자 먹으려고 숨겨두었던 군것질거리들을 꺼내놓았다.

한 안내원이 노래방 기계를 가져왔다. 축전지로 가동되는 기계였다. 다들 돌아가면서 각자 자기 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을 힘차게 불렀고, 안내원은 아리랑을 불렀다. 생김새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은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 대단한 음식도 없었는데, 박수로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어느새 항일유격대가 된 나는 행복하면서 설레기도 했다.

숲의 냉기와 함께 밤의 냄새가 물씬 끼쳐왔다.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다들 아쉬움을 안고 텐트로 돌아갔다. 텐트의 불들이 다 꺼진 후에도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밀영을 설치하는 데에는 우선 가까운 곳에 물이 있어야 했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야 했고,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동이 용이한 지점이어야 했다. 이렇게 험악한 산속에서 밀영을 설치한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려운 숲속을 무거운 무기들을 짊어진 채 걸었을 사람들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했다. 산짐승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는 밀림 속에서 샘을 찾아내고 통나무를 베어 막사를 짓고 나무껍질을 벗겨 구호를 새기는 것으로 독립을 향한 마음을 다잡았던 사람들은 누구였던가를 생각했다.

굶주림을 참고 눈밭을 헤치며 길도 없는 산속을 걸었던 사람들은 불과 백여 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의 선배들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눈이 닿는 곳곳마다 그들의 땀방울들이 떨어져 있을 것 같았고, 숨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잠이 들었다.

 

새로운 아침

비 갠 뒤의 높은 하늘에 드문드문

뭉게구름이 떠 있고 아침에 마시는

숲속의 공기는 신선하기까지 했다

 

 

저녁 내내 얌전하던 날씨가 험하게 변했다.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빗줄기가 텐트를 두들겨댔다.

늘 염려스러웠던 날씨였다. 그렇지 않아도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백두산 주변이 아닌가.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차츰 빗방울이 거세지면서 주룩주룩 내리기도 했다. 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했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비 갠 뒤의 높은 하늘에 드문드문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아침에 마시는 숲속의 공기는 깨끗함에 더해 신선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소박한 음식으로 기운을 차렸고, 새로운 하루를 위해 길을 나섰다.

거대한 원시림 사이로 하얗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걸었고, 운치 있는 돌다리를 건넜고, 험준한 산길을 기어올랐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는 감탄을 쏟아냈고, 계곡에서 흘러온 개울물에 발을 담갔다. 깔딱고개를 넘어서면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큰 숨을 몰아쉬며 자연의 신비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물들이 굽이를 돌 때마다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

 

항일투쟁 벽화

울창한 숲 사이 도로를 걷다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젊은이들

만나항일유적지 답사에 나선 학생들

 

 

울창한 숲 사이 도로를 걷다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만났다. 항일유적지 답사에 나선 학생들이었다.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얼굴에서 반가움이 느껴졌다. 우리는 손을 마주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산짐승이 튀어나올 것 같은 숲길을 걷기는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길을, 머물지 못하고 지나쳐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왜 걸음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까.

산길을 걷다 보면 자질구레한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었고, 좋았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나도 모르게 대범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사는 것인가 싶었다. 나는 백두산의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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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03 [15:46]  최종편집: ⓒ 통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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