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여성들 기가 센 게 아니고 삶의 의지가 강한 거예요”

[인터뷰] 김해린 탈북민 여성 전문 결혼업체 ‘김해린결혼정보’ 대표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21/03/12 [21:53]

“탈북 여성들 기가 센 게 아니고 삶의 의지가 강한 거예요”

[인터뷰] 김해린 탈북민 여성 전문 결혼업체 ‘김해린결혼정보’ 대표

통일신문 | 입력 : 2021/03/12 [21:53]

탈북민들이 목숨 걸고 북한을 뛰쳐나와 대한민국에 와서 가장 기쁜 순간은 바로 ‘주민등록증’을 받는 날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단지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공안을 피해서 쫓기여 다니던 나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김일성이 도발한 한국전쟁 휴전 이후 1953년부터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탈북민은 대략 3만 5천명. 이중 75%이상 4명 중 3명이 여성이다. 탈북민 중 절반 가까운 여성들이 남한에서 결혼 및 재혼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민족의 숙원인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 사람이 남한남성과 결혼하는 탈북여성, 혹은 남한여성과 결혼하는 탈북남성일 것이다. 쉽고도 어려운 사람과의 통일을 먼저 이룩한 이들이야 말로 분명히 통일의 기여자일 것이다. 이러한 통일의 기여자를 꾸준히 탄생시키는 주역이 바로 결혼정보회사다. 얼마 전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탈북여성 전문 결혼업체인 ‘김해린결혼정보’를 찾아 김해린 대표를 만나 남남북녀 결혼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진행 | 림일 객원기자

 

▲ 김해린 탈북민 여성 전문 결혼업체 ‘김해린결혼정보’ 대표



 

- ‘김해린결혼정보’는 언제 설립했나?

"2019년 12월 서울서 설립했다. 사무실은 사무실은 서울지하철 시청역 근처에 있다. 주소는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16 유원빌딩 1405호(서소문동 75-95) 로 지하철 시청역 9번 출구와 연결되어 있다. 현재 직원은 4명의 커플매니저 가운데 2명은 탈북여성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요한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고 정중해야 한다."

 

- 본인이 생각하는 결혼관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라도 서로가 성격이 달라 티격태격 하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남남끼리 만나서 부모나 형제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신비로운 인간관계가 되는 결혼은 그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다.

나는 결혼을 원하는 남녀 회원에게 서로가 상대에게 필요한 보석을 찾아준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배우자를 고를 때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찾아야 마음도 편하고 순조롭다고 늘 강조한다."

 

2019년 12월 설립… 직원 4명중 탈북여성이 2명

만남 주선하는 일이기에 신중하고 정중할 것 강조

필요한 보석을 찾아준다는 생각으로 일 하고 있어

상대방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가져야 순조로워

 

- 탈북여성들의 독특한 특성이 있을 것 같다.

"일부 여성회원들의 경우 “내가 북한에서 고생하고 왔으니 남한에서 돈 있는 남자라도 만나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다소 엉뚱한 속마음을 갖고 있다. 글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이겠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는 바른 남자회원을 만나기는 어렵다. 나는 그런 회원들에게 결혼할 사람을 보는데서 어느 정도 재산과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남자의 진실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 남한 남성들을 만났을 텐데 그들의 특성은 어떤가?

"대부분의 남한 남성들이 성격이 어질다고 할까? 아니면 소심하다고 할까? 여하튼 그런 모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일부 남성회원들이 처음 사무실을 방문하고 탈북여성들을 기가 세고 성격이 거칠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탈북여성들이 기가 센 것이 아니고 생활력이 강한 것이다. 그 가난하고 혹독한 북한사회서도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들은 분명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사는 따뜻한 분들이다."

 

- 지금까지 오면서 특이한 커플이 있었다면.

"보통 남녀회원은 회사 커플매니저의 소개로 3~4회 정도 만나면 결혼을 한다. 작년 초봄에 40대 중반의 남성회원이 무려 10번의 소개(미팅) 만에 아름다운 결혼을 했고 최근에 예쁜 아기까지 낳았다. 10명의 남성회원이 한 달에 3~4회 맞선을 본다면 그 중 7명이 결혼한다."

 

남한 남성들 성격 어질고 조금 소심하다 할 수 있어

일부 남성회원들 처음 사무실 방문하고 탈북여성들

기가 세고 성격이 거칠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

가난하고 혹독한 북한사회서도 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고향·가족 그리워하는 따뜻한 분들

 

- 고향은 어디인가.

"1992년 3월,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났다. 남동생이 있고 아버지는 혜산전화국 노동자, 어머니는 주부였다. 외모로 볼 때 남보다 지지 않던 나는 소학교시절 2회, 고등학교시절 3회 모두 5회에 걸쳐 중앙당 5과 대상(일명 기쁨조)에 걸렸었다. 중앙당 5과는 수령의 별장에서 근무할 젊은 남녀들을 전국에서 선별한다. 신원확인에서 부결되었는데 조부가 1970년대 소련(러시아) 벌목장에서 행불되었기 때문이다."

 

- 학교시절 꿈은 무엇이었나.

"고등학교 교원(교사)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육에 필요한 재료 및 기구는 몰론 심지어 운영에 쓰이는 돈과 자재(나무·석탄)도 전부 학생들에게 전가시킨다. 이것도 잘 바쳐야 ‘모범학생’으로 인정받는다. 공부도 물론 잘해야 하지만 학교서 요구하는 물자도 잘 바쳐야 상급학교(대학)와 좋은 직장을 배치 받는 것이 관행이다.

나는 비교적 공부도 열심히 했고 또 학교에 상납 물자도 많이 바쳤는데 결국은 졸업 때 내가 지망한 혜산교원대학은 끝내 가지 못했다. 이유는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자, 아버지가 노동자라는 좋지 않은 가문의 환경 탓이다."

 

- 가족의 생활수준은 어떠했나.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 고난의 행군시기(1990년대 중 후반, 4~5년간) 우리 집은 세끼 쌀밥에 5~6가지 반찬의 식탁을 마주 앉았다. 집에는 TV, 냉장고, 녹음기, 재봉기 등이 있었고 장롱에는 갖가지 고운 옷이 가득했으며 매일 그것을 골라 입었으니 잘 살았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어머니가 불법적으로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의류, 생활용품, 약품 등 중국산 물건을 도매로 넘기는 일을 했다. 차량으로 물건을 받고 넘길 정도로 크게 하였다. 북한은 전체 인민이 서로 감시하는 체제인데 동네 누군가의 신고로 어머니는 안전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어머니가 했던 장사물품에는 남조선 상품도 적지 않게 있었다. 어머니는 1년간 노동교화소(강제노역장)에 갔고 그동안 집안에 장만해뒀던 물건을 모두 팔아 그 돈으로 간부들에게 뇌물을 먹여 그나마 어머니 형량을 1년으로 낮추었다.

 

어머니는 그 후 장사를 계속하였다. 당국에서 주는 식량이나 생필품 공급은 전혀 없으니 죽지 않으려면 장사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엄하게 단속하였다. 옷도 남들처럼 허름하게 입고 다니라고 하셨고 특히 집에서 무엇을 먹었다는 소리는 밖에 나가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이후로 몇 년 뒤, 어머니가 다시 안전부에 단속이 되어 수개월 간 노동교화소 생활을 하고 나왔다."

 

양강도 혜산이 고향… 소학교 2회, 고등학교 3회

중앙당 5과 대상… 중앙당 5과는 수령 별장에서

근무할 젊은 남녀들 찾아 전국에서 선별하는 곳

조부가 소련 벌목장에서 행불 신원확인에서 부결

지망한 혜산교원대 가지 못한 이유도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자, 아버지가 노동자라는 가문의 환경 탓

 

- 그 환경에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아버지는 평소 앓으셨던 질병으로 고생을 하였다. 말이 좋아 혜산시 ‘인민병원’이지 실제는 ‘간부병원’이다. 간부들은 뭐든 우선이고 특혜적이다. 우리 같은 일반 백성들은 병원에 입원하려도 환자가 먹을 식량과 약을 갖고 가야 한다.

어린 나이지만 마음속으로 깊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가 당과 수령, 체제를 반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먹고 살려고 장사를 했을 뿐이다. 사람이 먹고 살아야 체제도 받들고 지킬 것 아닌가 말이다. 북한정권이 정말 미웠다.

이후 가족의 생활은 어려웠다. 일생에 한 번 갈까 말까하는 감옥에 우리 어머니는 두 번이나 다녀왔다. 그 후 어머니는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그러니 집에는 자연히 웃음도 사라졌고 매일 울상이었다. 인민반에서 당국에 바치라는 인민군대지원, 농촌동원, 혁명사적지건설 후원물자 등은 왜 그렇게 많고 끊이지 않던지 그게 제일 화나는 일이다."

 

-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준다면.

"정말이지 하루 두 끼 옥수수 죽도 겨우 먹으며 지냈다. 동네 이웃집에 쌀을 꾸려 다녀도 모두가 딱한 사정이라며 외면했다. 우리가 풍족하게 살 때는 무척 반겨주던 그들인데 신세가 거꾸로 되니 너무나 차가운 인상으로 변하더라.

장녀인 내가 어머니 대신 장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우리가족 4식구가 굶어죽을 판이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어머니가 했던 장사를 크게는 아니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했다. 하여 겨우 가족이 밥은 먹고 살았다."

 

-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무엇이었나?

"친척 중에 ‘남조선씨디알’(남한 CD)을 많이 유통시켜 혜산에서 제법 소문을 낸 사람이 있었다. 집에서 CD를 대량 복제하여 타 지역까지 뿌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확실히 남조선제품은 중국제품보다 비싸고 사람들의 수요도 높다. 친척은 훗날 보위부 조사를 받고 정치범수용소로 잡혀 간 것으로 안다. 그에게서 이따금씩 CD를 조금씩 가져다가 시장에 팔았으니 보위부에서 은밀히 나를 감시했다."

 

- 탈북 동기가 궁금하다.

"북한에서는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더라. 단지 하루 먹고 살기 위해 안전부의 눈치를 보며 장사를 해야 하는 것이 삶의 전부이다. 때가 되면 시집가서 아이 낳고 우리 어머니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어느 날, 지인 언니(탈북브로커)에게 “나 중국에 가서 돈 좀 벌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2011년 9월 눈물과 원한의 압록강을 넘어 낯선 이국, 중국으로 왔다. 이후 흑룡강성 등 여러 지역에서 공안을 피해 숨어 다니다가 라오스, 태국 등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왔다. 2012년 6월이고 내 나이 20살 때이다."

 

- 정착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나.

"대학공부를 준비하려고 서울 남산에 있는 여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1년간 공부하고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는데 고향에서 가족이 매우 힘들다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내가 받았던 임대아파트를 내놓고 그 돈을 빼서 탈북브로커 비용으로 엄마와 동생을 데려오려고 했다. 운이 따라주지 못해 가족은 보위부에 발각이 되고 처벌을 받았다. 이후로는 너무 무서워 탈북 할 생각을 엄두도 못내는 가족이다."

 

남녀회원이 처음 맞선 봐서 결혼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때가 제일 기뻐

정치인들에게는 선거 때만 북한주민과

탈북민이 우리 동포인 것 같아 섭섭해

가족 없이 온 분들… 따뜻이 배려해야

 

- 그 후 어떤 일을 하였는가.

"서울에 있는 OO결혼정보에 취업해 커플매니저로 일했다. 방문고객과 친절히 상담하고 전화로 회원 간 연결을 해주는 등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직업이다. 2년간 일하면서 많이 배웠고 창업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하여 2018년 10월 부산 해운대구로 내려가서 결혼정보회사를 설립했다. 의외로 결혼 성사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나갔다. 부산 경남지역에서 밤낮이 따로 없이 열심히 발로 뛰어 수백 쌍의 아름다운 결혼커플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2019년 12월 서울서 ‘김해린결혼정보’는 언제 설립했다. 현재 직원은 4명의 커플매니저 가운데 2명은 탈북여성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요한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고 정중해야 한다."

 

- 가장 보람이 있을 때는 언제인가.

"남녀회원이 처음 맞선을 봐서 결혼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때 제일 기쁘다. 또한 결혼에 성공한 커플이 달콤한 신혼생활 속에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마치도 내가 낳은 것 마냥 한없이 기쁘다. 그 맛에 일을 한다.

어찌 보면 나는 통일전도사나 다름없다. 언젠가는 현재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남남북녀 혹은 북남남녀 커플이 흔하고 평범한 일상이 될 것이다. 지금 나는 그 미래를 개척하고 있으니 자부심이 드는 것은 기본이고 신나게 일한다."

 

-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언젠가 뉴스에서 보니 국회에서 우리 탈북민들도 다문화가족의 일부로 봐야한다는 정책건의를 정부에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허탈하다. 정치인들에게는 선거 때만 ‘북한주민과 탈북민은 우리 동포’인 것 같다. 대부분 탈북여성들은 가족이 없이 홀로 온 분들이다. 누구보다 가족이 그립고 따뜻한 남편의 사랑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남한사회에서 우리 탈북여성들에게 보다 깊은 관심과 배려를 보여 달라."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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