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이 증언하는 北 최고명문 체육대학 환경과 선수들 애환

박세영 前 조선체육대학생 겸 운동선수

림일 객원기자 | 기사입력 2021/06/16 [00:39]

탈북민이 증언하는 北 최고명문 체육대학 환경과 선수들 애환

박세영 前 조선체육대학생 겸 운동선수

림일 객원기자 | 입력 : 2021/06/16 [00:39]

 

 

1970년대 북한의 2대(김일성과 공동) 수령 김정일은 대학졸업 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에서 문화예술 분야를 맡아 지도하였다. 당의 막강한 권한으로 사상(학습·강연·총화) 선전을 통해 인민을 세뇌시키고 당국에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영화와 공연 등을 통해 문화생활을 누리는 유일한 존재인 점을 악용하여 그 영화와 공연 등에 철저한 혁명(수령)사상을 접목시켰다. 인간의 감성을 극도로 자극시켜 당과 수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이끌었다.

그때로부터 40년 뒤에 나타난 북한의 3대 수령 김정은은 유년 및 유학시절에 운동 특히 농구를 유난히 좋아했다. 과거 그가 국제경기서 우승하고 귀국하는 선수들을 평양비행장에서 직접 마중할 정도로 체육 분야에 애정을 쏟는다.

그렇다고 국제경기의 여러 종목에서 성적이 크게 오른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 분야의 내막은 겉과 다르다는 추측이다. 박세영 전 조선체육대학 운동선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조선체육대학에도 선수단이 있는가?

조선체육대학은 평양시 동대원구역 랭천동에 있다. 여기에는 김일성이 1945년 해방 후 나무를 심은 ‘문수봉혁명사적지’와 ‘랭천사이다공장’이 등이 있다. 체육대학 주변에 동평양경기장, 조선인민군출판사, 음악무용대학, 연극영화대학, 미술대학 등이 있다.

내가 입학한 체육대학 ‘전문부’는 고교생 급의 학과다. 그 다음 본학부(4년), 감독학부(3년) 모두 7년의 과정이 있다. 본 학부를 졸업하면 인민 및 고등학교, 대학 체육교원으로 가며 감독부를 졸업하면 체육단, 구락부(클럽) 감독으로 간다.

선수단은 당연히 있다. 그것도 중앙급 선수단인 4·25체육단(무력성), 평양시체육단, 압록강체육단(보안성), 경공업성체육단, 기관차체육단(철도성), 제비체육단, 월미도체육단(만수대창작사) 식으로 조선체육대학 선수단이 있다. 매해 2월 ‘백두산상’, 4월 ‘만경대상’, 6월 ‘보천보홰불상’, 9월 ‘공화국선수권대회’, 그리고 4년에 한 번씩 ‘전국인민체육대회’가 있다. 이 모든 경기에 중앙급 선수단 대부분이 반드시 출전한다.

 

- 경기에서 우승하면 어떤 상품이 있는가.

모든 경기에는 우승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하는 컵(트로피)이나 깃발이 있다. 일종의 영예인 것이다. 공화국선수권 대회나 전국인민체육대회에는 간혹 상품이 나온다. 잘하면 칼라TV가 나올 때 있으나 보통은 땀복(전문체육운동복), 운동선수 전용신발 및 가방 등이다. 대부분 중국산 제품으로 북한산 보다는 나은 편이다.

 

- 평상시 일과를 소개해 준다면.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청소 및 정돈을 하고 7시에 조식을 한다. 오전 9시부터 90분 강의 세 과목을 한다. 이론 강의(혁명역사, 국어, 당정책, 수학, 외국어, 생물 등) 한 과목, 전공(실기) 강의 두 과목이다. 오후에는 전문 훈련시간이다.

식당은 일반식당과 노르마(영양제) 식당이 있다. 매끼 쌀밥, 계란, 돼지고기, 곶감 등이 나오는 노르마식당은 중앙급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만 출입한다. 일반식당에는 옥수수떡이나 시래깃국, 국수에 염장무가 전부이다. 정말이지 사람에게 다른 것도 아니고 음식까지 차별을 두니 그보다 수치스러운 게 없는 것 같다.

 

경기서 우승한 개인과 단체에 컵이나 깃발 수여

일종의 영예… 공화국선수권·전국인민체육대회서

운동선수 전용신발 및 가방, 운동복 등 상품 나와

대부분 중국산 제품으로 북한산 보다는 나은 편

 

- 또 다른 애로조건은 무엇인가.

체육대학에는 ‘옷수리소’(옷이나 운동복을 선수의 몸에 맞게 고치거나 수리하는 곳)는 있으나 세탁소는 없다. 그러니 선수들이 경기 종료 후 더러워진 운동복을 본인 가방에 넣고 합숙에 와서 빨아야 한다. 합숙 창문은 세탁물 천지다.

거짓말 같지만 내가 체육대학 감독학부까지 10년간 다니면서 언제 한 번 기숙사 수도꼭지에서 온수가 나오는 걸 보지 못했다. 겨울에는 합숙에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아 옷을 껴입고 잔다. 거기에 정전은 수시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 학생 중 선수는 어느 정도인가.

체육대학 각 학과에서 선수로 뛰는 학생은 대략 30% 정도이다. 선수들은 모두 합숙생활을 한다. 이유는 질서유지와 선수들의 식단조절 때문이다. 보통 학부모들의 직급은 제일 낮아야 공장지배인, 농촌관리위원장 정도이다.

내가 전문부에 입학해서 3년 뒤에 보니 34명 중에 16명이 중도 자퇴했다. 이론과목은 크게 중시하지 않는 체육대학이라고 다소 쉽게 보고 입학했다가 큰 코를 다치고 되돌아간 것이다.

 

6시 기상, 청소 및 정돈을 하고 7시에 조식

9시부터 90분 강의 세 과목, 오후 훈련시간

 

체육대학에 ‘옷수리소’는 있으나 세탁소 없어

선수들이 더러워진 운동복 합숙에 와서 빨아

합숙 창문은 세탁물 천지… 10년간 다니면서

기숙사 수도에서 온수가 나오는 걸 보지 못해

겨울에는 난방이 안 돼 옷 껴입고 잠을 자기도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2000년대 초반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이후 중앙당5과서 키 165cm의 처녀들을 모집했다. 체육대학에서 나를 포함 2명이 뽑혀 안대를 착용,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어떤 건물 안) 갔다. 60명 처녀들 신체검사를 마치고 담당자가 “장군님 승마(사냥)기쁨조에 발탁되면 영광이고 안 되어도 절대 비밀로 엄수하라”고 당부했다.

당첨되지 못한 것은 심사를 보는 시간에 여러 군데서 청탁성 전화가 걸려오는 걸 보았다. 높은 간부들이 제 자식이나 친척을 잘 봐달라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심사에 당첨되면 ‘장군님을 몸 가까이 모시는 혁명전사’로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고 행운이다.

본인의 입당은 물론이고, 명절 때마다 본인들 가정에 중앙당선물(식품)이 하사된다. 나의 아버지는 고작 인민군 군관(장교)이었으니 크게 기대는 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첨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한국에 왔으니 말이다.

 

체육대학에서 선수로 뛰는 학생은 30% 정도

선수들 모두 합숙생활...질서와 식단조절 때문

학부모들 직급은 공장지배인, 농촌관리위원장

전문부에 입학해서 3년 뒤에 보니 34명 중에

16명 중도 자퇴… 쉽게 입학했다가 큰 코 다쳐

 

- 대학졸업 후 평양에서 농촌으로 간 것이 궁금하다.

대학 졸업생들의 배치도 큰 문제이다. 잘하면 체육단, 못해도 구락부 감독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중앙급 선수단은 자기네 선수출신의 특설반 졸업생들을 요구하고 구락부 감독자리도 간부지도원에게 많은 뇌물을 줘야 간다. 그러니 공장 체육지도원으로 가라는데 정말 자존심이 상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이럴 바에 시집가자!”고 생각하고 대학졸업 학년에 사귀었던 동료남학생(함북 온성군 체육위원회 배치)을 따라 결혼을 전재로 갔다. 참고로 북한서 대학생이 연애하면 퇴학인데 나는 대학에 바친 메달도 있어 특별히 면제됐다.

정말이지 평양과 지방은 하늘과 땅 차이다. 식량배급은 전혀 없었고 무엇이든 전부 자기들이 알아서 살아야 했다. 시누이 2명이 있었는데 집에서 꽈배기를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시장에 나가서 팔았고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였다. 그렇게 모두 9개월을 장사하고 이후에는 쌀과 화장품 장사를 시작했다. 평양의 쌀을 온성에 가져다가 팔고 온성의 중국산화장품을 열차를 이용하여 평양에 가서 팔았다.

 

- 탈북동기는 무엇인가.

화교(북한국적을 가진 중국사람)한데 화장품을 도매가로 받는데 어느 날 “가만! 내가 중국에 가서 직접 가져오면 이익금이 더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2005년 6월 온성군 종성노동자구 앞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펄프공장이 있는 지역이고 어느 주택에 들어가 사연을 말했더니 다음날 누군가에 끌려 어디론가 갔다.

인신매매에 걸린 것이다. 2일간 차를 타고 간 곳이 요녕성 어느 농촌이다.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아이와 남편이 있는 고향(북한)으로 다시 가자”고 결심하고 그 곳을 탈출하여 연길로 가는 기차에 올랐는데 공안에게 단속 되어 북송되는 비극을 맞았다.

온성군집결소에 수감되어 2개월간 강제노역을 했다. 이후 평양의 보위부로 압송되는 열차에 올랐는데 어느 순간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면 영영 죽겠구나!”하는 판단이 들어 호송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열차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다음날 다시 두만강을 건넜고 청도로 가서 2년간 숨어 일하다가 2007년 8월 한국에 왔다.

 

졸업 후 중앙급 선수단은 자기네 선수출신의

특설반 졸업생들 요구하고 구락부 감독자리도

간부지도원에게 많은 뇌물을 줘야 갈 수 있어

공장체육지도원으로 가라는데 받아들이지 못해

대학졸업 학년에 사귀었던 동료남학생과 결혼

 

화교한테 화장품을 도매가로 받는데 어느 날

중국에서 직접 하면 이익이 크겠다는 생각 들어

2005년 6월 온성 종성노동자구 앞 두만강 건너

공안에게 단속이 되어 북송되는 비극을 맞는 등

우여곡절 겪어… 청도에서 숨어살다 한국에 입국

 

- 남한에[서 사회생활 초기 무슨 일을 하였나.

2007년 5월부터 서울 강남 대치동 롯데백화점 고객지원부 주차도우미를 하였다. 6개월 만에 조장, 1년 뒤에 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교육담당 서비스매니저로 롯데백화점 주차도우미 수백 명에게 정기교육을 4년간 시켜주었다.

허리통증 등 건강상의 이유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이후 안보강사로 활동하면서 청소년, 군인, 단체 등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다. 동시에 여러 탈북민 예술단체에 프리랜서로 소속이 되어 무용을 배웠고 예술 공연활동에 참여했다.

이색적인 증서가 있다. 2015년 12월, 미시즈 글로브 코리아2015 조직위원회서 주최한 MRS. Globe Korea2015에서 베스트 친화력상으로 입상하였다. 이 대회에 탈북민이 참여하기는 내가 최초이다. 남한사회에서 많은 국민들이 탈북여성하면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온 외롭고 고달픈 이미지로 인식되었는데 꼭 그렇지 않음을 이 대회 참가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이 38세 때 있었던 일이고 개인적으로 영광으로 생각한다.

 

강남 대치동 롯데백화점 고객지원부 주차도우미

6개월 만에 조장, 1년 뒤에 팀장으로 진급하기도

미시즈 글로브 코리아 2015 조직위원회서 주최한

MRS. Globe Korea2015에서 친화력상으로 입상

대회에 탈북민이 참여하기는 최초로 자부심 가져

 

- 고향에서 유년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1977년 4월 평양서 태어났고 오빠가 있다. 부친은 호위사령부 군관(장교), 모친은 평천구역당위원회 당원등록과 지도원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어려서부터 예술(성악·기악) 계통으로 키우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예술보다 체육 분야에 더 소질이 있었다. 아마도 총 잘 쏘는 군인인 아버지의 피를 더 받은 것 같다.

인민(초등)학생 때 수영·농구·육상 등 종목에서 전교 1~3등을, 고등학생 때 구역 급 100m, 800m 달리기서 우승을 했다. 고교 4학년 때 신문에 난 체육대학 학생모집 공고를 보고 가서 예비시험(실기)을 봤다. 2주 뒤 2차 시험까지 보고 1992년 9월 합격통지서를 받아 조선체육대학 전문부(3년)에 입학했다. 전문부 3학년 때 백두산상 체육경기대회에 출전, 멀리뛰기 종목에서 동메달을 땄다. 생애 첫 메달이다.

 

-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2018년부터 아모레퍼시픽 인천논현점에서 근무하고 있다. 북한서도 남한서도 화장품을 파는 거의 유일한 탈북민이다. 일종의 방문판매하는 업종인데 나름 즐겁게 일을 한다. 고객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려 가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친절과 미소는 고객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고 방법이다. 한 번 가서 쉽게 판매하는 곳은 드물고 대부분 세 번이나 그 이상 찾아가 목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내성으로 고객에게 다가가서 진심을 보이는 것이다.

 

- 탈북민으로 고객을 대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다.

나는 일하면서 고객에게 내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한 탈북민’ 이라고 자랑한다. 열심히 일을 해서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사는데 어디가 꿀려 신분을 감출 필요까지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 탈북민들은 남북을 모두 경험해본 소중한 존재로 통일의 조약돌이고 선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내 경험에 의하면 우리 탈북민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남한사람들과 잘 융화되어야 비교적 정착이 쉽다. 이왕 이 땅에 와서 사는 것이면 당당하게 살 필요가 있다. 남한사람들도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와서 따뜻이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통일의 밑그림이 될 것이다. 탈북여성, 남한여성 모두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을 많이 사용하여 예뻐졌으면 좋겠다.

 

림일 객원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함경남도 황봉산계곡의 소형수력발전소
광고
광고
광고